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1월


예배안에 나타나는 찬양의 모습에는 여러가지의 종류가 있다. 아직도 어떤 분들은 찬양을 단순하게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사실 찬양은 노래를 하는 것 이상의 표현이다. 예배라는 단어에는 사실 찬양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 예배라는 단어의 원어인 “프로스케네오”라는 단어는 “경배”와 “찬양”을 모두 다 포함하고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찬양할수 있는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방법을 살펴 보도록 하자.


많은 모습들이 특별히 시편에 많이 나왔있지만, 시편 149편에는 찬양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4가지 방법으로 나와 있다. 첫번 째는 ‘주님을 찬양하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단순하게 목소리로만 찬양하는 방법을 이야기 한다. 함성이나,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을 이야기 한다.우리가 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주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는 고백하는 것 이상을 이야기한다. 즉, 선포하고 외치는 것을 말하고 있다. ‘고백’이라는 것은 한 대상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선포’라는 것은 여러 대상에게 자기의 뜻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포’하는 것은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공중권세 잡은 자 위에 계신 분이 하나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선포 할 때는 절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날 수 있게 된다.


두번 째의 방법은 노래하며 찬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우리가 많이 아는 것처럼 현대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여지는 방법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아는 것이기에 굳이 이야기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아쉬운 부분은 노래로 찬양하는 것에 수반되어지는 것은 ‘새로운 노래’라는 사실이다. 새로운 노래에 대한 여러가지 견해가 있을수 있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노래’는 성도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노래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에베소서에는 ‘신령한 노래’라고 표현되어 있는 때로는 예언적인 의미를 포함하기도 한다.


세번 째는 춤추며 찬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빼앗긴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바로 지난 주에 이스라엘분으로 예수님을 믿는 한 목사님의 설교중에 말씀하신 부분이기도 하다. 춤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건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현대 교회에서는 춤이라는 것이 어느 사이에 불경건한 모습으로 인식되어 진 것이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부분들이 어쩌면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있어서 방해의 요소가 될지도 모른다. 한번은 내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 발레선교단이 방문한 적이 있었다. 사실 예배인도자인 나 역시 춤이라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좋은 선입관이 없었기에(내가 전에 만났던 춤을 추는 사람들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선교발레단의 몸으로 드리는 찬양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을 제한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만약에 춤을 통해서 여러분이 하나님과 가깝게 될 수 있다고 믿어지면 그렇게 행하라. 그것이 여러분의 믿음안에서 수반되어 진다면 하나님앞에 올바른 행위가 될것이다


네 번째는 소고와 수금으로 찬양하도록 되어 있다. 즉, 악기와 기구를 동원하여서 찬양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매우 성서적인 방법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격려가 되는 것이다. 사실상 성경안에서는 악시 사용에 대한 제한이 되어 있지 않다. 다만 악기를 사용할 때 우리가 어떠한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연주하는 가에 대해서 관심이 있다. 다윗이 악기를 연주할 때 악신이 떠났다고 말하는 구절배경에는 다윗이 공교하게 악기를 다루었다는 말이 숨어 있다. 연주를 시끄럽게 하면 사람들의 마음이 어려워질 수 있다. 오히려 연주를 준비된 마음으로 절제해서 연주한다면 악기 연주를 통해 예배를 드리기 어려운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앞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한다. 일전에 중, 고등부 아이들과 예배를 같이 드린 적이 있었다. 드럼치는 아이가 드럼을 치는데, 이것은 연주도 아니고 찬양을 드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가진 모든 스트레스를 드럼에 퍼붇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조용히 그 형제에게 볼륨을 줄이라고 말했지만, 듣지 않았기에 그 날 그 형제를 세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 형제가 어려움을 가졌겠지만, 예배안에서 악기 연주가 예배 전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악기를 사용하는 것은 참으로 예배에 되지만, 도움이 되지 않는 악기 연주는 하나님안에 있는 성도들을 시험거리로 만들 수 있다. 조용하게 치고 크게 치는 것은 차 후의 문제이다. 얼만큼 준비된 마음을 갖는냐 하는 것이다. 준비된 마음을 가진 사람은 마음의 준비뿐 아니라, 악기 연주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다.


이렇게 시편을 통해서 우리는 찬양의 방법을 알아보았다. 이제 마지막 한 가지가 남았는데, 그것은 바로 조화(Harmony)이다. 사실 우리의 찬양은 하나님께 향하는 하나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데, 때로 우리의 찬양은 연주자들이나 회중의 기호에 맞게 낮추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신령한 찬양은 결코 싫증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향해 더 가까이 갈수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 모든 방법들이 설령 옳다하더라도 때와 장소를 구별해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생각하면서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위해서 억지로 실행한다면 오히려 역 효과가 날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이 훌륭한 ‘예배인도자’ 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감옥에서 ‘설교’를 하지 않고 ‘찬양’을 했을 때 옥문이 열렸던 것은 찬양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가끔 젊은 예배인도자들의 불평소리를 듣는다. 성도들이 그들의 마음대로 따라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나의 가르침은 항상 동일하다. 모든 것을 할 수 있으되 다 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대상이 누군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의 개인예배를 회중 예배에서 착각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올바로 받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위의 모든 것들이 진리이지만 진리를 올바르게 진리되게 하는 것은 바로 우리들의 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