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2000년 KOSTA/USA 김경수 목사의 세미나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강의는 ‘복음주의’, ‘학생운동’, ‘한국사회’라는 무거운 주제를 복음주의라는 연결고리 가운데 다루고자 한다.


대학의 위기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에서 ‘한 사회가 건강한가는 “학교”, “교회”, “법원”을 보면 알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의 한국을 돌아보면, 이 세가지 모두 좋지 않은 상황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의 대학의 상황은 더욱 문제가 있는데, 그 예로 서울대의 위상이 이웃 나라인 일본이나 중국의 대학들과 비교해서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국의 대학의 현 상황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3가지를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싶다.


-   대학생 스스로의 정체성 인식의 변화이다: 과거에 대학생들은 적으나마 스스로 엘리트라는 의식이 있었으나, 최근의 대학생들은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 이유에는 교육부에서 평생교육이라는 기치 하에 대학교육을 보편화 시키고자 했던 정책이 있었다고 하겠다.
-   대학 문화의 변화이다.: 예전에는 이념이 대학 문화의 중심에 있었다면, 현재 대학은 스스로 상업화하고 있고, 경쟁 중심의 문화로 변화하였다.
-   이단 단체와 민족 종교의 침투이다: 과거 대학 신입생들 중에서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만일 종교를 가진다면 어떤 종교를 가지기를 원하는가?’는 설문 조사를 하면, 기독교와 천주교가 다수를 이루었었다. 하지만 최근의 조사를 보면 민족종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증대했슴을 알 수 있고, 더욱이 대학 내 기독교는 이단들에 의해 시달리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이런 세가지가 한국 대학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지 않나 싶다.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학생운동’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학생운동’하면 주로 정치적인 데모를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학생운동’은 정치적 운동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다. 첫째, 학생운동은 주체가 학생 스스로이어야 하며, 또한 그 대상도 학생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둘째, 학생운동은 정치, 문화, 종교의 영역에서 주로 나타난다. 한국 대학의 경우에는 정치적 학생운동은 더할 나위없이 활발했고, 문화 학생운동도 한 때 ‘탈춤반’이나 ‘샹송반’같은 모습으로 나타났었다. 그리고 종교적 학생운동은 CCC, IVF, YWAM과 같은 선교단체로 대표되어 상당히 활발한 활동을 해왔다. 그러나 이런 세가지 형태의 학생운동은 90년대 들어 상호의 영역을 넘나 들면서, 그 특징을 구분 짓기 어려워졌다. 그 예로 ‘기독 총학’을 들 수 있는데, ‘기독 총학’이란 각 대학의 기독 연합회에서 총학생회장의 후보를 배출함으로써 정치적인 영역에 참여하려는 시도이다. 비록 이런 시도는 성공 사례와 더불어 많은 비난도 받으므로, 시도 자체에 대해 회의을 남기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학생운동’이란 ‘학생이 최종 결정을 내리는 운동’이라 하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많은 의문이 떠오르는데, ‘현재의 간사중심의 선교 단체들은 간사들이 주로 최종 결정권이 가지지 않는가?’하는 점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현재의 선교 단체들의 운동을 학생운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간사들이 중심이 된 모임이라는 점에서 간사운동 혹은 조직운동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영국 옥스포드 신학부 교수인 Alister McGrath가 ‘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라는 책에서 복음주의의 특징을 6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복음주의는 다음 여섯 가지에 우선점을 두는 특징을 지닌다.
-   성경의 절대권위
-   예수 그리스도의 위엄과 영광
-   성령의 주권
-   개인적 회심의 필요성
-   복음전도의 우선성
-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


복음주의란 어떤 하나의 교파나 단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특정한 믿음의 관점’이라 하겠다. 그 예로 천주교나 자유주의 신학 가운데서도 복음주의자를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복음주의에 대한 용어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면, evangelism은 ‘복음 전도’, evangelization은 ‘복음화’, 그리고 evangelicalism을 ‘복음주의’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evangelicalism이라 불리는 ‘복음주의’는 복음을 전하는 ‘복음화’와는 구분되어 사용되어야 한다.


