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OSTA 성경강해


예수 그리스도, 종으로 오신 하나님
빌립보서 1:27-2:16



편집 주
지난 8월호부터 3회에 걸쳐 빌립보서 강해를 연재하고 있다. 성경 본문을 가지고 특강을 한다고 하면 딱딱한 음식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갖기가 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만 집중해서 말씀을 대한다면 그만큼 풍성한 것을 맛볼 수 있고 우리 자신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성경강해는 지난 KOSTA/USA-2001의 주제 성경강해를 재 구성한 것이다.


빌립보서 1장 읽기
빌립보서 2장 읽기


여는 말


그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어느 날 자기의 스튜디오에서 새 작품을 시작했다. 그는 커다란 캔바스(Canvas)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특유의 천재성을 발휘하여 그림의 대상을 선택하고 구도를 잡고 윤곽을 그려 넣어 색깔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동안 열심히 그리다가, 아직도 작품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멈추고는 그의 제자 한 사람을 불러 “이 그림을 완성하라”고 권유하였다. 그러자 제자는 “저는 이런 걸작에 손을 대서 완성할 자격이 없습니다. 제대로 끝낼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며 펄쩍 뛰었다. 그러나 다 빈치는 이 한 마디로 그 제자를 완전히 침묵시켰다. “그래도, 내가 시작한 이 그림을 보면, 넌 이 그림의 완성을 위해 네가 지닌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와 마음을 갖게 되지 않느냐?”


이렇게 다 빈치가 그림을 시작했듯이,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어떤 작품을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의 말씀과 행동을 통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고난을 통해서 시작하신 그 일을 우리 더러 완성하라고 하신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기신 본보기를 보여 주는데, 이 본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을 함께 살펴 보도록 하자.


빌립보 교회의 배경


지난 8월호에서도 말한 것 같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교회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본문을 보면 이 교회에 큰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교회를 이끌던 두 명의 리더 사이에 불화가 있었고, 그 주위에 파당이 조성될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바울은 이 소식을 듣고 (아마도 자세한 내막을 에바브로디도에게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냥 두면 이 교회가 파국에 처할 수도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 “나는 유오디아에게 권면하고 순두게에게도 권면합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빌4:2). 바울은 유오디아에게 권하고, 순두게에게 무언가 호소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호소하고 있는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다. 여기서 아예 이름을 들어가며 호소할 정도로 이 불화는 이미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직접적으로 대놓고 호소하기 전에, 그는 2장에서 먼저 그 기초가 되는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먼저 본문의 구조를 보면, 1장 27절-2장 16절은 빌립보서 전체에서 첫번째의 권면을 담고 있는데 우리는 이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 (1) 1장 27절-1장 30절, (2) 2장 1절-11절, (3) 2장 12절-18절. 이 세 부분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려면 먼저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을 살펴야 한다. 1장 2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으며, 2장 12절에서도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고 말한 다음, 그 구체적 내용을 세 가지로 나타내 주고 있다.















1장 27절 2장 12절
(1) 하나되는 삶 (1) 화합하는 삶
(2) 각자가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것 (2) 신앙 인격이 성숙해 가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3) 그 결과로 복음이 증거되는 삶

즉, 서로 사랑하며, 신앙 인격이 예수님을 닳아 가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을 살라는 말로 결국 첫 번째 부분과 세 번째 부분이 거의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간에 두 번째 부분인 2장 1절-11절이 나타나는데, 이런 문맥 안에서 이 말씀은 먼저 ‘하나 됨’에 대해서 이야기 하며, ‘신앙 인격의 성장’은 3장에서 다루어진다. 하나 됨과 신앙 인격의 성장, 이 두 가지가 이루어졌을 때야 비로소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는 것이다.


(지난 호에서 보았던) 빌립보서 1장에서 바울은 먼저 안부를 통하여 자연스레 실례를 보여줬고 이제는 그 원리를 가르치고 호소하고 있다. 마치 당대의 피아니스트 Arthur Rubinstein이 제자들 앞에서 기막힌 연주를 한 다음, 그 원리와 방법을 가르치고, 그대로 실행할 것을 호소하는 것과 비슷하다. 지난 호에서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바울의 사랑이 세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그런 사랑을 가지게 되느냐’고 궁금해할 분이 계실 지도 모르겠다. 빌립보서 2장에서 여러분은 그 단서를 얻게 될 것이다.


