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칼 The Myth of A Christian Nation> by Gregory A. Boyd 


<십자가와 칼>이라는 제목은, ‘칼의 힘’ 즉 ‘위에 서는 힘’ ‘세상 나라’와 ‘십자가’ ‘아래에서 섬기는 힘’간의 contrast를 강조해준다. 통상, 이 두 가지 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양자택일이라기 보다는 어떻게 잘 융합해서 균형있게 사용할까인 것 같다. ‘칼’의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칼’을 허락하시고 ‘십자가’를 위해서 사용하시는가의 원리를 찾아서, 세상 권세에 빼았겼던 ‘칼’을 ‘십자가’로 되찾아 오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합리적인(?) 접근을 철저히 비판한다. 저자의 세계관에서, ‘칼’과 ‘십자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칼’은 ‘십자가’를 위한 도구일 수 없고, 도구여서도 안 된다. ‘칼’은 이 세상과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을 상징하는데, 이 세상의 권한은 현재 일시적으로 사탄에게 부여되었다. 물론, 하나님께서 국가와 정부에게 권위를 주어서 – 악한 왕과 나라를 통해서도 – 선한 가치들을 이 땅에 구현하는데 이용하신다는 것, 세상 국가나 정부의 선기능을 성경이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에, 어떻게 왜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일하시는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판단하기에 상대적으로) 선하고 의로운 한 나라와 정부와 통치자라 하더라도 사탄의 강력한 권세와 근원적인 죄의 문제아래 있기 때문에 세상 나라는 이 세상의 희망이 될 수 없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첩경이 될 수 없다. 악한 나라와 사람들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지 않고, 자신의 나라(좀 더 선한 나라)를 ‘하나님의 군사’로 삼으셔서 ‘칼’의 힘을 쥐어주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 악한 나라를 심판하게 하신다, 이것이 좀 더 선한 나라, 혹은 교회, 혹은 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나라의 힘을 맡기신 이유이다라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이든 조직적이든) 이 세상 나라의 힘과 권력, 세상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와 뜻을 이 땅에 이루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파하며, 그리고 세상 나라의 도덕적 수호자를 자처하는 것에 대하여, 저자는 단호하게 “NO”라고 외친다.  
이 “NO”의 근거는, 첫번째, 역사에서 발견된다. 기독교가 국가종교화되어서 국가 권력과 군사력, 정치력, 경제력과 손잡을 때 나타났던 폭력과 억압,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국가및 종교 이기주의, 그로 인해 하나님 나라와 복음이 얼마나 심각하게 훼손되고 방해를 받았는지의 사례는 4세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서 시작해서 2005년의 미국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래서, 저자는 ‘십자가를 앞세운(혹은 그에 기초를 둔) 기독교 국가’라는 개념을 myth라고 부른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시점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발 성전Holy War이 이슬람발 성전과 한판 승부를 벌이던 2004년 무렵이다. 무슬림 테러리스트를 소탕하기 위한 전쟁은, ‘미국을 하나님께 되돌려 바친다’라는 기독교적 슬로건 아래 보수적인 기독교 그룹으로부터 윤리적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기독교 국가로서의 미국,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이렇게 미국 vs미국에 대적하는 세력을 하나님 vs 사탄, 빛 vs 어둠, 선 vs 악으로 양분하면서 미국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군사력과 힘’으로 이 적대세력을 심판하는 일이 정당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이라고까지 여기게 된 것이다. 그 결과, 미국과의 전쟁에서 피해자가 된 국가와 사람들은 미국을 적으로 여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미국의 종교와 미국을 수호하는 신, 곧 기독교와 기독교의 하나님을 자신들의 적으로 여기게 됨으로 세계 선교에 회복불가능한 해를 입혔다고 저자는 진단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교도들을 심판하고 개종시키는 것이 성스러운 소명이기에, 폭력도 마다하지 않은 Christian Nation의 역사를 저자는 아래와 같이 평가한다:
“그리스도에게 세상을 바치겠다는 명목 아래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되었다” (116p)

이 “NO”의 또 다른 더 핵심적인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사역하신 시간적 공간적 배경은, 인간 세상의 문제가 더이상 복잡하고 혼란스러울 수 없을 정도로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사안들이 얽혀있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문제들의 옳은 답이 무엇인지, pragmatic solution을 주시는데 관심이 없으셨고, 더우기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취하실 수있는 정치적 군사적 힘과 세상에서의 그 분의 왕국을 세움으로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시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하셨다. 분명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방식은, 세상이 생각할 수있는 여러가지 해법중 하나가 아니라, 완전히 새롭고 철저하게 세상의 방식과 차원이 다른 궁극적인 어떤 것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정치적 독립과 민주화를 이루는 방법(eg. 돌이냐 기도냐), 보편적 복지와 선택적 복지중 무엇이 맞는지에 대한 속시원한 답, 이혼과 낙태, 동성애를 어떻게 법적으로 사회문화적으로 다루어야 할지에 대해서 답을 주시지 않았다(그랬다면 오늘날 교회와 신학자들의 고민을 많이 덜었을텐데 말이다). 대신, 그 분은 곧 배신할 자의 발을 씻기시고, 세상 나라에서 소외된 그리고 세상 나라가 보살필 생각도 준비도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과 함께 계셨고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계명 하나만을 남기셨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엄청난 댓가를 기꺼이 지불하는 무조건적 사랑을 하라는 계명.

