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양을 이야기 하자
톡톡 튀는 찬양 인도자를 위한 변명
기도함에 들어온 어느 무명의 투서(!)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번째 전임 사역지로 부르심을 받아서 사역을 하게 된 교회는 이제 25년의 역사를 넘긴 매우 전통적인 장로교회이다. 그동안 젊은이 사역을 나름대로 하면서 ‘젊은 세대에 호흡을 맞추는 사역을 하고 싶다’는 꿈이 있었던 나에게는 때로는 예상치 못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곤 했다. 교회에 부임한 첫번째 주일에 만났던 어느 권사님의 말씀을 잊을 수가 없다. ‘찬양사역’ 담당 전도사라고 소개를 드리며 인사하자 대뜸 하시는 말씀이 “나는 도대체가 박수 치면서 찬양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어요”라고 불만을 털어놓으신다. ‘어디 하나님 앞에서 경건치 못하게 어린애들처럼 난리를 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던 그 권사님은 조용한 중에 경건하게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호하시는 전형적인 분이시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모습을 보며 그 삶 속에 녹아 있는 경건함을 발견하곤 한다. 이런 분들을 첫주부터 곳곳에서 만났던 나는 약간의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으로 찬양사역을 시작했다. 장년들을 위한 수요예배를 인도할 때는 혼자 조용히 피아노를 치면서 ‘찬송가’ 두곡을 메들리로 인도한다. 그리고 주일같은 경우에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인 ‘열린 예배’를 인도할 때면 찬양팀과 함께 거의 방방 뛰다시피 한다. 하루에 남반구와 북반구를 비행기 타고 왔다 갔다 하는 느낌이다.
그러던 어느날 잘 알고 지내는 집사님 한 분이 전화를 주셨다. 중보기도함을 관리하는 그분은 기도함에 기도제목이 아닌 일종의 편지가 들어왔다며 내게 슬며시 내용을 알려 주셨다. 그 편지의 내용은 ‘수요예배를 인도하는 젊은이(!)가 찬송 부르는 중간에 가사를 불러주고 하는 것 때문에 예배 때마다 온 가족이 시험에 들어서 힘들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도 집사님은 “저는 너무 좋은데…”라는 말을 나 들으라고 빼놓지 않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로 화제를 이끌고 가신다. 그리고 애써서 전화통화를 나누는 나는 좀처럼 마음이 편치 않아서 이내 전화를 끊게 된다. ‘의사소통의 창구가 얼마나 없으면 기도함을 통해서 표현을 하시나’하는 당혹감과 서운함 때문에 그분들을 이해하려는 마음도 쉽게 떠오르지 않는 나 자신을 본다.
장래희망이 찬양 인도자?
찬양인도자/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이 성경적으로 맞는 용어이긴 한지 나는 질문해 본다. 찬양인도자 때문에 시험이 드는 분들에 의하면 찬양인도자는 예배를 인도하면서 회중에게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그저 잠잠히 하나님을 향해서 뜨겁게 찬양만 부르는 사람인가? ‘아예 병풍을 쳐놓고 그 뒤에 서서 찬양을 할까?’하는 쓸데없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나는 ‘예배인도자란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고민이 많은 편이다.
Godpeople.com이나 hosanna.net 같은 기독교 포탈 사이트에 가보면 찬양을 좋아하고 예배를 좋아하는(?!) 10대 이상의 젊은이들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네티즌들은 CCM 사역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고, CCM 앨범이 나오는 족족 앨범에 대한 평가(주로 한 줄을 넘지 않는)나 얼른 사라는 등의 판촉을 하며, 주중에 있는 각종 찬양집회를 꼬박 꼬박 챙겨 다니며, 경배와 찬양을 너무나 좋아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예배인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자 비전”이라고 목소리 높여서 말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음을 본다. 그래서 심지어는 어느 선교단 찬양모임의 리더를 위한 팬클럽도 있고 ‘오늘은 집회에 가서 그분이 쓰시던 기타 피크를 받았는데 너무나 행복하다. 가보로 물려서 써야겠다’는 글도 올려져 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웹서핑을 멈추곤 한다. 예배인도자들이 연예인처럼 되는 현실이 무섭다. 예배인도자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들은 무엇 하는 사람들인가?