빌립보서 2장 1절-11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1절-4절은 하나 됨(Oneness)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이고, 5절-11절은 하나되는 데 꼭 필요한 자세를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 됨(Oneness)


이제 하나 됨을 촉구하는 바울의 권면을 살펴 보자. 그는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격려나, 사랑의 어떠한 위로나, 성령의 어떠한 교제나, 어떠한 동정심과 자비가 있거든” 이라며 그들에게 주어진 네 가지의 엄청난 특권을 일깨워 주고 있다. 무슨 말인가? 첫째로 ‘그리스도 안의 격려’란 ‘내가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받는 큰 격려와 용기’를 말한다. 둘째로 ‘사랑의 위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것에서 확증된(demonstrate)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생각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는다. 셋째로 ‘성령의 교제’란 일차적으로는 ‘성령님과 나와의 교제’를 말하고 나아가 ‘성령님을 통한 우리들 사이의 교제’를 일컫는다. 넷째로 ‘긍휼이나 자비’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서로 간에 가지는 마음의 자세’이다.


이 네 가지는 정말 엄청난 것들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난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요,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마땅히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고 그 자녀들 중에는 빌립보 교인들도 포함되어 있다. 바울은 루디아와 간수장이 처음 주님을 영접했을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며, 거듭난 사람들만이 보이는 이 특징을 그들 가운데 생생하게 볼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지금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들, 그때 여러분들에게 그리스도 안의 격려,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이나 자비가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렇지요?” 아마도 그들은 속으로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 말한다. “여러분, 그렇지만 그것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완전해 집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바로 2절의 내용인 것이다. “여러분은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서 나의 기쁨이 넘치게 해 주십시오.”


예를 들어보자. 신혼 부부들을 보고 있자면 (낯간지러운 소리를 대담하게 하는 경향이 있는) “자기 나 사랑해?”라는 질문을 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은 주로 그 사랑을 증명할 수 있는 행동을 요구하는 이야기들이다. 즉, “정말 나를 정말 사랑한다면, 벗은 양말은 반드시 빨래통 안에 넣어줘요” 라든지, 뭐 그런 것들이다. 마찬가지로 바울도 빌립보 교회에 대해 행동을, 어떤 일을 행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더 필요하다는 말인가?


2절을 보면,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 등의 단어가 나열되어 있는데,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빌립보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되라’는 바울의 요구는 좀 더 “delicate”한 차원에서 받아 들여야 한다. 먼저 ‘아닌’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사람이 교회를 다닌다고 떠벌이는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교회를 간다면서 넌 하나님에 대해서 무엇을 믿고 있느냐?” 그 친구가 서슴지 않고 대답한다. “나야 물론 우리 교회가 믿는 것들을 믿지.” 그는 다시 묻는다. “그래, 그러면,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냐?” 교회 다니는 친구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한다. “그거야, 우리 교회는 내가 믿는 것을 믿는다.” 그러자 또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와 너희 교회는 무엇을 믿는가?” 교회 다니는 친구는 확신을 가지고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는 똑같은 것을 믿는다.”


그러나, 같은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어떤 뚜렷한 대상이 없는, 일치를 위한 일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찬성률 100%로 모든 사람이 다 같은 의견, 같은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서로 개성도 다르고, 의견도 다를 수 있지만, ‘전체가 하나의 조화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마치 성가대가 합창을 할 때,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 다른 소리를 내더라도 그것이 기막힌 화음을 이루는 것처럼. 이때 각자가 멜로디에 맞추려는 최선의 ‘자세’와 최선의 ‘태도’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같은 마음’, ‘같은 사랑’, ‘같은 뜻’, ‘한 마음’에 해당한다. 결국 바울은 2장 1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풍요함이 얼마나 큰지를 먼저 일깨워 주고는, 2절에서, 서로 생각과 개성은 다르더라도 어떤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를 공유하라, 그래서 하나됨을 이루라고 호소한다.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권면했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는 것”도 바로 이런 자세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때 필요한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3절에서 나타나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어휘 중 하나인 ‘겸손’이다. 바울은 그런 겸손의 최상의 예를 5절에서부터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빌2:3-5).