빠른 해법의 유혹
세상 나라의 방식, ‘위에 서는 힘’이 불완전함, 그 부정적 파급력을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이 방식에 매료되고 어떻게든 이 방식으로 무언가 해보려는 생각을 쉽사리 포기하지 못한다. 어쨋든 ‘위에 서는 힘’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이룰 수있는 선이 상당하지 않는가라며 –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랴라는 속담이 설득력을 갖게 되는 순간이다. 그렇다면, What did Jesus do?

공생애 시작전 광야에서 예수님께 나타난 사탄은 천하 만국과 모든 영광을 주겠다며, 자신에게 엎드려 경배하라는 조건을 제시했다. 사탄은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쥐고 있는 자이고 예수님은 천하 만국과 영광을 하나님께 되돌려 놓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으므로, 예수님께서 소기의 (선한) 목적을 달성하는 쉽고 빠른 (= 효율적, 효과적, 합리적) 방법은 사탄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즉, 고난과 죽음 없이도 예수님은 손쉽게 온 세상 나라를 취하실 수 있었다. 

저자는 사탄의 제안이 선한 것을 담고 있지 않았다면 예수님께 유혹이나 시험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는 쉽고 빠른 해법의 유혹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유혹을 뿌리치신 예수님께서 대안으로 선택하신 방식은, 느리고 무기력하며 매우 ineffective해보이고 그래서 이 방식으로 어떤 변화를 꾀한다는 것이 우스꽝스럽게 느껴지는, 그러면서도 엄청난 희생이 따르는 방식, 자신의 힘과 권력의 포기(하나님의 아들로서)하고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본으로 행하셨고 우리에게 ‘따르라’고 명령하시는 이 사랑의 방식은, 세상 나라의 ‘위에 서는 힘’과 정면대조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방식, 하나님 나라 백성의 존재적 특성이며, 하나님 나라가 부흥하고 완성되는, 궁극적인 승리로 반드시 귀결될 방식, ‘아래에서 섬기는 힘’이다.  

Following Christ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imitate하는 사람들이다. 그럼 예수 그리스도의 무엇을 모방해야 할까? ‘아래에서 섬기는 힘’ 즉 세상을 위해서 희생적인 사랑의 삶을 살되, 그것이 윤리적 행동강령 준수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되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명료해서 헛갈릴 수가 없고, 적어도 4권(복음서)의 메뉴얼마저 제공된 이 부르심앞에서, 우리는 왜 여전히 세상의 방식을 기웃거리게 되는 것일까? 

첫째, 우리가 여전히 세상의 방식과 세상 나라의 힘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봉할 힘은 국가종교로서의 기독교나, 기독교 국가로서의 통치 권력이 아니라 기도이다. 기도는 우리가 가장 먼저 할 수있는 세상에 대한 희생적인 섬김의 행위다(167p). 국가의 운명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기도를 했느냐 안 했는냐에 달려있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이 골방에 들어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이랴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168p).”라는 주장에 우리는 얼마나 동의하는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현재화’하는데 ‘아래에서 섬기는 힘’ ‘무조건적인 희생적인 사랑’ 그리고 ‘기도’를 사용하자는 생각이 너무 순진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세상 나라의 힘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어 가는지를 보면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 그 힘을 기독교가 취해서 이 세상을 ‘맞는’ 방향으로 변화시켜 가자라고 열정을 불태울 수도 있다. 

법과 제도로 권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옳고 그른지를 명문화하고 상벌을 규정해 두는 것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래서 한 국가(보통 내가 속한 나라다)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가치에 다른 나라보다 더 가깝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내가 ‘하나님 나라에 덜 가깝다’고 판단하는 다른 나라들에게 ‘위에 서는 힘’을 행사할 권리는 없다. 이 힘을 행사하는 과정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상관없는 혹은 반하는 어떤 국가적인 이익을 획득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선한 나라에게 주시는 축복’이라고 정당화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방법을 우리는 괜찮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은 한 국가뿐아니라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다.     

