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6년 6월호

제자 삼는 삶으로의 부르심은 내가 살아가는데 있어 참 기쁨과 소망, 그리고 모든 열심의 이유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직 관심이셨던 영혼구원과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어가는 일. 그리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마땅히 주인이 걸어가신 길을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고, 그 부르심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그저 짧고 부끄러운 사역이었지만 지금까지의 제자 삼은 사역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에게 ‘난 할 수 없구나.’ ‘안 되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것들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을 더 알아 갈수 있었으니, 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은혜만을 간구하며 살 수 밖에 없음’을 계속해서 알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


사역의 한 term을 마친 후 한때 긴 고민이 시작됨과 동시에 나름대로 좌절에 빠져 있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제자로써의 부르심 앞에 처음 섰을 때부터, 그 사역에 임하면 임할수록 다른 믿음의 선배나 동지들처럼 괜찮아 보이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거나, 듣던 대로 ‘성화’되어 가는 모습은 나한테서 절대로 찾아볼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불안정하고 미울 만큼 싫은 내 모습들이 더 분명히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자 삼는 사역에 열매 없음은 내겐 큰 영적고난으로 다가왔습니다. 왜 그런 걸까? 나름대로 난 분명whole heartedly 하나님사역에 열심과 충성을 다하였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내게 맡겨진 지체들에게 나름대로 난 자신 있게 늘 말하곤 했습니다.
‘여러분은 내 제자가 아닌 예수님의 제자로 세움을 받아야합니다. 그래서 날 보며 따라오면 안 되고 오직 예수만을 보고 직접 배우고 따라가세요.’라고… 얼핏 들으면 굉장히 겸손한 모습인 것처럼 보일수도 있겠습니다.
어찌 보면 이 motive는 죄 성으로 가득한 내 실질적인 삶이 드러날 것 같은 두려움으로 의한, 회피 하고픈 hidden agenda일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난 십자가 뒤에 비겁하게 숨어 버린 것일 수도 있겠고, 십자가라는 도로상에 off road에 서 있는 signage처럼 방향제시자였을 수도 있겠구나.. 라고도 생각해 봅니다 ‘이쪽이 아니라 저쪽입니다.’ 라는 표시처럼.


그렇지만 성경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고전 11:1)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빌 4:9) 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씀 앞에서 난 당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바울은 얼마나 완벽한 사람이며, 또한 그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얼마나 당당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절대로 겸손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 있게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담대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난 나 스스로에게 수많은 question mark들이 생겨났습니다.
‘난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 것 일까?’ 바울과 같은 고백을 1%정도라도 따라 흉내 낼 수 있는 당당함이 하나님 앞에서 있는가? 내 삶에 실제적 열매로 드러나고 있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사역에 열매 없음의 원인은 결과적으로 내 첫 번째의 고민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로 이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 삶을 볼 때 내가 가르치는 말씀과 내 입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는 찬양의 말들과 결코 일치 되지 못함을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난 그것이 부끄러워서 복음 뒤에 내 모습을 감추려 했었을 지도, 어쩌면 실질적인 내 모습에 관해 denial stage에 머물러 있었지 않았나 라고 생각해 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순결하고 투명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리스도를 본받는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함이니라.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 요한복음 15:7-12)


참 제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하든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이 하나님이 되심을 내가 알고, 그 앞에서 내가 있어야 할 자리를 알아가는 것이지 않는가. 주되신 그리스도 예수가 걸어가신 길, 종 된 내가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그것이 무슨 고난의 길을 걸은 것 마냥, 오버를 하지 않았나 내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예수님 말씀대로 참으로 하나님 말씀에 붙들려 살고 하나님과 연합하여 산다면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다 하실 텐데 말이다. 그렇게 당연한 이치를 매번 인식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 것일까?


내가 하나님 임재 안에서 – 그 사랑 안에서 –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안다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완전히 녹아 없어질 텐데…그리고 내 안에 하나님만이 드러날 텐데 말입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내가 사용된 사역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 날 것이라 믿습니다. 왜냐면 그것은 곧 더 이상 나의 열심이 아닌 나를 통해 드러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참 사역이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주권에 사로잡혀 하는 사역을 내가 할 때 비로소 내가 그리스도의 본받는 참 제자가 되어갈 것이며, 열매를 바라는 사역 이라 믿습니다.


내 안엔 창조의 능력이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시지 않는 일엔 열매가 없는 건 당연 한 것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하셨구나…라는 고백만이 나의 고백이 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먼저 가신 그 길, 제자의 모습으로 살길 원합니다. 겸손함을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 앞에서 방자함으로 오버하지 않고, 그 십자가의 사랑 안에서 녹아 없어지기를 먼저 구합니다. 그렇게 내가 십자가 앞에서 투명 순결해질 때, 바울의 가르침처럼 그 신앙고백이 내 고백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가르침을 행하는 제자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이 체험되어 변화되어가는 being으로써 내가 훈련되어지고,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어가는 제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한복음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