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KOSTA 성경강해


회복되는 하나님의 나라, 치유되는 자아.


Lordship 구원 (엡 5:21-6:9)


한 유명한 기독교 계 지도자가 솔직한 고백을 남겼다. “지난 40여 년 간 나의 믿음은 진정 실패였다. 회심이후 사람들이 내 삶에서 분명한 변화를 볼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난 변화를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실족하고, 넘어지고, 거짓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복음의 진리가 손상되었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지 못하고 있다.” 해마다 그리스도인의 숫자는 늘어나고, 회심 자들은 증가되지만 구원의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리스도인들은 많지 않다. 무엇이 문제일까? 존 맥스웰 목사는 ‘구원’에 대한 정의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로드십구원”을 참된 구원으로 정의한다.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할 마음이 없다면, 그분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 예수님을 ‘주님(Lord)’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용서받은 죄인 이상의 존재여야 한다.” 복음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성취한 구속의 사건이기 때문이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모략’에서 ‘바코드 그리스도인’들을 오늘의 그리스도인으로 비유했다. 바코드는 스캐너에게 물품의 정보를 줄뿐이다. 개 먹이 바코드를 과자에 붙여놓으면 계산대 스캐너는 과자를 ‘개 먹이’로 읽어버린다.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바코드 정보만 읽을 뿐이다. “나는 구원받았습니다” 바코드만 붙였을 뿐 그 내용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들어있지 않다. 바코드만 바꿔 붙여놓은 셈이다.
교회는 ‘구원’을 강조하지만 ‘구원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이란 단순히 죄의 용서와 구원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개인의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성육신 단계를 이렇게 설명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 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바울도 ‘로드십 구원’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죄로부터의 구원은 구원의 반쪽 교리다. 나머지 구원의 절반은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과 삶의 연출에 있다.

아프리카 콩고 선교회에서는 선교사 훈련과정에 세(침)례 고백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훈련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염소고기를 먹었음으로 세(침)례를 베푸노라” ‘염소 고기 먹기’ 풍습은 콩고 노예제도에서 비롯되었다. 어떤 노예가 자기가 섬기던 주인이 너무 잔인하고, 혹독하게 노예를 학대하면, 그는 도망쳐 다른 새 주인에게 간다. 구원을 요청 받은 새 주인이 그를 구해줄 의향이 있으면 염소고기를 함께 먹었다. 노예가 새 주인과 함께 염소고기를 함께 먹는 순간 과거의 옛 주인은 도망친 노예에 대하여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한다. 노예는 새 주인을 따라 새 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삶의 주인을 바꾸는 것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7-18). 죄의 종이었다가 의의 종이 된 신분변화가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떤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는지 새 피조물의 자각이 요구된다.


독재자들의 공통점은 동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점이다. 10여 년 전, 구 소련과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붕괴되었을 때, 레닌과 스탈린 동상이 수난을 당했다. 미?영 연합군이 바드다드 시내로 진입하는 순간, 사담 후세인 거대한 동상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세계에 생중계 되었다. 독재자의 동상을 철거하는 것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시작을 의미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북한에도 약 3만5천여 개의 김일성-김정일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 비용엔 동상철거 비용도 상당부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성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은 중요하다. ‘주’ ‘소유주’ ‘주권자’ 예수께서 우리 자신과 온 세계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심을 뜻한다. 내 영혼의 주님, 사회의 주님, 가정의 주님, 역사의 시간의 주님, 한국교회의 주님, 온 세상의 주님…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2:6).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를 주인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인가? 그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것을 뜻한다.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모든 인간관계를 지배한다.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14:6-9).


모든 사람의 주인이 그리스도이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날과 음식의 문제로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비판하고, 판단하고 업신여기자, 바울은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롬14:4).고 가르치고 있다. 주님은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주인이시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베소에서 모든 인간관계에 대한 사랑과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모든 인간관계의 머리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스티븐 닐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의해 인간의 모든 관계는 변화된다”고 가르친 것은 그리스도의 주권이 모든 인간관계에 머물기 때문이다.