세상 나라의 힘을 업은 기독교가 그 힘으로 복음을 강요하고 도덕을 수호하고자 할 때, 정작 하는 일은 ‘예수님의 이름으로’으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바리새인들이 자신의 종교적 권리를 위해서 죄인들과 싸웠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리를 버리고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세상을 정복한다’는 논리는, 세상의 방식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는 아주 합리적이고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고, 믿음이 없이는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다. 

둘째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 궁극적인 해답이며 반드시 승리할 것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선을 효과적이고 효율적이고 신속하게 이루려는 동기는 이기적인 속성을 갖는다. 선한 목적의 성취와 그로 인한 혜택의 가운데 자신이 서 있고 싶은 욕구(기여를 하든, 혜택을 받든, 혹은 역사적 증인이 되든)가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시대에 예수님의 죽음은 가장 초라하고 치욕적인 것이었지만, 그 죽음으로 인해 그 이후의 세계와 시대는 영원히 달라졌다. 예수님은 이것을 바라보셨고 그래서 빠른 해법의 유혹과 자신이 발휘할 수있는 힘을 포기하고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과 그 분의 약속을 신뢰하셨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신 것을 바라보지 못하는 한, 우리는 빠른 해법에 매달릴 수 밖게 없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완성하실 것에 대한 영원의 관점과 믿음을 가질 때에만 우리는 조급함없이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음에 흔들리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신 희생의 길을 갈 수있다. 

세째로는, 세상 나라와 권력자들에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의 일부를 떠넘김으로써 자신이 치러야 할 희생을 경감시키는 편의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물질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에 관심을 기울이셨고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해야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께서 하신 방식으로 소외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다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필요할 것이고, 지금의 우리의 생활방식은 완전히 바뀌어야 할 것이다. 만약 정부가 저소득 가정의 문제를 해결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먼저 행동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저자는 묻고 또 묻는다. 

우리가 기독교를 국가에 접붙이는데 집착하는 것은, 그것이 편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섬겨야 할 사람들의 ‘물질적 요구’에 대한 책임을 국가에 넘겨버리면,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의 ‘영적 요구’만 걱정하면 되기 때문에. 정부가 사람들을 돌보고 정의로운 사회를 운영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일은 분명 선하지만, 세상의 희망이 정부에 있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어떤 선하고 합리적인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가까워보이는 나라와 정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따라야 할 ‘사랑’의 대안이 될 수는 없다. 

결언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나라의 권세를 가진 위치로 부르심을 받았을 수도 있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부합하게 행동하고 또 자신의 권세아래 있는 영역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담아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최선은, 자신의 삶과 존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이뤄가는 희생적인 사랑의 의무를 대체하거나, 감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사랑의 명령에 예외가 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도 없다. 그가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말이다. ‘사랑’의 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다양성과, 힘과 권위의 차등성에 구애받지 않는 근본적인 삶의 방식이다.    

저자는, 제한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세상 나라의 선택사항을 받아들여 투쟁을 일삼기 보다는 ‘상자 밖에서’ 생각하는 지구상 유일한 집단이 되어야 한다고 도전한다.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 하지 않을 다음의 질문을 항상 기억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우리는 종종 물리적으로 강해지고 커지고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모습이 우리가 믿는 것과 하는 일의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의 신적 증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의 resources가 집중되고 축적되는 기독교의 모습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한다. 개인과 교회의 이런 모습은 사실상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정반대의 것이어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이 가짜라고 생각하던지 예수 그리스도가 가짜, 심지어 둘 다 가짜라고 생각하게 된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개인과 교회로부터 resources가 무조건적으로 한계없이 대량 방출될 때이다(그래서 본인들은 죽을 정도로). 그래서 ‘도대체 이 사람들이 왜 우리를 위해서 이런 일을 하는 거지?’라는 의구심을 들게 할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나라를 본다. 누군가가 우리의 이런 비세상적인 모습을 비난하고 이를 갈며 죽이려고 달려들면, 우리는 목숨을 내주면 된다. 나의 죽음을 비웃고 기뻐하던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그들은 우리가 행했던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는 방식이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며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구원’의 길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지녀야 할 태도는 ‘위에 서는 힘’을 신봉하여 승리하느니 순진한 갈보리 언덕의 방식을 따라 패배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적용할 수있는 무엇이 아니라 믿음이다”(265p) 
이렇게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이미 당면한 현재 안에서 보여”주어야 한다(98p).

이 책의 context는 미국이지만,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만큼이나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문제들을 떠안고 가는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넘치고 있는 것인지, 문제의 본질과 근원적인 해답에 대한 고민에 clue가 되어준다. 책장을 덮을 때에, 모든 생각과 글이 다 사라지고 질문 하나만이 떠올라 맴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지금, 바로 여기서!”. 무척 긴 리스트가 될 것같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