복음주의의 역사
복음주의의 역사를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제 1세계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독일에서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조지 뮬러가 다녔던 학교가 할레 대학이라는 곳인데, 이 학교는 프랑케가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할레 대학을 다녔던 사람 중에 진센도르프 백작이 있었는데, 그가 만든 겨자씨 모임을 통해 선교사들이 파송되었고, 그 겨자씨 모임으로 모라비안이 생겨나게 되었다. 최근에 많이 행해지는 선교방식이 ‘전문인 선교’인데, 그 당시 모라비안들은 벌써 자신의 전문 직업을 가지고 선교지로 나가는 전문인 선교를 행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살펴보아야 하는 학생운동의 역사는 영국이다. 영국의 학생운동에서 요한 웨슬레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요한 웨슬레는 감리교회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감리교를 웨슬레가 창립한 것은 아니고, 후에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영국의 학생운동을 살펴 볼 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챨스 시므온(1759 1836)이다. 이 분이 중요한 이유는, 현재 널리 행해지고 있는 귀납법적 성경공부나 강해 설교의 방법을 처음 사용했다는 점이다. 챨스 시므온은 대학 졸업 후에 약 30년을 대학에 남아 교목과 비슷한 역할을 하며,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후, 영국에는 캠브리지 세븐이라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885년에 캠브리지 대학에서 7명의 선교사가 배로 한 달이 넘은 거리인 중국의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그 일곱명의 선교자 중에 CT 스터드(Stude) 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터드는 당대 크로켓으로 전국적으로 알려진 스포츠 스타였기에 영국 전체가 그들의 선교사 파송을 크게 다룰 수 밖에 없었다. 캠브리지 세븐의 배경을 살펴보면, D L 무디 (Moody)가 있었다. 1882년에 캠브리지에서 D L 무디의 집회가 일주일간 열렸는데, 별 반응이 없던 집회는 마지막 날 열기가 오르게 되었고, 무디가 초청을 하였다. 그 날 D L 무디의 집회에 캠브리지 학부 학생의 약 절반이 참석했고, 그 중에서 200명 이상이 회심을 하게 되는데, 그 가운데에 C T 스터드가 있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SVM (Student Volunteer Movement)을 중심으로 살펴보아야 한다. 캠브리지 세븐이 파송된 이후 1886년 마운트 헐몬에서 D L 무디의 집회가 열렸었다. 그 집회에 89대학에서 251명이 참석을 하는데, 그 중에 100명이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사실 이 무디의 집회는 로버트 와일러가 총무로써 주관을 하게 되는데, 와일러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1945년까지 각 대학을 다니면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선교사로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1886년부터 1945년까지 대학생 중에서 무려 20500명이 해외선교사로 헌신하게 된다. 이 기간은 한국에 복음이 전해진 시기이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가 바로 이 20500명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1886년부터 약 2년간 와일러가 방문한 대학은 약 162개에 이르는데, 그 방문 기간 중에 챨스 스터드가 선교보고를 위해 미국을 방문하게 된다. 스터드가 방문한 학교는 코넬(Cornell) 대학이었는데, 그 집회 가운데 존 모트 (John R. Mott)가 있었다. 존 모트는 학생운동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이다. 존 모트는 SVM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만든 단체가 아이러니 하게도 WCC이다. 존 모트가 1895년 WSCF (국제 기독학생회)를 창설하는데, 그 후 1990년도 초 WSCF와 현재의 복음주의 계열이 분열을 겪게 된다. 그 분열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의 하나가 자유주의의 침투였다. 존 모트는 감리교 평신도로서, 전 세계를 다니며 학생 집회를 열어, 선교사를 헌신케 하는 탁월한 mission mobilizer였다. 존 모트의 집회는 일본에서도 열렸었는데, 그 집회에 참석한 유일한 한국 사람이 윤치호였고, 그 집회의 영향이 한국에도 미치게 된다. 1945년에 SVM은 막을 내리지만, 곧 이어 1946년에 Urbana 대회가 시작되게 되었다. 이 얼바나 집회를 모방해서 한국에서 열린 집회가 다름 아닌 ‘선교한국’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전체적인 학생운동은 ‘선교’와 관계하면서 진행되어 왔슴을 알 수 있다.


이상의 제 1세계의 학생운동의 특징은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  전통 복음주의 신앙을 대학 안에서 발견하고 계승시켰다.
-  세계 선교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  성경공부와 기도운동이었다.
-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다.


