찬양을 이야기 하자
찬양으로 쓰일 수 없는 음악도 있는가
사람이 거듭나면 문화조차도 구속되는가
지난 2000년 12월호와 2001년 1월호 이코스타에는 ‘오늘의 음악, 영원의 메시지’라는 제목으로 CCM에 관한 하덕규씨의 글이 실린 적이 있다. 그중에서 2001년 1월호에 실린 글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80년대 이후로의 기독교 음악 발전상을 돌이켜 볼 때, 크리스천 뮤지션들에게는 자기들이 지키는 ‘어떤 선’이라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운드가 강력한 록(Rock) 음악도 ‘믹스다운(mix-down)’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반주보다는 노래 소리가 더 크게 들리도록 조절한다. 이것은 크리스천 음악이 메시지의 음악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크리스천 록이 주로 취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작업은 메시지 전달을 중시하는 복음 증거에 목적을 둔 기독교 예술가로서의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크리스천 음악들도 현대음악의 한 장르라고 볼 때, 관능적이라고 할 수 있는 힙합, R&B, 랩 등의 노래형식이 각광받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에서 크리스천 음악이 이러한 주변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클래식컬한 교회음악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형식의 크리스천 음악이 더 관능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크리스천 음악들은 이러한 형식들을 걸러내어 그들의 것으로 정착시켜왔음이 분명하다. 내 경우에도 그렇다. 나는 회심한 후 3년 정도는 그 동안 내가 좋아했고 영향을 받았던 많은 팝 음악을 도저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음악을 통한 복음전도자로서 내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내게 원하셨던 것은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전과는 달리 참으로 많이 기도하며 두렵고 떨리는 작업기간을 거치게 되었는데 그렇게 만들어진 ‘숲’이라는 음반은 그 이전의 다른 음반들과는 분명히 달랐다. 그 이전의 노래들은 대체로 자연을 소재로 하며 동화적인 노랫말에 어쿠스틱 악기를 주로 사용하여 서정적인 면을 많이 강조했었음에도, 내 노래를 좋아했었던 사람들이 이후의 음악과 확연하게 구분하듯이, 그 노래들은 전위적인 면을 포함한 형식으로 기존의 현실들을 냉소하는 메시지가 다분히 깔려 있었던 그런 노래들이었다. 그러나 내가 변화된 이후의 노래들은 하나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그때 그때마다 주신 영감으로 쓰여지고 걸러진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된다.”
개인적으로 하덕규씨의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게는 솔직히 요즘 하덕규씨의 모습보다는 예전의 ‘시인과 촌장’에서 통기타를 치며 조용히 노래하던 음유시인의 모습이 훨씬 더 기억에 남곤 한다. 그런 점에서 그가 앨범 ‘숲’을 낸 이후 다음 앨범 ‘쉼’으로 거쳐가는 과정 중에 보여주었던, 한 사람의 ‘가수’에서 ‘기독교 문화사역자’로 변모되는 모습이 내게 여러 가지로 도전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길게 하덕규씨의 글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윗글에서처럼 정말 ‘사람이 거듭나면 그가 지닌 문화조차도 구속(救贖)’되는가? 예를 들어서 하덕규씨가 말한 대로 심한 록음악이나 힙합, R&B, 랩 등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서 온전한 기독교인으로 살게 되면, 그들이 활동하는 모든 작품 가운데 온전하게 변화된 모습이 드러나게 되는가 말이다. 질문을 다시 요약한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한 음악인들은 무슨 음악으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가?’
아무 음악이나 다 괜찮나
내가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아더 홈즈의 책 제목처럼 “모든 진리는 하나님이 주신 진리”라는 명제에 대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여전히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덕규씨가 회심하고 난 뒤 처음 3년 동안은 전혀 팝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이, 우리 주변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이후로 “이전에 즐기던 세상 일들”은 모두 헛되게 보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세상과 담을 쌓고 교회 안에서 핵심적인 일들을 담당하며 모든 공예배의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하덕규씨가 다시 이전에 좋아하던 “대중음악을 들으며 형성되어진 나의 그 음악 스타일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허락하신 사명임을 깨닫고 새롭게 작업을 시작했다고 하는 말이 여전히 특별하게 들린다. 오늘 나의 이러한 고민은 주로 음악적인 장르에 대한 고민이다. 이렇게 글을 전개하려고 하는 이유에는 몇 달 전에 이코스타 ‘독자 오픈 포럼’에 한 분이 올렸던 질문에 미흡하나마 답을 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다. 지난 9월3일에는 ‘대일’님이 745번 글을 통해서 이런 질문을 올린 적이 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인용해 본다.
