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신원하 교수 – 심화 세미나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1. 신원하 교수님, 안녕하세요, 미주 코스타에 다시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시는 분들을 위해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저는 어린시절 거의 늘 할머니의 기도소리를 새벽마다 들으며 자랐습니다. 남들보다 신앙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셈이지요. 이런 영향 때문인지 어릴 때부터 목사가 되고 싶었고 결국 신학교를 갔습니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박사학위를 받게 되었고 이후 줄곧 신학교로 부름을 받아 지금까지 16년 동안 기독교 윤리학과 관련과목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7-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으로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 등에 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이 분야에 나름대로 글도 써 왔고 비중있게 가르쳐 오고 있습니다. 코스타 초청을 받고 이번에 참석하게 되어 기쁘고, 기대가 큽니다. 

2. 이번 세미나 강의의 주제가 ‘샬롬의 방해물: 죽음에 이르는 일곱가지 죄악 (Vandalism of Shalom: The Seven Deadly Sins)’입니다. 일곱가지 대죄는 복음주의권에서는 좀 생경한 개념인 것같습니다.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일곱가지 죽음에 이르는 죄의 목록-교만(pride), 시기(envy), 분노(anger), 나태(sloth), 탐욕(avarice), 식탐(gluttony), 정욕(lust)-은 4세기 말 사막 수도사들로부터 중세 교회를 거쳐 주로 로마 카톨릭 교회를 통해 전해 내려온 목록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기 위해 끊어버려야 할 큰 악으로 규정한 죄들의 목록이지요. ‘오직 성경’의 구호를 내세운 개신교회는 이것들의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대죄론을 소홀하게 여겨 왔습니다. 그런데 20세기 후반 이후 개신교회들이 부쩍 이 주제에 관심을 고조해 오고 있습니다. 복음주의권의 목사들의 강단에도 환영 받는 설교주제가 되었습니다. 이 주제는 싸우고 버려야 할 죄의 목록이지만 다르게 말하면 갖추고 입어야 할 덕(virtue)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환언하면 이번 강의의 주제는 기독교인이 갖춰야 할 덕, 성품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제까지 덜 강조되고 경시되어온 측면이 많은 이유가 기독교인의 성화보다 일차적인 구원에 지나친 관심을 가진데 있지 않을까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요. 이신칭의를 강조한 개신교회가 덕(virtue)사상을 강조하면서 믿음보다 행위 그리고 성품을 중시하는 이 교리를 그다지 강조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 교회의 핵심교리라는 것에 대한 반감도 또한 작용했으리라 생각합니다.  


4. 한편, 어떻게 은혜를 강조하는 관점과 기독교인의 덕을 강조하는 관점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조화될 수 있을까요?

사실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기독교 윤리는 직설법과 명령법의 역동적인 관계입니다. 그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값없이 구원받았다는 직설법 때문에 그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 즉 그 명령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이 성경적 프레임이 분명해진다면 덕을 갖추는 삶은 은혜를 강조하는 것과 결코 모순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지요. 오히려 은혜로 죄에서 자유로워진 사람들은 자원하여 덕스러운 삶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시 119:32). 