Worship Servant vs. Worship Leader?
요즈음 아주 각광을 받고 있는 찬양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많은 물소리.org’라고 하는 찬양집이다. 지난 92년에 처음으로 ‘많은 물소리 1.0’이라는 찬양집으로 시작하여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이 찬양집의 산파역할을 했던 사람은 황병구라는 분이다. 기독교 텔레비전에서 일했던 경험 때문에 사람들에게는 황병구PD로 자주 불리운다. 부흥한국의 부흥콘서트나 선교한국 등의 굵직한 집회들을 기획하는 일을 맡았던 재주꾼이다. 황병구PD는 ‘많은 물소리.org’를 발간하면서 책 서문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찬양문화에 대한 걱정들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종교개혁자들이 신부들에게 독점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일반인의 언어로 번역하여 배포하고, 성가대에 독점되어 있던 찬양을 회중에게 되돌려주었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회중이 늘상 누군가에게 찬양을 인도 당하지 않고 찬양의 주체로 당당히 서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확신에서입니다. 소수의 영적 자본가들에게 거듭 축적되어 부패될 수밖에 없었던 영적 자산을 교회 저변의 영적 민중에게 되돌려 생명을 불어넣었던 개혁주의 신앙전통을 되새기고 싶습니다.”
독점적인 예배인도자들에 대한 그의 걱정은 예배인도자(Worship Leader)라는 표현보다 예배섬김이(Worship Servant)라는 용어로 바뀌어 지기를 바라는 그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이제 찬양문화의 ‘3P운동’이 조용히 시작되기를 바란다. 그 3P운동이란, “Personal Praise Perspective”의 약자이다. 말하자면 그의 주장은 개인의 삶 속에서 “찬양가사를 말씀에 비추어 묵상하고, 현실과 상황 속에서 조명하고 그 찬양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해 내는” 경배와 찬양운동의 조용한 개인화 운동이다. 전문가집단이나 매니아그룹에 의해서 좌지우지되는 찬양문화를 넘어서서 이제는 음악적인 소양이 좀 없어도 하나님과 풍성한 영적인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깊이 있는 찬양을 드리고 즐길 수 있는 문화가 시작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 그 주장의 요지이다. 나는 그의 주장에 대해 깊이 동의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사역자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내 안에 남아 있는 질문을 지우지 못한다. “찬양/예배 인도자란 무엇 하는 사람인가?”
말씀 사역자는 1등, 찬양 사역자는 2등?
스스로가 찬양을 인도하면서 좀 튀는 편임을 잘 알고 있는 나는 황병구PD의 그러한 주장에 대해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히 사역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며 나의 부족한 삶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짚을 것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은 강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이렇게 질문해 본다. “그럼 목사는 왜 설교하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그냥 잠잠하게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현대인의 성경, 표준 새번역, 개역한글, 영어성경 등의 모든 버전으로) 그 말씀을 봉독한 후에 성도들이 스스로 주어진 말씀에 나타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하고 집으로 돌아가게 하지 뭐하러 애써서 그 어려운 말씀을 해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적용까지 갖다 붙이며 필요한 예화들도 양념처럼 곁들여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말을 대언하고 있는 것처럼 말씀에 대한 민중의 권리를 혼자 독점하는가? 너무 억지 주장인가? 그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중에게 선포되는 예배의 요소이고 찬양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의 요소이기 때문에 기준이 다를 수는 있다. 그런데 말씀 사역은 설교자 한사람이 좀 튀어도 되지만 찬양사역은 인도자가 절대로 튀면 안 되는 일인가? 그리고 왜 목사만 설교하는가? 평신도는 왜 설교하지 못하나? 나는 물론 만인사제설의 원리에 따라 은사를 받고 준비된 평신도 설교자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코스타에 참석하면서 목사들보다 훨씬 더 설교를 잘하는 평신도들을 나는 너무나 많이 만났다. 때문에 목사가 되려고 준비 중인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 대해 상당히 부끄럽게 생각하며 옷깃을 여미게 된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실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에 찬양 인도자에 대해서는 좀 다른 잣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은 너무나도 중요하고 귀한 사역이기 때문에 설교사역은 신학교에서 정식으로 성경해석하는 방법을 훈련받고 준비된 사역자가 해야 하는 것이지만 찬양사역에 대해서는 기타 좀 잘 치고 음악 잘하는 평신도가 하면 그래도 아쉬운 대로 된다는 생각 말이다. 이러한 우리의 인식 때문에 우리는 준비되지 않은 ‘즉석 멘트’로 예배의 분위기를 가라앉게 만들고 자기 간증 내지는 수다로 오히려 회중이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는 문턱을 가로막고 있는 찬양인도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을 짤라야 하나 말아야 하나’로 시험에 들고 고민한다. 그가 준비되고 훈련된 좋은 예배인도자로 설 수 있도록 지원한 것은 없으면서 말이다.
