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거룩한 갈망을 잃었다. 김남준 목사가 말한 것처럼 예배에 참여하는 예배자들의 마음이 불붙는 진리의 선포를 상실한 강단과 공모하여 민방위 교육 같은 예배를 만들어 내고 있다.


예배가 살아 있다면 기독교 인구 천만의 한국사회가 이럴 수가 없다. 크리스천의 삶이 이렇게 무능력할 수가 없다. 물론 선교초기부터 지금까지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아왔다. 복음 전하는 삶은 원래 미움 받는 것이다.

예수는 신자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눅 21:17)이라 말씀하셨고, 바울은 더 나아가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1:8)고 도전했다. 그러나 최근의 양상은 그 도를 넘는다. 사회로부터 듣는 개독교 운운은 그 자정능력을 잃은 부패한 교회에 대한 일종의 경고장이다.
 
지금도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회중 예배의 거룩한 경외감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매주 몇 번씩 만나면서 어떻게 그분의 정신과 뜻을 사회에 실천하지 않을 수 있는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희생으로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주신 예수님을 매주 만나는데 어떻게 원수를 용서하지 못하는가?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셔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시고, 감화 감동하시는 성령 앞에 어떻게 순종하지 않고 내 기분, 내 감정, 내 욕심만 채우는 이기적인 존재로 살수 있단 말인가?

신앙의 진정한 힘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에서 출발한다. 오늘 교회가 이 예배의 능력을 상실했다. 예배에서 전능하신 하나님 한 번 만나면 해결될 것을 각종 훈련과 세미나, 교육과 학교에서 해결하려니 힘들고 피곤해지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평신도 한 사람에게 부과되는 봉사와 훈련의 짐이 너무 과하다. 
 
그 많은 예배 외에도 서너 가지는 기본인 봉사에 각종 위원회 회의, 행사 준비, 리더 훈련까지 받으니 매 주일마다 초죽음 아닌가? 그러니 막상 세상에 나가서 희생하고, 핍박을 견디고, 원수를 사랑하고, 사단과 싸워야 할 에너지는 바닥이다. 결국 세상을 변화시키기는커녕 세상과 동화되는 무능력한 신자로 전락하고 만다. 
왜 오늘 교회가 이처럼 바빠졌는가? 왜 교인들은 목사들이 바빠야 안심하는가? 예수님 시대에는 수천 명, 수만 명씩 모이는 컨퍼런스도 없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12명이면 충분했다. 문제는 균형이 무너졌다. 하나님과의 만남보다 인간의 소통에 무게중심이 옮겨졌다는 뜻이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물었다. “선생님, 율법 중에 어떤 계명이 가장 중요합니까?” 그때 예수께서 이렇게 답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셨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마 22:37~39, 표준새번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십자가에서 완성하셨다. 십자가에는 두 축이 있다. 수직축은 하나님과의 만남, 수평축은 신자, 비신자, 세상과의 소통을 상징한다. 이 두 축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복음 안에서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우선순위priority는 예수께서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 사랑’이다. 
 
이 우선순위에 예배의 본질이 있다. 이를 힘써 지켜야 한다. 이것이 무너질 때 다른 것도 다 무너진다. 하나님사랑 없이 이웃사랑도 없다. 하나님께 사랑의 힘을 공급 받지 않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위인은 없다. 예배가 죽었을 때 그 외의 봉사와 교육, 훈련과 교제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지엽적인 문제 몇 가지 해결하기 위해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본질과 핵심에 주력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나고 삶이 변화되는 예배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바쁜 것, 비본질적인 것, 지엽적인 것을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덜 중요한 것을 잠시 미루자. 
 
“빨리 빨리”를 추구하는 한국병을 거절하고 여백의 미에서 흘러나오는 창조적 감수성을 살리자. 속도보다 방향에 목숨 걸자. 교회의 체질을 이벤트, 일 중심에서 예배 중심으로 바꾸자. 예배가 살아나면 모든 것이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