“그런데 (개인의 취향을 일단 뒤로하고) 그런 생각 뒤에는 “every forms are neutral”이라는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롹(rock)이든 hip-hop이든 뭣이든 그 자체는 중립적이며, 그걸 꼭 의심의 눈으로 볼께 아니라, 어떤 형식이든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쓰이면 (즉, 음악의 주제선정을 잘하기만 하면) 된다라는 생각입니다. 전, 이런 생각에도 그 뜻에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subjects justify forms”가 근본적인 차원에서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진 의문의 근원입니다. 연관되는 질문은, 과연 그렇다면 (if subjects indeed justify forms to use), 각 형식에서 (롹이든, 힙합이든, 메탈이든) 예배에 적합한 어떤 종류의 멜로디, 박자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좀 질문이 째째해지나요?^^] 즉 주어진 장르 안에서, 어떤 멜로디가 다른 멜로디보다, 어떤 박자가 다른 박자보다, 어떤 악기구성이 다른 악기구성보다 더 좋은(??), 맞는(??) 멜로디, 박자, 악기구성이 있나요? 아님, 이것마저도, 어떤 박자든, 멜로디든 상관없나요? 즉 모든 음의 흐름이 다 가치 중립적인가요? 즉, ‘Hotel California’ 원판 그대로에다가 가사(주제)만 바꾸어 부른 것과, ‘부흥’ 찬양 두 곡을 놓고 볼 때, 음악만을 보고서, 어떤 판단을 할 수 있나요?….”
‘호텔 캘리포니아'(Hotel California)와 ‘부흥’의 음악 자체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아마 똑같은 악기 구성에 하나는 미국의 록밴드 ‘이글스'(The Eagles)가 크게 히트시켰던 70년대의 대중음악이고, 하나는 고형원이라는 한국인 찬양사역자가 만들어서 크게 히트(?)했던 90년대의 찬양음악이란 차이가 있다고나 할까 아마 뚜렷한 구분을 짓는 것은 무리라고 하겠다. 그러나 ‘부흥’이 숱한 기도와 묵상 가운데 한 사람이 빚어낸 곡조있는 기도였다면 ‘호텔 캘리포니아’는 그 음악의 진원지가 어디인지 궁금하게 만드는 대표적인 팝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혹시 알고 있었는가? ‘호텔 캘리포니아’ 앨범이 처음 출반 되었을 때 나왔던 앨범의 자켓의 속지 그림을 보면 호텔 안 2층에 있는 창문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한 남자의 그림이 있는데 그가 바로 최초로 ‘사탄 교회’를 창설한 안톤 라비라고 하는 남자라는 사실을! 이러한 말들은 몇 년 전에 ‘록음악에 나타난 사탄의 상징’, 혹은 ‘백워드 매스킹'(Backwards Masking)에 관한 주제들이 한참 우리 주변에서 시끄러울 때 자주 듣던 사실이다.) <각주>
자, 만일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면, 실제 록음악과 헤비 메탈을 하는 음악인들의 일부가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서 영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든지 아니면 아예 매를린 맨슨(Marilyn Manson)처럼 노골적으로 ‘자신은 사탄을 위해서 또 청소년들을 타락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들이 만드는 음악에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질 수밖에 없다.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으로 만들어 낼 수 있나? 이러한 질문을 던져 본다.
역사 속에 담긴 찬양에 대한 갈등들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가 탄생할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어제와 오늘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322년 요한 22세가 ‘아르스 노바’라는 새로운 음악적인 장르에 의해 쓰여진 모테트에 반대하는 칙서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새로운 학파의 제자들이 멘수라 음표를 억제하고 새로운 음표형식에 기울어서 잘 전해져온 옛 것 대신에 자신들이 새로 만든 것을 연주한다. 교회노래들이 짧은 음표로 연주되고 작은 음표로 넘쳐난다. 노래하는 이들이 멜로디를 호케투스로 잘라놓아 디스칸트들을 통해 성부를 많이 만들어서 가끔 천박한 제3성부와 모테투스 성부를 강요하여 안티포날레와 그라두알레의 원곡을 무시하여 자기 음악의 기본이 되는 것을 전혀 개의치 않으며, 교회선법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어서 그 선법들을 구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혼합시켜버린다. 이는 음표로 범벅시키는 것이 성가선율의 절제된 상승과 온건한 하강을 통해 교회선법이 구분되어야할 것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노래하는 이들이 쉬지 않고 움직이기 때문에 경건심을 불러일으키는 대신에 청각을 마취시킨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몸짓으로 대신 표현하려고 한다. 그 결과, 본래의 목적인 경건심은 한쪽으로 물러나고 책망 받아야할 경망함이 펼쳐진다. 그러나 축일 또는 축제적인 미사에서는 옥타브, 5도, 4도 등의 선율적 협화음 사용을 금하지는 않겠다.”
