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능력
빌립보서 1:12-26



편집 주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를 가지고 이코스타의 독자 여러분과 함께 큰 은혜를 나누었으면 한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여는 말


대전에 가면 서대전 사거리라는 곳에 새서울 내과라는 병원이 있다. 그곳에는 주로 대덕 연구 단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고는 한다. 특별히 연구 단지로 새로 부임한 사람들이 많고 그 중에는 외국에서 공부하고 온 사람들이 상당수로, 찾아오는 사람마다 증세가 거의 똑같다고 한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소화가 안되고, 약간의 통증이 있는 그런 증세인데, 상황이 그러하다보니 처방해 주는 알약이 누구에게나 같다. 빨간색 한 알, 초록색 두 알, 흰색 세 알. 이 병의 이름은 신경성 위염, 흔히 속병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주로 심적인 압박(pressure)을 많이 받고 신경을 많이 쓸 때 발생하는 병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심리적인 압박감은 왜 느끼게 될까? ‘환경적인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장래에 대한 불안감’, 대충 이렇게 세 가지 정도로 그 원인을 진단할 수 있겠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않은가? 이러한 어려움은 지금 이 시간 바로 여러분들이 겪고 있는 아픔이 아닌가?


먼저 환경적인 어려움을 보자. 환율도, 학비도, 아파트세(rent)도 모두 오르는데 딱 하나, 생활비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결혼한 자매들을 보면, 아이들은 지겹게 달려드는데 남편은 그야말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에 박혀 있는 학생들은 또 어떤가. 해도 해도 안 나오는 것이 연구(research) 결과요, 그나마 열심히 해서 학술 잡지(journal)에 보낸 논문은 실격(reject)이 되어 돌아 오곤 한다. 인간 관계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교회 밖에서나 교회 안에서나 자꾸 천적(天敵)들만 늘어가는 것 같다. 장래에 대한 불안도 만만치 않다. 이렇게 고생해 봐야 졸업하고 나서 과연 백수나 면할 수 있을까? 미혼 남학생들은 이렇게 결혼이 늦어지다 연로해져서 결국 장가도 못 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그래도 교회 안에서는 성경 공부다 기도 모임이다 찬양 모임이다 하여 열심을 내 보기도 하지만, 교회 밖에서는 안 믿는 사람과 똑같이 걱정하다 비참해지고, 그러다 성질까지 내고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의 믿음과 교회 밖의 행동은 과연 무관한 것인가? 어떻게 하면 어려운 환경 속에서, 기쁨과 감격을 느끼며 역동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는가?


이제 성경의 한 인물을 클로즈업(close-up) 해 보자. 그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정도는 훨씬 심했던 것 같다. 그는 바로, 빌립보서에 나타난 사도 바울이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빌립보서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곧 서신서이다.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서 처음 세워진 교회로 사도행전 16장에 그 탄생이 잘 나타나 있다 – 바울이 환상을 본다. 마케도니아 사람이 나타나서 도와 달라고 말하는 환상을 보고 바울은 빌립보로 간다. 이후, 염색업을 하는 루디아와 그 가족이 주님께 돌아오고 지하 감옥을 지키던 간수장과 그 가족들도 주님께 돌아온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것이 빌립보 교회인 것이다. 출발부터 그래서였는지,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특별히 사랑하고 아꼈던 교회처럼 보인다. 글에도 ‘표정’이 있다는 사실을 독자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흔히 어조(tone)라고 말한다. 나는 빌립보서를 읽을 때마다, 마치 친정 어머니가 출가해서 반듯하게 살고 있는 딸을 사랑스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표정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이제는 친구 같아진 딸을 대견스워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1장 3-11절).