1. 부부관계(엡5:22-3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엡5:32-33).
미국판 현모양처를 촉구하는 “항복하는 아내가 행복하다”는 책이 화제가 되었었다. 저자 도라 도일은 페미니스트로 바가지 긁는 전형적인 아내였다. 그러나 결과는 불행의 연속이었다. 파경으로 치닫는 결혼생활을 통해 도라 도일은 ‘항복하는 아내’의 결론을 얻었다. ‘바가지를 긁거나 논쟁하지 말고 남편이 원하는 일을 하라. 남편을 통제하거나 비판하지 말라. 남편이 동의하지 않으면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여 전사와 같은 모습을 직장에 두고 집으로 와라..’ 그 말들은 불행을 통해 깨달은 아내의 아름다움과 사랑이었다고 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하나님의 권위의 질서는 남편을 아내의 머리로 세우셨다(고전11:3). 하나님의 권위가 인정될 때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을 대하는 태도로 남편을 사랑하고 복종해야 한다. 아내의 역할과 위치가 지나치게 굴종 적인 과거 문화 유산이나, 낡은 보수주의적인 견해가 아니다. 서로의 위치와 역할이 분명하지 않은 ‘권위의 질서 실종’으로 인해 오늘 많은 가정이 이혼으로 치닫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남성에 대해 두 가지 꿈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델렐라의 꿈과 평강공주 꿈이다. 신데렐라 꿈을 가진 여성은 백마 탄 왕자가 유리구두를 들고 자기를 찾아와 주기를 바라는 여성이며, 평강공주 꿈을 가진 여성은 현재의 남자가 바보온달 같아서 자신의 헌신으로 그를 훌륭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 여성이다. 출세한 남자를 원하는가? 아니면 출세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원하는가? 남자를 통해 자기 욕구를 채우려는 두 성향에서 여성들의 남성관을 엿볼 수 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다. 남자들의 두 가지 꿈은 미스 코리아 형과 복부인형에 있다고 한다. 미인이냐? 아니면 경제력이냐? 에 목표를 두고 있다. 진정한 결혼생활의 가치와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권에서 찾아야 한다.


미국 코넬대학 인간행동연구소 신디아 하잔 교수 팀은 지난 2년간 남녀 5천명을 추적 조사했다. 그 결과, 가슴 뛰는 사랑은 18개월-30개월이면 사라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사랑의 감정’은 뇌의 화학작용으로, 남녀가 만나 2년 정도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 더 이상 화학물질이 생성되지 않는다고 한다. 화학물질을 상실한 뒤 독서와 생활에서 다듬어진 지성미와 교양미로 원숙한 아름다움을 가꿔나가는 것이 사랑을 오래 지속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 아름다움이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겸손과 믿음에 있지 않을까? 주님이 함께 하시는 부부의 관계는 언제나 아름다움을 잃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 부모와 자녀관계(6:1-4)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엡6:1).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


부모 순종엔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모든 것이 이미 약속되었다.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6:3). 인생의 성공과 건강은 모두가 추구하는 공통적인 소망이다.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고 존경하는 자녀들에게 두 가지 약속이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졌다. 우리는 부모공경에서 자신의 삶을 실현하는 비밀을 배워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를 통해 그분의 축복과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원자력 분야 세계적 석학 정근모 박사는 사람들 사이에 천재로 통한다. 서울대 차석 입학. 미국 미시간 주립대졸업. 24살에 플로리다대학 교수가 되고, 과기처장관을 두 번이나 역임했다. 정근모 박사는 “이 모든 것이 어머니의 기도와 신앙 안에서 생활한 결과일 뿐”이라고 짧게 대답한다. 그는 그의 저서 ?나는 위대한 과학자보다 신실한 크리스천이고 싶다?라는 책에서 공부 잘하는 7가지 방법을 말했다. 그가 첫 번째로 가르친 비밀이 ‘어머니의 기도와 잔잔한 미소가 힘이다’라고 고백한다.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정근모 박사의 인생을 만드시는 섭리의 통로가 되었다.


우리는 부모님을 주님의 권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주권을 소유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될 수 있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 두 번째 인생을 산다”고 했다. 부모와 자녀는 한 생명을 가진 운명공동체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 유전되고, 자녀들은 부모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부모의 존재가 자녀들의 인생의 한계가 되기 때문이다.
한 유대인 부부가 첫 아이에게 지어줄 이름으로 논쟁을 벌이다 랍비를 찾아갔다. 남편은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짓고 싶어하고, 아내도 자기 아버지 이름을 따라 이름을 짓고 싶어했다. 랍비가 물었다. “두 아버님 성함이 어떻게 되나요?” “두 분 다 요셉인데요” “그럼, 아무 문제가 없지 않나요?” 아내가 나서서 말했다. “아닙니다. 시아버님은 말 도둑이고, 저의 아버님은 정직하신 분입니다. 누구 아버지 이름 따서 지었는지 저희가 나중에 어떻게 알겠습니까?” 랍비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결론지었다. “그냥 요셉이라고 부르고, 나중에 이 아이가 커서 말 도둑이 될지, 아니면 정직한 사람이 될지 지켜봅시다. 그럼, 어떤 아버지 이름을 따른 것인지 자연히 알게 될 것 아니겠습니까?”


