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같은 사무실의 후배로부터 웃지 못 할 얘기를 들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 주민들이 최근 무슨 “xx 시민 의정 감시단”이라는 것을 결성해서 아파트 단지마다 돌아다니며 서명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그 지역에 있는 시유지에 영세민들을 대상으로 한 아파트가 들어서게 됐는데 영세민 아파트가 들어서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지역의 주거환경이 나빠지고 아파트 값도 떨어지게 된다며 아파트 허가를 막지 못한 그 지역 국회의원을 이번 총선에서 낙선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서명운동에는 일부 주민들만 동조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아파트 주민들이 찬성해 서명하고 있어서 그 후배의 아내도 계속 찾아와 서명을 요구하는 사람들 때문에 힘들어 하다가 그 후배에게 그냥 서명해 주면 어떨까 하고 제의했다고 한다. 그 후배는 단호하게 절대 서명해주지 말라고 아내에게 말했다고 했다.
하나님을 믿는 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정신이 똑바로 박힌 놈이구나 하고 혼자 생각하고 있는데 그 후배의 이어지는 말 한마디는 내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들었다.
” 선배, 근데 그 서명운동 주도하는 사람이 교회 장로라고 하데요.” “……”
요즘 이 애실 사모님의 ‘어? 성경이 읽어지네 (두란노)’를 읽고 있다. 이 책에서 이 애실 사모님은 성경을 꿰뚫는 중요한 두 가지 관점으로 “성경은 누가 왕이냐를 다루는 왕 싸움 이야기라는 것”과 “셋의 계열은 가인계열과 섞이면 안 되고 정복해야 한다는 것”을 제시한다. 인류의 역사는 왕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왕 노릇 하려는 인간들의 역사이며 이러한 인간 나라에 맞서서 하나님께서는 셋의 계열을 일으켜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신다는 관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셋의 계열, 즉 하나님의 사람들인데 하나님께는 이들에게 “가인의 계열 즉 세상나라의 문화에 섞이지 말 것과 그 문화를 하나님 나라의 문화로 정복할 것”을 요구하신다. 결혼하고 아이들이 커가면서 어느덧 세상 문화에 섞여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 세상 사람들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가치들에 맞서 하나님의 문화, 하나님의 가치가 얼마나 우월한지 증명함으로써 가인의 문화를 정복하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나태해지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게 된다.
민수기 33장에는 모세의 지도 아래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민족들의 노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33장 전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디 어디에서 발행하여(left) 어디 어디에 진 쳤고(camped) 하는 식의 표현이 연속해서 나온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광야에서 계속해서 이동하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바로 ‘leave’와 ‘camp’가 계속되는 나그네 인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나안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가는 인생 여정에서 잠시 진 쳤다가 다시 이동해야 하는 나그네의 삶… 셋의 계열들은 그런 나그네의 삶 속에서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체험하며 고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가끔은 세상 속에서 순결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어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하지만 그 때 나는 디도를 생각한다. 바울은 디도서에서 영적인 아들 디도를 믿음을 가진 사람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던 악명 놓은 땅 그레데에 떨어뜨려 놓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그레데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로 디도가 살았던 시대에 이미 동성연애와 겁탈, 강간이 횡행하던 짐승 같은 도시였다. 디도가 그 곳에 남아있어야 하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바로 그 곳이 살기 어려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그레데는 과연 어디일까?
과거에 힘들다는 이유로 직장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되도록이면 좋은 기회를 찾아, 좋은 환경을 찾아,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일 것이다. 하지만 셋의 계열, 하나님의 사람들은 그레데 (가인의 나라)에 남아 그 상황을 변화시키고 그 곳에서 믿는 자로서의 회복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그레데에 남겨둔 것은 바로 세상의 고통을 감내하며 세상 속의 누룩이 되라는 깊은 뜻이 담겨있는 것을 나는 일찍 깨닫지 못했다.
그레데에 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되 그레데가 주는 가치를 사랑하지 않는 자….우리 코스탄들이 원하는 순결한 그리스도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