마찬가지로 빌립보 교회도 바울을 아낌 없이, 꾸준히 돕던 교회였다. 이번에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을 보고, 에바브로디도라는 신실한 형제 편으로 선교 헌금을 보냈을 뿐 아니라 노약한 바울을 그에게 직접 시중들게 하였다. 아마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를 에바브로디도로부터 들어 잘 알게 된 것 같다. 나중에,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로 돌려보내면서 함께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이다. 그 편지에다, 걱정하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안부를 전하고, 보내 준 도움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참에, 그 교회의 문제점을 두고 호소하고 촉구하는 권면의 말까지 전하려 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1장의 본문은 바울이 자기의 안부를 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성도들에게 무언가를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들을 담담하게 전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내면의 비밀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있으며 사물을 보는 그의 시각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의 평범한 이야기들이 직접적으로 권면하는 것 못지 않은 호소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세 가지 어려움을 바울도 똑같이 당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환경: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당하는 일이 도리어 복음을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된 사실을 여러 분이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곧 내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 이, 온 친위대와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므로, 주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가운데 서 많은 사람이 내가 갇혀 있음으로 말미암아 더 확신을 얻어 말씀을 겁없이 더욱 담대하 게 전하게 되었습니다. (1장 12절-14절)




  • 인간 관계: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 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 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 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 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 (15절-18절)




  • 삶과 죽음: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 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 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 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 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 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 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 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19절-26절).

내가 바라기는, 이러한 어려움들을 바울은 어떤 태도로 극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인지를 이 본문을 통해서 함께 보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하는 은혜를 누렸으면 한다.


환경의 어려움


먼저 환경의 어려움에 대한 바울의 자세를 보자. 13절에 ‘나의 감옥에 갇힌 것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바울이 감방에 있다는 말이다. 감방이란 어떤 환경인가? 한 번 가정을 해 보자. 직장에서 정리해고 당하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해서 빚 잔치를 하게 된다. 집 팔고, 사글세를 들게 되고, 하는 일마다 안 되어서 전락을 거듭하던 끝에, 맨 마지막에 다다른 곳이 바로 달동네의 단칸방이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밑바닥 인생이 바로 감옥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정죄되고 격리된 사람이 모인 곳이기 때문이다. 호적 등본에 빨간 줄 가고 나면, 자기를 포기하게 되고, 속된 말로 막 가게 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아귀다툼하는 곳이 바로 감방이다. 그래서 감방에 한 번 있어 봤던 사람들은 다시는 안 가려고 기를 쓴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어떤가? 그냥 투옥만 된 것이 아니라, 24시간 4교대로 붙여지는 감시병과 함께 사슬에 묶인 채로 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울은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신세 타령을 하지 않고 있다. 그저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 정도로 간단히 말하고 넘어간다. 그는 오히려 다른 일로 신이 나 있고 흥분되어 있었던 것이다. 무엇에 그토록 흥분했던 것일까? 그는 12절에서 자기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이 전파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며 기뻐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이어지는 13절(믿지 않는 사람에게 준 영향)과 14절(믿는 사람에게 준 영향)에 나타난다.


13절을 좀더 자세히 보면, 바울은 ‘자기가 감옥에 갇힌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저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하며, 믿지 않는 ‘친위대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 자기가 끼친 영향을 이야기한다. 감시병들과 24시간 함께 묶여 있다 보니 바울의 생활이 완전히 노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감시병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이 어쩌다가 이런 곳에 오게 되었을까? 그리고는 바로 나사렛 예수를 전하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고, 그러면서 ‘도대체 예수가 누구 길래, 이런 사람이 그 인생을 송두리째 던졌을까?’ 궁금해졌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관심이 높아지고 그분에 대해서 알고들 싶어하게 되자, 그것을 보고 흥분하고 있는 바울의 모습이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믿는 사람들에게 준 영향’이 어떤 것인지는 14절에서 볼 수 있다. 바울이 갇힌 것 때문에 믿는 자들이 더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우리도 주기철,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피가 끓지 않는가? 우리도 몸을 아끼지 않고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를 하게 되지 않는가? 바로 이런 영향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변화를 보고 흥분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랑하는 분이 전해진다는 사실에 오히려 신이 나 있는 모습을 본다. 거기에 비하면 현재의 고통은 아예 말할 가치 조차 없다는 듯, ‘내가 당하는 일’, ‘감옥에 갇힌 일’로 간단히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하는 통쾌한 KO승을 거두고 있다.