3. 사회생활 관계(6:5-9).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엡6:5-6).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엡6:9).

44개국에서 7만 명이 넘는 직장인들에게 강의한 탁월한 ‘인력 전문가’ 존 곤스틴박사는 “유럽기업들은 매년 매출액 1%를 기업 내 사람 사귀는 법에 투자한다”고 강조한다. 직장인이 직장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회사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상사나 동료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기업은 좋은 인재를 쉽게 잃고 만다. 무엇보다 중간 간부가 전략적으로 사고하지 못하면 조직의 안정이 어려워진다.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성취하기 위해 주님의 주권이 직장, 사회생활에서도 지배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배당을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생활을 중심으로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 율법주의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만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고, 만유를 유지하는 유지 주이시며, 만물의 소유주가 되신다(골1:15-17). 그러므로 주님의 주권은 제한된 예배당 뿐 아니라 인간의 모든 사회조직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서울대생엔 ‘나 홀로 족’이 많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한 최모 씨(28)는 1년도 안돼 직장에 사표를 내고 말았다. 조직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어 결국 직장을 포기하고, 사법고시를 준비중이다. 이기춘 서울대 총장은 “이제는 감성지수, 도덕지수가 높은 졸업생을 배출해야 한다. 대학에서 인성과 대인관계 증진을 위한 리더십개발 프로그램을 실시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겠다”고 강조했다. 대인관계 능력 부족은 사회생활에서도, 주를 섬기는 제자의 삶에서도 결국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과 개인적인 깊은 고민은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할 때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주권이 세상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다.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은 세상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요일2:15-17)고 말씀하시고,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3;16)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세상의 탐욕과 쾌락주의, 물질주의를 경계하고, 세속적 가치관을 버려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세상을 버려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세상에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을 자기목숨을 버리기까지 사랑해야 한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요17:11)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주님께서는 세상과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관계를 위해 깊이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선교사들이다. 우리들이 주님을 섬길 장소는 예배당 뿐 아니라 세상이어야 한다.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의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우리들의 삶의 공간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여야 한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우리 몸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며, 우리 몸이 가는 곳이 어디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성소가 되며, 우리는 그 장소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의 성전을 손상시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경고하셨다.


뉴욕 셔틀버스 운전사 모임에 고든 목사가 참석했다. 한참 교제하다가 운전사 한 분이 “우리는 겨우 말 못하는 버스를 끌고, 맨해튼 섬이나 왔다 갔다 할뿐인데 목사님은 여러 나라 다니면서 말씀을 전하시니 부럽습니다.” 자신들의 처지를 한심스러워하는 운전자들에게 고든 목사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용하기를 원하신다. 버스를 운전하기 전에, 빈 버스를 향해 이렇게 말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앞으로 8시간 동안 이 버스를 성소로 선포하노라. 이 버스를 타는 사람들에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을 선포하노라.’ 그리고 버스 운전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 뒤 고든 목사는 셔틀버스 운전사들을 만날 때마다, “버스를 운전하십니까? 성소를 운전하십니까?” 하며 반갑게 항상 질문해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버스 운전사로부터 은혜로운 간증을 듣게 되었다. 한 남자가 정류장 아닌 곳에 내려달라며 우기고, 정중하게 양해를 구하는 자신에게 무례한 태도와 험악한 말을 하는데, 자신은 성소를 운전하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야하는 사명이 있기에 즐겁게 참았다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반응했을 자신이었지만 그날은 다음 정류장에서 투덜거리며 내리는 그 신사에게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제 버스를 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하자, 운전사를 잘 아는 한 여자 승객이 “정말 많이 변화되셨군요” 하며 칭찬하더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성소이며, 우리의 하루하루는 주님께 드리는 예배의 삶이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세주와 주인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주권을 깨달은 사람들만이 평화의 인간관계를 이룩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하심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도 도마처럼 부활하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꿇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시니이다” (요20:28) 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의 종들이 될 때 그리스도의 주권이 높임을 받는 진정한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다. 에드먼드 버크는 “참된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의 복종. 하나님말씀에 대한 믿음, 그리고 하나님을 닮아 가는 모방에 있다”고 정의했다.


우리는 날마다 그리스도의 주권을 인정하는 훈련을 해야한다. 무엇보다 인간관계가 그리스도의 주권에 따라 변화되어야 한다. 부부와 부모와 자녀, 직장생활의 인간관계에도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시고 주인이 되시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