우리는 설교자에 대해서는 반드시 신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훈련받아야 할 것을 강조하는 반면에 찬양인도자에 대해서는 너무나도 열악한 방식으로 그저 그들 나름대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각자 알아서 사역에 대한 원리를 체득하도록 방임하고 있다. 이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겸손한 하나님의 통로가 되기를
성경에서 우리는 찬양/예배 인도자들의 사역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겨졌는지, 하나님께서 찬양받으시는 것에 대해 얼마나 관심이 있으셨는지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찬양/예배 인도자들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고 섬세하게 다루셨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성경의 역대상에 나타나는 말씀 등을 통하여 발견한다. 수천 명의 찬양대원들이 하나같이 성전에서 전임(Full-time)직원으로 채용되어 다른 일은 안 하면서 밥만 먹고 찬양준비하고 예배 때는 찬양인도자로 나섰던 일들은 요즘 교회의 현실에 빗대어 볼 때 상상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말씀은 중요하고 찬양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으셨다.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에 힘써야 할 우리는 왜 준비되고 훈련된 찬양인도자가 훈련되도록 기도하고 지원하지 않는가. 연예인 비슷한 인기 있는 찬양 인도자가 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다시 한번 말씀 앞에서 도전을 주고 겸손한 하나님의 도구가 되도록 채찍질하지 않는가 말이다.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회중에게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처럼 찬양/예배인도자들 역시 그들의 목소리와 평생에 갈고 닦은 음악적인 소양으로 하나님 앞에 제물로써 올려지는 동시에 예배에 참여하는 회중들에게 주님의 임재하심을 전달하는 통로이자 도구인 것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만일 ‘예배인도자의 모습이 너무 드러나는 것이 은혜가 안된다’라든지 ‘그냥 아무도 무대 위에 올라가지 않고 드리는 찬양이 더 좋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러한 생각을 똑같이 말씀사역에도 적용해 보았느냐고. 설교자들도 자기 목소리가 구별되지 않도록 Voice Scrambler를 사용해서 말해야 하며 병풍 뒤에 숨어서 설교해야 한다면 그 억지 때문에 좀 우습지 않은가. 설교자 개인의 화술 능력과 말솜씨와 목소리와 모든 인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것처럼 찬양 인도자들의 목소리와 모습과 삶을 통해서도 역시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고 자신을 드러내시기를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한 가지가 있다. 찬양인도자들은 자신이 예배인도자의 역할을 마치고 나면 주저하지 말고 무대 아래로 내려 와야 한다. 예배를 인도하는 순간 외에는 이들 역시 그저 평범한 한 사람의 하나님 자녀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목사님이건 기도순서를 맡은 장로님이건 자기 순서가 되었을 때에 강단 위로 올라가서 말씀을 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고 다시 내려오는 모습을 참 좋아한다. 우리의 예배는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고 죄 많고 부족한 상처받은 치유자(Wounded Healer), 아픔 많은 목자들일 뿐이지 않은가. 겸손하게 사역하자, 우리 죄인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