5. 한국이나 미국이나 기독교인들이 신앙과 삶의 불일치, 신앙과 사회적 책임의 불일치로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인 것같 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에 관련하고 계신데요, 한국기독교 공동체가 사회적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 어떤 점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기윤실의 접근보다 좀더 급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한국 기독교인의 신행불일치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닙니다. 일찍이 한미준(한국기독교회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의 통계 분석보고서에 따르면 한국교인의 윤리의식과 불신자의 그것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믿는 사람이 너무 다른 것이 문제가 아니라 너무 같은 것이 문제인 것이지요. 일반 사람들은 신자들에게 자기들과는 다른 뭔가 고상한 삶을 바랐지만, 지금은 아예 기대도 하지 않는 상태인듯합니다. 천주교회는 국민으로부터 점점 신뢰를 받고 교인도 늘어가는데 개신 교회는 그와 정 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교회가 신뢰를 얻으려면 교회다운 모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권력, 돈, 성공에의 욕망이 교회의 짠 맛을 잃게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 힘없음, 약함은 교회가 추구하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신약 초대교회의 예수 운동, 제자운동은 철저히 십자가, 낮아짐, 힘없음을 추구한 운동이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예수를 머리로 따르고 ‘지적인 제자훈련’ 만 위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때입니다. 현재의 모습에서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한 사회적 역할은 기대하기 힘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윤실도 어쩌면 느리게 가는 길인 것이지는 모르지만 다시 교회의 본질회복 운동, 신뢰회복 운동, 정직 운동 등에 다시금 강조를 해 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볼 때 이것이 다소 개인적 미시적 접근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것이 급진적(Radical)인 방법일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문제에 대해 여전히 관심을 갖고 여론을 만들어가고 윤리 운동을 전개하는 것도 계속해 가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6. ‘전쟁과 정치’를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신앙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집단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있습니다. 신학자로서 이런 모습에 대해서 어떤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시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복음주의 교회의 대표적 지성이며 양심이라 할 수 있는 이만열 교수는 현재 한국 복음주의 기독교는 정교분리 모습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정교 일치 때문에 비난을 받고 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지난 참여정권 때 복음주의 대형교회 목사들이 부쩍 시청 광장과 장충체육관 등지에서 십자가와 성조기를 펄럭이며 정부를 규탄하는 집회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리고 현 정권에 들어와서는 정반대로 친정부적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전 군사 독재정권 시절에 너무나 조용했고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 데모하는 대학생들을 말리곤 했습니다. 어떤 신학적 근거로 시민 광장에 나와서 교회가 교회이름을 걸고 소리를 발하는 입장으로 전환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특정 정권을 편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과 설명이 없는 것이지요. 이런 신학적 성찰 없는 정치적 행동에 많은 의식 있는 목사들과 학자들은 불편해 하고 있습니다. 이면에서 복음주의 교회의 신학자들과 40-50대의 중견 목사님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지요. 한국교회개혁연대와 같은 의식 있는 목사님들의 활동들이 좋은 대안적 모델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7.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고민하고 기독교 세계관에 대해서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개인적인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될까요.

사람들은 자기가 자라온 지역, 문화, 환경의 틀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경상도 남자가 서울여자를 만나 깊이 사귀다 보면 한번 자신을 돌아보게 되기 마련입니다. 서울여자에게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을 살피고 진단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연애의 성공여부를 떠나서 타자의 관점에서 자기를 보게 되면 그만큼 유익이 크지요. 교과서만 줄줄 외우고 문제집만 푸는 공부만 하다가, 대학에 들어간 뒤 시대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치며 그것들을 다룬 뛰어난 소설/또는 사회과학 서적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벅찬 희열, 기억하시는 지요? 마치 눈이 열리는 듯하고, 새로운 의식의 세계가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지요.  이때까지 여러분들이 익숙해져 있는 현실, 가치의 세계, 그리고 추구하는 목표가 진정 가치 있고, 젊음을 바칠만하고, 그리고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인지, 여러분은 알 수 없습니다. 그것과 다른 가치, 세계 그리고 그것의 빛을 통해 비춰볼 때 비로소 그것들을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쟁이를 핍박하는 일에 열심이었던 철저한 유대주의자 사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난 뒤 그의 삶과 삶의 방향이 완전히 뒤집혀져 예수를 증거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이제 기독교 신앙, 가치, 세계관에 자신을 열고 한번 활짝 자신을 노출해 보기를 권합니다. 이번 코스타 모임에 친구의 권유로 왔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왔든지 이번에 기독교 복음의 세계에 한번 흠뻑 자신을 적셔보는 그런 구도자가 되어 보시기를 진정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