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1 지난 달 (2006년 12월)에는 5권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모두가 조금은 오래된 책들을 읽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늘 이렇게 고전만을 선호한다고 생각지는 마라. 적어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인터넷 서점의 신간 코너를 찾으며 사니까.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 스탠리 하우어워스, 복있는사람 스 탠리 하우어워스 (Stanley Hauerwas) – 이 책의 뒷면에는 그를 ‘<타임>이 선정한 미국 최고의 신학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나는 그를 존 하워드 요더 (John H. Yoder)의 정신을 가장 잘 계승한 신학자로 알고 있었다. 인터넷 서점에서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을 아무리 검색해도 한 권도 찾을 수 없어 늘 아쉽던 차에,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소서’라는 책 제목을 발견하고는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더구나 추천인이 김회권 목사, 김기현 목사, 신원하 교수였으니, 책을 구입하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 책의 마지막에, 부산 수영로 교회 김기현 목사의 간결한 서평이 실려져 있다. 김기현 목사는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책이 한국에 거의 소개가 되지 않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던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스 탠리 하우어워스는 우리가 늘상 쉽게만 해 오던 주기도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심도있게 다루면서, 주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고 기도한다면, ‘기도함으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편입되고, 이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이 되어 간다’고 한다.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가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또 그 기도를 살아낸다면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를 도전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 자체가 상당한 도전이었슴에도 불구하고,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이름에 대한 기대를 고려할 때, 찐한 아쉬움이 남는 것 왜일까. 그의 교회관이나 윤리관이 명확히 드러났다고 하기 어려울 뿐더러, 그의 색깔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책이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첫 번째 번역판으로 우리에게 소개되었는지를 설명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좋았지만, 그만큼 아쉬움이 더했던 책. 이제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다른 책들을 기대해 본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Howard Snyder, 생명의 말씀사 참 된 복음은 어떤 경우에도 식상한 것이 될 수 없다. 복음 그 자체로 늘 새 포도주이고, 우리는 그 새 포도주를 담을 새 부대를 준비해야 한다. 1981년에 초판이 나온 책이니까, 벌써 25년이 훌쩍 지나버렸다. (책을 구입한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25주년을 기념해서 개정판이 나왔다. 내가 구입한 것은 정말 예스러운 필체와 대단히 어색하게 번역된 사람 이름이 눈에 많이 거슬리는 책이었다.) 하워드 스나이더 – 최근 나의 관심을 온통 빼앗아 가 버린 메노나이트 계열의 신학자 존 하워드 요더의 제자라고 알려져 있고, 이미 ‘참으로 해방된 교회’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꽤나 친숙한 저자이다. 더구나 최근 신간 목록에는 IVP에서 나온 ‘교회 DNA’라는 책으로 계속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전혀 낯설지 않은 저자이다. 하 워드 스나이더는, 책에서 현대 교회가 담을 새로운 부대로 소그룹을 제안한다. 이미 소그룹에 대한 논의가 지나칠 정도로 활발하게 진행된 지금에 이 책을 볼 때, 그 제안에 대한 감동이 조금 덜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인간의 원초적인 종교성 세가지, 다시 말해, 무언가 거룩한 성전을 세우려고 하고, 신에게 제물을 드리려고 하며, 또 신 앞에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인간이기에 중간에 매개인을 세우려하는 단점을 잘 지적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성전되셨고, 스스로 제물되셨으며, 또 스스로 제사장 되심으로 이 세가지를 모두 만족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성이 자꾸만 이런 종교적 성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런 문제의 해결책으로, 소그룹을 통해 구성원의 은사를 잘 활용할 수 있게 하여 진정한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다. 또한 진정한 하나님의 아이디어는 성전이 아닌 성막으로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으므로, 기존의 건물을 능가하는 유연한 공동체를 만들라고 한다. 모두 14개의 장을 통해 이야기하는 저자의 교회에 대한 주장은 현대 교회가 여전히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귀한 이야기들이다.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 루이스 마르코스, 복있는사람 이 책을 구입한 것은 2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C.S. 루이스의 책들을 읽으면서 동시에, C.S. 루이스에 관한 책들 또한 재밌게 읽고 있었으니까. 예를 들면 ‘루이스 vs 프로이트’나 ‘반항적인 회심자 C.S. 루이스’같은 책들을 통해, 제 삼자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루이스를 만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던 시점에서 ‘C. 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출판된 것을 보고 바로 구입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왜 읽지 않았을까. 그냥 그렇게 상당기간을 서재에 꽂혀있었다. 내 가 섬기는 두개의 성경공부 모임 중, 토요일 오전에 모이는 모임에는 유난히도 무신론자가 많이 있다. 