겸손


‘겸손’이란 교회 생활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다. 그런데도 사실 가장 발견하기 힘든 덕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은 평균 5분마다 한 번 꼴로 섬긴다는 말을 사용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다지 섬기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가장 보기를 원하시는 덕목이지만 어쩐 이유 때문인지 가장 안 되는 것이 겸손인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일을 하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 이로써 우리는 교만이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을 보는 잘못된 시각의 문제, 곧 ‘허영’인데, 영어로 “I am somebody” 라고 말하는 태도를 말한다. 소위 말하는 공주병이나 왕자병의 증상과 비슷하다. 둘째는 그런 허영의 시각으로 자기 권리나 주장을 내세우는 자세, 곧 ‘다툼’인데, 영어로 “Me first!” 라고 소리치는 태도가 이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보자. 여러분이 요즘 들어 신앙 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당신, 어째 기도가 좀 부족한 것 같아” 라는 말을 한다면, 대부분은 언짢게 생각할 것이다. 왜 그런가? 나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자존 의식이 누군가에 의해 손상 당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허영의 문제이다. “그래 좋다. 그럼 너는 얼마나 잘 하느냐? 당신 QT 해? 나는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것은 다툼의 문제가 된다. 이런 다툼이 더 진행되면, “너 나이 몇 살이냐?” 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이다. 특히 우리 문화는 호칭에 민감한 문화로 교수, 교수님, 박사, 박사님이 서로 다르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좋아한다. 만일 제자가 나보고 Mr. 장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싸우자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속으로야 어떻게 생각하건 격식(protocol)이라는 것을 유난히 따지는 문화가 아닌가.


자기가 얼마나 겸손한지 혹은 교만한지 알고 싶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리트머스 시험을 해 보라. 첫째는 ‘다른 사람이 나를 비판했을 때 나는 어떻게 대응하는가’하는 시험으로, 이를 통해서는 스스로에 대한 자기의 시각이 잘 드러난다. 곧 이 시험을 통해 내가 스스로에 대한 ‘허영’에 빠져 있는지 아닌지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둘째는 ‘내가 장기(長技)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이 혼자 알고 있는 것처럼 떠들며 화제를 독점할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시험이다. 이때 만일 속으로 부글부글 한다면, 나도 알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이 시험 결과는 곧 허영심을 못 이겨 이제 ‘다툼’을 하고자 하는 나의 본질을 드러낸다. 교회가 분열되는 곳을 잘 보라. 그곳에는 반드시 허영과 다툼이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속한 성경 공부 그룹 안에 긴장과 불화가 있는가? 틀림 없이 허영과 다툼이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는 ‘겸손의 자세’에 대해서 살펴 보도록 하자.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빌2:3-4) 이 구절은 겸손도 (교만과 비슷하게) 두 가지 자세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준다.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Consider others better than yourselves)는 것이 첫째 자세이고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둘째 자세이다.


명백하게,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은 허영심(“I am somebody”)과는 대조되는 자세이며,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는’ 것은 다툼(“What is best for me”)과 대조되는 “What is best for you”의 자세다. 결국 ‘겸손’이란 (허영 대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내적인 자세를 가지고, (다툼 대신)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사실 이런 자세는 로마 제국의 영향 아래 있던 빌립보 교인들에게는 가히 혁명적인 사고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 로마인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다른 사람보다 (물리적인 힘이든, 권력이든) 더 강해지는 것, 무지막지하게라도 지배하는 것이었다. 소위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다른 사람의 일을 돌아보고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자세를 가졌던 유일한 부류는 ‘노예’들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세를 최상의 미덕으로 들고 나온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었던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날도 힘의 논리가 앞서기는 마찬가지이다. 그 앞에 돈키호테 같지만,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 같지만, 우리는 ‘종’의 논리로 낮아져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하나 됨을 누리고 싶은가? 개성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천국의 하모니를 이루고 싶은가? 겸손하라. 물론 겸손이 힘들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최상의 예를 보인 분을 보면서 겸손하자. 바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그 최상의 예로 들고 있다(빌2:5-11). 아브라함을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모세를 예로 들 수도 있었고, 다윗을 예로 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왕의 왕, 주의 주가 되시는 그 분이 어디까지 낮아지셨는지를 보여준다 – “여러분은 이런 태도를 가지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여 주신 태도입니다”(5절)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11절까지는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이 본문은 초대 교회의 찬송가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사람들의 말을 빌면, 원문은 라임(rhyme)과 미터(meter)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산문이 아니라 운문, 운문 중에도 노래의 가사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초대 교회들이 불렀던 찬송가이고, 빌립보 교인들도 잘 아는, 어쩌면 그들이 바울과 함께 불렀을 지도 모르는 찬송가라면, 서로 잘 아는 찬송가의 가사를 가지고 그들에게 호소를 하는 셈이 된다. 두 번째 특징은 ‘낮아짐’과 ‘높아짐’이 대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말할 수 없이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상할 수 없는 곳으로 높아지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때 ‘낮아짐’과 ‘높아짐’의 하나 하나가 엄청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그분의 낮아지심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보자.