간단하게 말하면 14세기에서 15세기로 가면서 당시 종교음악에서 가장 큰 이슈는 ‘그레고리안 성가’의 정통성이 점차 흔들리면서 단성부 음악에서 다성부 음악으로 가는 큰 흐름에 대한 것이었다. 이를테면 멜로디만 있는 찬양이 몇 백년 이상 교회 안에서 불려져 오다가 점점 음악의 발전과 더불어 다양한 화음이 찬양에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것은 예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고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깨버리는 반동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저항은 멈출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을 두 손으로 막고 있는 일과 같은 것이었음을 역사는 증명한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에서 나타났던 세대와 세대간의 갈등과 저항은 역사 안에서 계속적으로 반복되었던 일이다.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교회음악, 찬양이 늘 아주 경건하고 거룩한 것들 가운데에서 탄생되었다고 보는 것도 사실은 착각이다. ‘종교 음악’하면 바하의 미사음악을 떠올리고 잘 갖추어진 성가대의 아름다운 화음을 생각하는 것이 사실 우리의 고정관념이다. 예를 들어서 고난주간에 많이 불리는 ‘오 거룩하신 주님'(찬송가 145장)의 경우 그 찬양의 원래 멜로디는 ‘내 마음에 안정이 없네, 그 처녀 때문일세’라는 중세 당시의 대표적인 유행가의 멜로디였다. 여기에 중세의 수사 끌레보의 버나드 수사가 쓴 성시(聖時)가 덧입혀져 바하의 편곡을 통해 아름다운 종교 음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뭐 이러한 역사가 있는 찬양이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에는 너무나 많이 담겨 있다. 당시에 유행하는 가요들의 멜로디를 따다가 가사를 붙이는 이른바 ‘노가바’를 통해서 거룩한 찬양으로 둔갑하는 일들이 너무나도 빈번했던 것이다. ‘복의 근원 강림하사’라든지 ‘나같은 죄인 살리신’등의 찬양은 너무나 유명한 민요에다가 가사를 붙인 찬양들이다. 심지어는 ‘Battle Hymn of Republic’이라는 남북전쟁 당시의 유명한 군가는 ‘마귀들과 싸울지라’는 놀라운 영적 전쟁의 찬양으로 바뀌지 않는가.
노가바만 잘 하면?
‘노가바’의 역사가 이처럼 오래된 것을 보면, 모든 시대마다 온전하고 거룩한 것들을 주님께 드리기 위해 고민하고 갈등했던 모습들이 늘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찬양으로 드릴 곡조들이 없었으면 유행가 가요에서 멜로디를 따다가 그 찬양들을 곡조로 붙이겠는가. 처음 그 유행가 멜로디를 듣는 작사자의 참담한 마음은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동안 교회 안에서 얼마나 찬양이라는 예배의 중요한 요소를 회중들에게 주지 못하고 훈련된 성가대에게만 국한시켰었기 때문에 나타난 일이었음도 깨달을 수 있다. 마틴 루터가 했던 큰 일이 있다면 ’95개조 반박문’을 비튼베르그 성당에 내다 붙임으로써 종교 개혁의 불씨를 당긴 것뿐만 아니라, 바로 이 찬양을 성가대의 몫에서 회중의 몫으로 돌려줌으로 인해서 엄청난 예배의 갱신을 가져 왔다는 사실이다. 종교 개혁이 일어나면서 회중들은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와 언어로 찬양을 예배시간에 직접 올려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 종교개혁자들 가운데는 구교(舊敎)가 남겨 놓은 이 음악적인 악습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쯔빙글리처럼 ‘앞으로 모든 공예배에서는 찬양 음악을 금지하고 오직 말씀 듣는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 인해 오르간을 교회에서 내다 부수고 모든 음악을 금지시켰던 안타까운 모습도 있었다. 칼빈도 처음에는 다성부 음악이 예배시간이 불려지는 것을 금지했고 오직 시편으로 된 찬송만을 단성부로 부를 것을 권장했고 처음에는 예배 시간에 악기 반주도 금지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나중에는 그 의견을 수정했지만.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그럼 ‘호텔 캘리포니아’도 ‘노가바’만 잘 하면 좋은 찬양 음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정신없는 랩음악이나 타악기로만 연주되는 음악도 가사만 잘 전달하면 얼마든지 찬양으로 쓰일 수 있는가? 시끄러운 슬래시 메탈이나 헤비 메탈 음악도 그 세대들이 좋아하는 음악이니 더 뜨겁게 마음에 와닿게 찬양할 수 있으므로 한 20년쯤 지나면 교회의 주된 찬양 음악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음악과 문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프리카나 피지 같은 데서 드리는 기독교인들의 찬양은 지금 19-20세기 서구 기독교 음악에 푹 젖어 있는 대한민국의 기독교인들이 들으면 충격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아마 다음 글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잠깐, 오늘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무슨 음악이건 찬양이 될 수 있는가? 음… 역사를 생각해 보면 아마 많은 논란 끝에 결국은 그 세대의 찬양으로 자리잡게 되겠지? 그런데 잘 모르겠다. 필자도 이미 귀가 찢어지게 시끄러운 록음악이 거북스러워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내게 한가지 드는 결심은 이것이다. 또 수많은 찬양들이 ‘노가바’로 때워져서 코메디처럼 되기 전에 미리 미리 좋은 찬양을 열심히 만들자는 결심이다. 시를 쓰는 사람들이여, 좋은 찬양 시들 좀 많이 써달라. 곡을 쓰는 사람들이여, 제발 하나님께 드리는 좋은 찬양들 좀 열심히 써달라. 무슨 일을 하건 주께 하듯, 믿음과 삶이 일치된 사람들이 계속 쏟아져 나와야 할텐데… 걱정이다. 가요계에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그 사람들 교회 안에서는 여러 가지로 잘 할지 몰라도 가요계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걱정된다. ‘노가바’ 해도 은혜 안될 사람 많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