환경의 어려움 앞에서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가 유학 생활을 하던 시절, 경제적으로 유난히 힘든 상황이어서 늘 돈이 없다보니 은행 잔고는 항상 한 자리 수와 마이너스(minus)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다. 당시 12년 된 스테이션 왜건(Station wagon)을 몰았는데, 차 천장의 비닐이 벗겨지면서 드러난 솜 같은 단열재가 눈송이 같이 내리던 차였다.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려면, 창피하다고 학교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내려 달라며 사정하곤 했다. 한 번은 한국에서 온 손님에게 라이드(ride)를 드릴 기회가 있었는데, 약간은 창피스럽기도 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뒷자리에 둔 (야외요리용) 숯(charcoal)이 흘러 나와서 볼썽 사납게 바닥에 널려 있는 게 아닌가. 몇 달 뒤에 한국에서부터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물론 농담도 섞여 있었지만) 우리가 몰고 다니는 차가 석탄차라는…. 학교 생활도 참 힘들었다. 숙제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고, (박사자격) 종합시험(General Exam)도 어려웠고, 연구에 대한 부담(pressure)도 대단했다. 왜 심적인 부담을 많이 받으면 체질이 산성이 되어 딸을 많이 낳는다는 학설이 있지 않은가. 그 당시 한국인 부부들이 19명의 자녀를 출산했는데 그 중에 딸이 17명, 아들이 2명으로, 그 학설이 잘 맞는다고 모두가 ‘호!’, ‘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있다.


이런 어려운 시기를 그리스도 없이 지날 때, 사람이 망가지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처음 보스톤(Boston)에 도착해서 먼저 왔던 선배에게 인사를 하러 기숙사로 찾아 갔는데, 나는 사람이 바뀐 줄로만 알았다. 선배는 살벌한 표정에 흉칙한 얼굴로 변해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주 중에 스트레스(stress)를 엄청 받고 나면 금요일 저녁 차이나 타운(China Town)으로 달려가 쿵푸(Kung-Fu) 영화 보고, 거나하게 취해서 있는 대로 지도 교수 욕하고, 기숙사에 돌아와서는 밤새 카드로 지새우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주일에 연구실로 나가고…. 이런 생활을 반복하면서 사람이 완전히 황폐해져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런 시절을 예수님과 함께 보낸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MIT 학생들이 중심이 된 Gate Bible Study(GBS)라는 모임이 있다. 금요일 저녁, 믿지 않는 학생들이 차이나 타운으로 달려갈 때, 우리들은 GBS에서 함께 모여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리고 GBS를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고자 노력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면서 얼굴들이 모두 그렇게 환할 수가 없었다. 남자들은 신수가 훤해지고, 아줌마들은 (원래 약간 젊기도 했었지만) 피부가 고와지고 얼굴이 달덩이같이 환해지는 것이었다.


모두에게나 다 똑같은 어려움이 있다. 그 어려움을 누가 어떻게 해결하느냐의 차이인 것이다. 여러분, 지금 처한 형편이 정말 견디기 힘들다고 느껴질 때, 그때,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묵상해 보자.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살고 싶은 열정이 나를 사로잡도록 하자. 그러면, 환경이 더 이상 나를 비참하게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한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


인간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은 때로는 그 어떤 어려움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 같다. 아니, 적어도 바울에게는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본문을 보도록 하자.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도 어떤 사람들은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고, 어떤 사람들은 좋은 뜻으로 합니다. 좋은 뜻으로 하는 사람들은 내가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세우심을 받은 줄을 알고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지만, 시기하거나 다투는 마음으로 하는 사람들은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다투는 마음으로 순수하지 못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참으로 하든지 거짓으로 하든지, 무슨 방법으로 하든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니, 나는 그 일로 기뻐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기뻐할 것입니다.”(빌1:15-18)