7절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라고 말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 말씀은 그분을 하나님 자신이었으며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삼위 일체의 하나님, 곧 ‘Three persons in one Godhead’이다.) 그리고는 그분의 낮아지심을 소위 점층법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을 비워 종이 되셨다.



인간의 몸으로 오셨다.



죽기까지 섬기셨다·죽임을 당하셨다.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20년 전, 12·12 사태 후에 있었던 일로 육군 참모총장이 이등병으로 강등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 아마 우리 나라에서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최고 사령관이 다시 머리 깎고 훈련소에 입대해서 군가 부르고 다닌다고 상상해 보라.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은 그것과는 비교 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으로 오시되, 왕이나 장군이나 학자로 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그분은 종의 신분으로 오셨다. 그분이 태어난 곳은 쥐나 벌레들이 득실거리는 외양간이었다. 목수로 출발해서 한때 랍비로 불리기도 했지만, 그분의 삶을 돌이켜보면 철저히 하나님의 종(servant)이었고, 인간들의 종이었다. 그분의 삶은 인간들의 가장 더럽고 냄새나는 부분을 씻어 주려고 자신을 바친 종의 삶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몸을 던져 죽임을 당하시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던 것이다. 로마 제국에서 십자가는 반역자들이나 가장 흉악범을 처형하는 사형 도구로, 곧 ‘치욕’의 상징이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었다 – 신명기에서는 ‘나무에 매달린 자는 하나님의 ‘저주’ 아래 있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한 마디로 ‘치욕’과 ‘저주’의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치욕과 저주를 한 몸에 지닌 채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아예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고도 말하고 있다.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 그 자체가 되셨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왜? 무엇 때문에?” 라는 질문을 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유대인 꼬마가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의 남자아이로 아주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그 두뇌로 그 학교 사상 전무후무한 문제아가 되었는데, 갖은 기합을 다 받고 벌이란 벌은 다 받았지만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드디어 그 학교 생긴 이래, 3학년으로서 최초로 퇴학을 당하는 기록을 세우게 된다. 그 꼬마가 원래 다니던 학교는 유대인들이 다니는 사립학교였는데, 부모들이 공립학교로 전학을 시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3개월을 못 버티고 또 퇴학을 당한다. 이제는 더 이상 갈 데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모는 유대인들이 잘 안 다니는 카톨릭 사립학교로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학교를 옮긴 그 다음 날부터 그 꼬마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해도 180도로 변한 것이다. 그 부모가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그 꼬마에게 묻는다. 도대체 너 왜 그러냐고. 그랬더니 그 꼬마가 실토를 하기를, 등교 첫날 신부님 방에 인사하러 갔다가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 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으니까 꼬마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처음에 신부님이 이제는 장난을 그만 치라고 타이르는데 말 같지도 않아서 대답도 잘 안 했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뒤를 썩 돌아보더란다. 그래서 자기도 따라서 봤더니 벽에 십자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잘 보니까 어떤 아저씨가 매달려서 벌을 서고 있는데 반쯤 죽어 있더라는 것이다. 자기 머리털 나고 그렇게 몰상식한 기합은 처음 봤다는 것이다. 신부님이 다시 자기를 보고 살짝 미소를 짓는데 소름이 확 끼치더라며, 그리고는 다시는 장난 안 치겠다고 결심을 했단다.