그 중 한 형제의 경우는 모태신앙으로 평생을 교회를 다니다가 갑잡스레 회의가 들어,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지낸 지 어언 몇 년이 흘러 버렸다. 무신론자로 돌아선 이유야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 한가지가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이시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데도 만날 수 없었던 하나님이라면, 다른 사람이 만난 하나님도 모두 착각일 가능성이 높을테니까. 그렇게, 그 형제가 우리 모임에 참석한지 8개월정도 지났다. 그리고, 몇 주 전의 일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던 그 형제가 신의 존재를 고백하게 되었다. 짧은 휴가 기간 동안 C.S. Lewis의 ‘순전한 기독교’를 읽으면서,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얼마나 놀랐는지……. 때마침, 오랫동안 공부하던 창세기를 마치게 되었고, 다음에 공부하기로 한 히브리서를 시작하기 전에 얼마간의 시간을 그 형제가 깨닫고 경험한 C.S. Lewis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의견이 모아졌다. 그 공부를 준비하는 가운데, 전에 읽지 않았던 ‘C.S. 루이스가 일생을 통해 씨름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고, 다음 모임을 기대하며 읽어 내려갔다. 저 자가 서문에서 언급하듯이, 이 책은 C.S. 루이스에 관한 책이긴 하지만, 루이스의 삶과 정신 그 자체를 다루었다기 보다는, 루이스의 사상을 기초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C.S. 루이스의 생각들을 일반화 시키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기의 특징과 그의 삶을 짧게 돌이켜 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근대주의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다윈, 프로이트, 니체, 마르크스 등의 영향으로, 물질적인 것으로써 영적인 것을 설명하려는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전제하고 이야기를 전개한다. 모더니즘의 도전을 극복해 가기 위해 루이스는 어떻게 투쟁했고, 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들이 묻어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뜨끔했던 부분이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다소 딱딱한 필체의 글들을 선호한다. 시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점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근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우리들은 언어를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 정도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 언어가 지닌 형이상학적인 위상에 대해 비 우호적이기 쉬워지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계몽주의의 견해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다고 한다. – 그럼 내가 지닌 지금의 글읽기 성향이 계몽주의의 영향 때문은 아닐지… 최근에는 계속 이런 도전을 주는 글들을 접하게 되니, 더 부담이 된다.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인가”, James Sire, 이레서원 ‘How to read slowly?’ – 몇 년 전 기독교 세계관 책을 소개하는 코너에서 이 책의 제목을 보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던 기억이 있다. 더구나 개혁주의 세계관을 대표하는 James Sire의 책인지라,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꼭 봐야지’하고 꽤 긴 시간이 흐른 것 같다. 얼마 전, 내가 사는 지역에 폭풍이 불어 몇일 동안 도시의 대부분이 정전이 된 적이 있었다. 이틀을 전기 없는 집에서 보내고는, 결국 삼일째는 친한 선배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 때, 그 집의 책꽂이에 있는 이 책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어떻게 천천히 읽을 것이가’를 참으로 빨리도 읽어 버렸다. 이 책이 왜 ‘세계관’ 분야에서 추천되는지는 명확하다. 어떤 책을 읽던 간에 그 책의 문자적 정보만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읽어가면서 저자가 어떤 세계관을 가졌는지를 발견해 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을 믿는지??? 이런 세계관 탐색적 독서가 논픽션 뿐 아니라, 시나 단편/장편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가능한지를 설명한다. 그리고는 작품에 삽입되고 영향을 미치는 전기적, 문학적, 역사적, 지식적인 문맥의 타당성을 설명하고, 마지막 부분에서 책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도 간략히 설명한다. 책 을 많이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식상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논픽션만을 선호하는 나와 같은 경우는, 시와 소설을 통해 세계관을 탐색한다는 사실이 좀 부럽기도 하고 생소하기도 했다. 이제 소설도 좀 읽어야 할텐데… James Sire가 이 책에서 권하는 ‘세계관 탐색적 독서법’을 들어보자.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다”, Ronald Sider, IVP ‘그 리스도인의 양심선언’과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요한 그리스도인’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로날드 사이더의 1996년도 책이다. 이 책은 로날드 사이더의 색깔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생활을 통해 그리스도의 통치하심이 드러나게 마련이며, 사회 참여에 무관심할 수 없다는 것이 그 핵심이 아닐까 싶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1장 이었다. 현대 기독교의 문제는, 하나님의 사랑만 강조할 뿐,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고, 우리를 귀히 여기셨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상태가 오죽했으면 제 2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어야만 했는가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그것은 반쪽만의 기독교일 뿐 복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본문 74-79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