본문의 뉘앙스를 보면, 다른 사람들로 인한 어려움이 투옥의 어려움 보다 더 컸던 것 같다. 감옥의 어려움은 간단히 언급하는 정도로 넘어간 것에 비해 인간 관계의 어려움은 15절과 17절에 걸쳐 두 번씩 이야기하고 있다. 하물며 ‘시기’와 ‘다투는 마음'(15절)을 언급하며 갈등의 동기까지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다투는 마음(경쟁심)과 시기심으로, 순전치 못한 마음으로(17절) 전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고약한 것은 17절에 ‘나의 감옥 생활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는 생각을 품고’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 그리스도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바울에게 고의적으로 고통을 가하려고 했다는 말이다. “바울은 별 것 아니다”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말을 흘리고, 자기들의 추종자를 만들어서 그런 평판을 퍼뜨리도록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데어 진물이 흐르는 부위에다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과 같은 잔인한 짓이지 않은가.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는 열심이 있어 보이고 영적으로 보일지는 모르나, 실제로는 정말 야비하고 악질적이며 가장 비성서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나 시험받는 부분은 밖에서 오는 박해나 불이익보다는 믿는 사람들의 악의적 수근거림인 경우가 많다. 기도 제목 낸다고 하면서, 심지어는 설교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아픈 부분을 공공연히 건드리는 예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바로 내 안에 그런 성향을 너무 강하게 가지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자. 높아지고 싶어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DNA 안에 이런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고 믿는다. 이 세상 어느 문화에 가도 우리는 그런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문화적인 정서는 이런 경향이 좀 더 심한 것 같다. 유난히 비교 의식이 강하고, 오기가 많은 한국 문화를 흔히들 ‘게’ 문화라고 한다. 장독 안에 게들을 넣어 놓으면, 혼자 힘으로 너끈히 기어 나올 수 있는데도 나오지를 못 한다. 나오려고 하면, 다른 게들이 밑으로 끌어 내리기 때문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옛날 속담처럼, 남 잘하는 것은 될 수 있으면 인정 안 하고, 조금만 잘못하면 ‘거 보라고, 그럴 줄 알았다’고 고소해한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상처를 받고 나면, 상대방을 야속하게 생각하고, 원망하고, 미워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은 어떠한가? “그렇지만 어떠냐?”고, “그게 무슨 문제냐?”(What does it matter?)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나의 쓰라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은(The important thing is) 저들이 시기심으로라도 전도해서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다.’그리스도께서 전파되고 증거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로 그냥 끝내지 않고,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지적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적·감정적으로 그것을 기뻐한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참으로 힘든 문제인 인간 관계의 문제를 극복하는 순간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 주위 사람들을 진심으로 섬기는 자매가 하나 있다. 그런데 가끔 견디기 힘든 모욕을 당하거나, 왜곡된 소문(rumor)에 시달리고는 한다. 주로 주위의 시기심과 경쟁 의식의 결과이다. 그런데도 며칠만 지나면 다시 밝은 얼굴로, 그 아픔을 줬던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는 것을 보게 된다. 속이 없는 여자같이 보인다. 그 비결을 물어 봤더니, 자기는 견디기 힘들 때는 혼자 방에 들어 앉아 몇 시간이고 생각을 한다는 대답이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셨던 구속의 사랑이 얼마나 컸던가를 되씹고 되씹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감격이 가슴을 가득 채워서, 이런 고백이 나온단다. “나의 자존심과 긍지, 정말 중요해. 그러나 더 중요한 것 있어. 주님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주셨어. 주님이 그 사람을 사랑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렇게 해야지.”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 관계의 문제는 다음 9월호에서 좀 더 깊이 살펴 보도록 하겠다.


죽음의 문제


앞에서 말한 환경의 문제나 인간 관계의 어려움보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아마도 죽음의 문제일 것이다. 빌립보서 1장 19절-26절에서 그 문제가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나는 여러분이 기도해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도와 주셔서 내가 풀려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간절히 기대하며 바라는 것은 내가 어떤 일에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전과 같이 지금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나의 몸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나에게 보람된 일이라면 내가 어느 쪽을 택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 그것은 내가 다시 여러분에게로 감으로써 여러분이 나를 대면하는 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자랑거리가 많아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빌1:19-26)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갇힌 것에서 결국 풀려 나는데(19절), 그의 간절한 기대와 바램은 “내 몸을 통해서, 살아있을 때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드러나고 죽음을 통해서도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이라고 말한다(20절). 바울은 여기서부터 삶과 죽음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해서 26절까지 그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에서 그의 평소 속 마음이 잘 드러난다. 그가 죽음에 대해서 가졌던 생각이나, 그가 살았던 이유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도 바울은 죽음이 멀지 않았음을 이미 예감했는지도 모르겠다.


죽음이 아직도 나와는 멀다고 생각되는가? 실감이 나지를 않는가? 그러나 죽음은 정말 멀지 않았다. 초등학교의 1년과 요즘의 1년은 다르다. 점점 가속이 붙어서는, 사십대 말의 1년은 정말 바람이 지나가듯 간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물론 육십대의 어른들은 그냥 웃으시곤 한다. 얼마 전 정년 퇴임한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요즈음은 죽음의 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보이고 그 벽을 향해서, 마치 열차가 봉우리에서 내리막길을 내려가듯 무섭게 질주하는 것 같다고. 전에는 봉우리 반대편에 있어서 그것이 안 보였던 것 뿐이라고.