어떤가? 철 없는 아이지만, 십자가의 본질을 제대로 본 것 같지 않은가? 그 십자가에 자기가 매달릴 것을 생각했으니 말이다. 여기서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려서 저주와 치욕을 당해야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것은 바로 나와 여러분 아닌가?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이 그곳에 있다. 왜, 무엇 때문에 그러셨는가? 바로 주님의 사랑 때문이다. 높고 높은 곳에서 낮고 낮은 곳으로 오신 그 거리만큼이나 크고 크신 사랑이다.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주님께서 우리 대신 저 저주의 자리에 계시는데 우리는 어디에 있어야 마땅하겠는가?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자기 자존심 내세워서 형제들에게 상처나 주고 있지는 않은가? 자존심 좀 상했다고 형제를 원망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이 종이 되어 죽음을 당하셨는데, 우리는 뭐가 되어야 마땅한가? 우리가 포기 못할 다툼이 어디에 있으며, 포기 못할 허영심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용납 못할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이제는 우리도 우리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가는 길에는 이미 먼저 간 발자국이 있다. 피 묻은 발자국이 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제는 우리도 낮은 곳에 가서 형제들의 더러운 곳을 씻어 주며, 그들을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그 사랑을 알았던 바울은 그 주님을 평생 사랑하며 따랐다. 그 사랑으로 환경의 어려움, 인간 관계의 어려움, 그리고 죽음의 어려움을 넉넉히 이겨내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먼저 돌아보셨다. 첫째는 성부 하나님을 향해서, 그리고 우리들을 향해서.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본이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도저히 주님이 갔던 길을 갈 수 없다. 정말 두렵고 힘들 것 같아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존심에, 내 성깔에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분이 있는가? 그렇다. 우리의 힘으로는 안 된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의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그것이 9절부터 나타난다. 이제 9절부터 그리스도의 높아짐이 나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가 자신을 높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높이셨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낮아지셨을 때 하나님께서 는 그분을 높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높아지는 자를 낮추시고 스스로 낮아지는 자를 높이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준다. 그 영적인 원리는 구약에서부터 많이 보아온 것이며, 주님의 경우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좀더 중요한 원리를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부활하신 주님이 계신 보좌는 만물을 다스리는 위치이며, 이제 그분 앞에서 만물이 무릎을 꿇는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28:18-19).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만물을 발 아래 두신 이가 바로 우리 주님이실진대, 그 어찌 위로가 되지 않겠는가!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서 이제 우리로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게 하신다. 그분의 능력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낮아짐을 감당하게 하신다. 우리는 도저히 스스로는 낮아질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런 우리로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이 고난의 사랑을 가슴에 새기고, 이 부활의 능력으로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 가라”(2:12)고 말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하나됨을 이루고, 주님 닮은 모습으로 자라가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위에 드러내라고 말하고 있다.


맺는 말


이번 호의 본문, 빌1:27-2:16절을 통하여, 우리는 ‘복음에 합당한 삶’ 혹은 ‘구원을 이루어 가는 삶’ 가운데 중요한 한 가지인 ‘하나되어 서로 사랑하는 삶’에 관해서 함께 살펴봤다. 주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사랑을 보면서 그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하여서, 우리도 낮아져서 섬길 때, 진정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고, 서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봤다.


초대교회 시절 어떤 믿지 않는 역사학자가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 사람들이 반드시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예측은 결국 실현되었다. 주님 십자가 때문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그들의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끓어올라 밖으로 폭발했을 때, 결국엔 전 로마 제국을 뒤집어 놓지 않았는가!


우리가 이런 섬김과 사랑을 교회 안에서 먼저 회복해야만 한다. 이 일에 KOSTAN들이 앞장서야한다고 굳게 믿는다. 이 섬김과 사랑이 교회 안에서 다시 한번 끓어서 밖으로 폭발하여, 한국을 뒤집는 역사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한다. 주님께서 2000년 전에 먼저 시작하신 낮아지심과 섬김, 그것은 우리 대에, 우리가 감당할 몫을 남기고 있다. 이 일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이루어 가는 곳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히 임하시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