요한 웨슬러의 경우만 보더라도, 조지 뮬러보다 고아원을 더 많이 설립할 정도로 사회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제 3세계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살펴보자. 제 3세계의 학생운동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나게 된다. 일본의 경우는 개화가 일찍 되는 까닭에 다소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 삿포로 농림학교에서 윌리암 클락의 영향으로 1878년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는 우찌무라 간조가 대표적인 사람이다. 우찌무라 간조의 제자로는 김교신 선생과 함석헌 선생이 한국 교회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중국의 경우, 문화혁명 전에 북경대학의 IVF에 소속된 학생 숫자가 세계에서 가장 많을 정도로 활발했다. 다시 말해, 제 3세계의 학생운동은 접목되고 이식되었다는 측면이 강했다.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은 크게 3세대로 구분할 수 있는데, 1945년 이전, 해방 이후, 그리고 1980년 이후가 바로 그것이다. 해방 전에는 Y운동으로 불리는 YMCA가 주도를 했고, 해방 이후에는 초교파 선교 단체들이 주도를 하게 된다. 1980년 이후에는 초교파로써 연합하고 협력하는 운동들이 많이 생겼다. 코스타도 그런 흐름 중의 하나라 하겠다. 한국 YMCA의 간사 1호는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이상재 선생이 60세에 YMCA의 평간사로 일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1세대 운동은 민족적 지도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2세대의 초교파 단체의 운동은 성경공부와 해외선교에 중요한 영향이 미쳐왔다. 3세대 학생운동은 네트웍 운동으로 연합과 협력을 이루어 오고 있다. 코스타도 그 예라 하겠다.


제 2세대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2가지 면에서 평가해 보자. 긍정적인 면은 경건생활, 복음 전도, 제자 훈련을 강조하고, 방법론 강조했으며, 조직 의식화된 기독교 지성을 배출하게 된다. 문서운동이 활발하였으며, 영적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또한 선교의 붐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부정적인 면은 서구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고, 자신만의 색깔을 너무 많이 가지고 섹트화되었다 점이다. 신앙적으로도 너무 편향적이다. 즉 다소 근본주의에 가까운 경향이 있다. 또한 약하거나 왜곡된 교회관을 가지고 있고, 미흡한 상황 문화 변형력이 적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한국의 복음주의 학생운동을 정리해 보면, 해방 이전에는 김교신 이상재 선생같은 분에 의해 민족에게 희망을 주는 역할을 했고, 해방 이후 유신 정권까지에는 복음주의 학생운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80년대 이후의 학생운동은 공명선거 위원회와 같은 모습으로 한국 사회에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전도하는 운동
-  제자를 양육하는 운동
-  기도를 강조하는 운동
-  성경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운동
-  철저한 성경연구 운동
-  효과적인 그리스도 학자들을 배출하는 운동
-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운동
-  선교하는 운동
-  생활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활동하는 운동
-  창조적인 기독교 사상 문서운동
-  학생의 책임에 위탁하는 학생의 운동
-  민족적 지도력에 위탁하는 운동


위에 열거한 12가지 원칙을 지키지 않는 경우에 학생운동이 위축되는 경향이 있어왔다.


새 시대의 복음주의
그렇다면, 새 시대에 복음주의 학생운동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일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는데, 그 첫째는 ‘선교’에 대한 역할이다.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한국의 선교는 상당히 활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연합 운동이다. 존 모트의 경우도 학생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네트웍킹하고 동원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예를 살펴보면, 1996년도 ‘복음 민족 역사’ 집회를 위해 작곡된 고형원씨의 ‘부흥’이란 곡이 기존 교회에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1997년에는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을 학생 선교단체를 중심으로 시작했고, 한달 만에 3억 5천만원이 모이는 일이 있었다. 그 일을 계기로 일반 국민에게까지 북한 동포 돕기 운동이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복음주의 학생운동이 기존의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또한 사회 참여에도 적극적이 되어야 하겠다.


만일 지금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느 곳을 다니실까? 아마 사람이 많이 몰려 있는 캠퍼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캠퍼스를 중심으로 한 학생운동은 역사에서 거름과 같아서 눈에 띠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뿌려진 씨가 결실을 맺어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 생각한다. 여러분에게 캠퍼스에 관심을 가지고 씨를 뿌리라고 도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