혹시 자다가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가? 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면 영원히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기를 쓰고 깨려고 하는 것. 바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당장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주게 된다. TV의 건강프로가 점점 늘어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사람들이 실직을 두려워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우리가 가진 이런 두려움을 히브리서 2장 15절이 잘 말해 주고 있다 –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어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라”(히2:15). 한 마디로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죽기 싫어서 질질 끌려 사는 삶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는 죽음에 대해 확실한 입장을 정리하지 않고는 끌려서 살아가는 삶을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삶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이삼십대에 이 문제의 해답을 얻은 사람은 대단히 현명한 사람이요, 더 나아가서 이 해답에 부합되게 사는 사람이야말로 축복받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는가? –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21절). 말이 좀 어렵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맥 가운데서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죽는 것이 어떻게 유익이 될 수 있는가? – “내가 원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훨씬 더 나으나”(23절).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훨씬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죽음은 이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다림’의 대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망의 공포가 간단히 해결되고 있는 것을 본다. 인간의 가장 큰 문제인 죽음의 문제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Powerful’하게 극복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죽음이 기다려진다는 말이다.


이제 바울에게 죽음에 대한 입장이 분명한 만큼, 그의 삶의 이유도 분명해졌다 – “내가 육신으로 남아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신하므로, 나는 여러분의 발전과 믿음의 기쁨을 더하게 하기 위하여, 여러분 모두의 곁에 머물러 있어야 할 것으로 압니다”(1:24-25). 바울은 자기가 사는 것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24절), 그들이 역동적인 신앙생활을 하도록 돕기 위해서 산다고(25-26절) 말한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사람이 너무 보고 싶어서 빨리 귀국하고 싶지만, 그 사람이 바라는 것은 여러분이 충분히 공부를 해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만날 날을 고대하면서도 사랑하는 사람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해 보자. 바울이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고 싶지만, 막상 죽자니 겁이 나서 할 수 없이 사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분 때문에 죽는 것이 훨씬 기다려지지만, 그분이 맏긴 소명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자세로 하루를 살 때 그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정말 못할 일이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 맡기신 일을 마치려고 하는 것이야말로 앞의 두 가지 어려운 문제들을 이기게 한 능력의 원천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감옥의 문제였을 때는 “지금 힘들지만, 곧 주님을 볼 거야. 그때까지 그분을 열심히 전하자” 라며, 그것이 인간 관계의 문제였을 때는 “힘들지만, 이까짓 것 뭐 중요해. 그분 맡기신 사명을 마치고 주님을 만나 뵙자” 라며 그는 어려움을 기쁨으로 이겨내었다.


그리스도와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인 것이다.


맺는 말


이번 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안부의 글을 통해 그의 삶의 모습(lifestyle)과 비결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처해 있던 어려움은 정말 힘든 것들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환경의 문제를 능히 극복하게 만들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인간 관계의 아픔을 전혀 문제도 안 되는 것으로 이겨내게 만들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또 교회는 나가지만 예수님을 오늘 본문과 같은 수준에서 만난 적이 없는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는 교리 체계가 아니며, 교회 생활이 곧 기독교도 아니다. 기독교란 바로 한 분과의 사랑의 관계이며, 그분의 사랑에 감동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이 분을 만나서 사랑의 관계가 얼마나 큰 감격인지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믿는다고 하는 분들도 함께 다짐했으면 한다.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먼저 죽음의 문제를 다시 한번 정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삶의 새로운 이유와 동기를 자신의 것으로 확실히 하기를 바란다. 그때 우리는 가정과 교회와 학교 생활에서 환경의 문제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능히 이길 것을 확신한다. 세상이 감당하기 어려운 확신과 능력의 삶이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번 호에서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다시 확인하였다(1장). 앞으로 9월호를 통해서는 복음 안에서 서로 섬기고 하나되는 것을 우리가 회복했으면 한다(2장). 10월호에서는 그런 맥락에서 신앙 인격의 성장에 대해서 방향성을 분명히 해야할 것이다(3장). 그럴 때 우리는 다시 이 사회를 향해서 소금과 빛의 직분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