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스 성장의 주범?
모 신학교 교수가 한국교회 성장의 하향곡선의 원인을 열린예배로 단정하며 새로운 예배운동이 필요함을 역설한 글을 잡지에서 우연히 보았다. 눈이 의심스러웠다. 찬양운동이 시작된 이래 한국교회 안에서 열린예배를 제대로 드린 교회는 거의 없다. 아마도 열린예배라는 명칭을 그 본래 뜻인 구도자예배가 아닌 ‘문화적으로 전통예배에 비해 열린’의 의미로 사용했으리라 본다.

실재로 한국교회는 현대예배와 열린예배를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찬양운동 4반세기가 흐른 시점에 아직 용어조차 정의되지 않고 사용되는 우리의 현실이다. 열린예배는 시카고 인근에 있는 윌로우크릭교회의 구도자예배를 한국적으로 해석, 번역한 이름이다. 즉 비신자들을 초청하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의도된 예배형식의 집회이다. 이에 비해 성가대 대신 찬양팀이 인도하는 예배의 바른 명칭은 ‘현대예배’(contemporary worship)이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은 동시대적 예배라는 의미의 ‘현대적 예배’이지만 전통예배와 대비되는 명칭으로 ‘현대예배’가 더 일반화되어 있다.

여전히 남는 의문점은 이 글에서 주장한 교회성장 하향곡선의 주범이 ‘열린예배’라는 관점이다. 글쓴이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본의 아니게 ‘주범’의 범주에 연루된 대상은 찬양운동을 온 몸으로 주도해 온 386세대이다. 과연 그럴까? 80년대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찬양운동 열풍의 결과는 한국교회 마이너스 성장의 주범으로 씁쓸하게 그 막을 내려야 하는 것일까? 물론 찬양운동의 부작용도 없지 않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훨씬 크다. 무엇보다 이 운동을 통해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이 거룩한 예배의 열망을 회복했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으며, 그 가운데 적어도 수천, 수만 명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린 헌신의 열매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요즘 중고등부 사역이 얼마나 힘들어졌는가? 주일에 학생들이 교회보다 학원에서 산다. 대학가의 학생선교단체들마다 젊은이 전도가 예전 같지 않아 위기감이 돈다. 그러나 찬양운동이 한반도를 뒤덮을 당시 교회마다 젊은이들로 가득 찼다. CCM 찬양집회, 화요찬양, 목요찬양 같은 찬양모임마다 적게는 수백 명에서 많게는 수만 명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역사가 있었다.
이때 기름 부음 받은 젊은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작곡들이 한국교회 안에 흘러들어와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 은혜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 그 결과 새로운 문화, 새로운 직종, 새로운 산업, 새로운 예배, 새로운 찬양 등 한국교회와 기독교 산업 전반에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지난 10여 년간 교회, 미디어, 방송, 음반 산업, 선교지, 심지어는 소셜 네트웍(SNS) 온라인 현장에서도 당시 찬양을 통해 만난 하나님 때문의 자신의 삶과 목표가 바뀌고, 직업이 결정되고, 하나님께 헌신해온 수많은 청장년들을 만났다. 나이 40이 넘도록 거친 야전에서 예배회복과 부흥에 목숨 걸고 한반도, 동남아시아, 미국은 물론 북한, 중국, 실크로드를 가슴에 품고 뛰는 중견 찬양사역자, 예배인도자, 선교사들이 곳곳에 살아있다. 놀랍지 않은가? 한국교회는 이 부흥의 현장을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떠야 한다.
미국 60년대에 일어난 독특한 부흥운동이 있다. 히피문화에 젖어있던 젊은이들이 예수를 만난 뒤 자신에게 익숙한 록음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때 수많은 젊은이가 하나님께 돌아왔다. 미국교계는 이 젊은이 부흥운동을 ‘예수운동’(Jesus Movement)이라 명명했고, 미국 근대 기독교 부흥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자리매김했다.
한국교회 80년대에 일어난 이 독특한 부흥 현상도 단순한 찬양운동을 넘는 ‘젊은이 부흥운동’, 또는 ‘예배회복운동’으로 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지난 사반세기 넘도록 시도조차 하지 못한, 이 운동에 대한 교회사적, 예배학적 자리 매김을 하루 빨리 매듭지어야 한다. 그럴 때 음악 양식에 대한 진부한 논쟁에 마침표를 찍고 부흥을 향한 다음 단계로 달려갈 수 있을 것이다.
– 이유정 목사(한빛지구촌교회 예배목사, 좋은씨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