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5년 8월


오늘 날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단에게 빼앗긴 것 중에 한 가지가 묵상하는 것이다. 묵상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되새기면서 그 뜻을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 묵상의 원어인 ‘메디칼루스’는 약이란 단어의 원어이기도 하다. 우리가 약을 먹으면 몸 안에 약이 들어와 온 몸에 퍼져가는 것처럼 우리의 생활 가운데 생각하는 것이나 사실이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쁨이 되고 우리가 많이 읽는 시편에는 묵상하는 사람의 형통함에 대해서 나와 있다. 사실 시편이란 찬양과 관계가 많을텐데 굳이 시편 기자가 묵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찬양과 묵상에는 깊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언급한 것처럼 현대 예배의 특징은 음악이 많은 경우에 예배에 영향력을 주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보면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가 세상의 음악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는지에 대해서 혼동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이것을 구별하는 방법 두 가지는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그 가사가 누구에게 집중이 되어 있는가이다.


일전에 캘리포니아의 갈보리채플의 예배 모임에 참석했을 때, 나이가 중년이 넘은 예배인도자 한 분이 우리가 많이 부르는 ‘빛되신 주(Here I am to worship)이란 곡을 하면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분이 찬양을 대할 때 사랑스런(Lovely)같은 단어들은 연인들에게나 하는데 이제는 이런 단어들을 하나님께 부르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부담없이 쉽게 하나님을 대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경외감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아쉬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예배 중에 부르는 찬양에 쓰이는 단어의 변화는 이 세대의 워십에 커다란 영향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최근의 찬양의 단어들은 묵상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보다는 음악적 색깔이나, 좀 더 사람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단어들을 택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물론 글을 쓰는 내가 점점 더 나이가 먹어간다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이전에 많은 선배들이 로마서 16장 19절을 부르면서 외치던 나에게 경고해 주었던 이야기를 내가 반복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사실 우리가 어떠한 곡을 부르면서 예배에 몰입할 수 있고 때로는 그 곡과 전혀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을 수가 있다. 나는 한 번도 로마서 16장 19절을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이 모인 실버대학에서 주제곡으로 선택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내가 부르면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이 곡들을 통해 이 세대가 가지는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하나님께서 찬양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외로 우리는 예배 중에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우리가 부르는 찬양의 가사보다는 다른 것들에 신경을 많이 쓰곤 한다. 이 새로운 곡을 사람들에게 어떻게 효과적으로 가르칠 것인가, 아니면 이 빠른 곡을 과연 회중들이 소화할 수 있을까하는 문제로 인해 자기 자신도 의심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는 경우가 많다. 찬양의 문을 지나 주님이 계신 지성소로 들어가는데 제일 필요한 것은 주님을 묵상하는 것이다. 주님을 묵상하도록 해야 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음악적인 뛰어난 곡을 하는 예배인도자들을 종종 보곤 한다. 뛰어난 음악과 그리고 그들이 가진 너무나 아까운 은사들, 그리고 새로운 곡을 열망하는 회중들의 간절함, 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가 중심인가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음악적인 부분을 소홀히 한다는 것이 탁월성을 가지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인도자로서 내가 가지고 있는 음악을 고수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음악을 전하는 음악전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전하는 예배중보자가 되기 원하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새로 쏟아져 나오는 신곡들을 들으면서 묵상하면 묵상이 잘 되지 않는다. 너무나도 풀어헤쳐진 단어들 속에서 무엇을 건져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심오한 진리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배해, 찬양해, 노래해 같은 가사들은 많은데, 뭘 경배하고 찬양하고 노래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깊은 묵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 단순한 진리들을 나열해 놓은 것 같은 노래들, 그러다 보니 원래 약이 효력이 있기 위해서는 온 몸에 퍼져야 하는데 퍼지지를 않기 때문인지 요즘 예배 안에 불리는 곡들은 많지만 의외로 예배가운데 하나님을 경험하고 만날 수 있는 곡들이 줄어들고 있다.


기도하기는 앞으로 많은 곡들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리로 예배가운데 인도할 수 있는 깊은 묵상 가운데 나올 수 있기를 소원한다. 인도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에 참석하는 회중역시 시편 114편의 말씀을 기억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예배 가운데 흘러넘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