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그룹의 종류는 다양하다. 그리고 각 그룹의 종류만큼 그 초점도 매우 다양하다. 예를 들면











a. 돌봄(care) – counseling/ mentoring/shepherding/intensive care 그룹 등

b. 친교 (fellowship) – cooking/hospitality/ decorating/ activities 그룹 등
c. 집중적인 영성 훈련– prayer, QT, serving 그룹 등
d. 리더 양육(discipleship) 그룹 등


그러한 다양한 소그룹의 종류 중 특별히 새로운 리더 양육을 위해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소그룹 중 하나는, 변증의 능력을 공급해 주는 (equipping) 의도된 변증 소그룹이다.


이 변증 소그룹은 소그룹을 통한 재 생산 그리스도인 양육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소그룹 중 하나로, 소그룹을 인도하는 리더는 반드시 이 그룹의 양성을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하는 그룹이다. 왜냐하면 오늘 날 영향력 있는 크리스챤의 리더쉽의 하나는 복음에 대한 간결하면서도 분명한 1분 응답의 변증(Christian Apologetics) 능력에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이 영향력이 약화된 이유 중 하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 대한 체계적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데서 기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2월 11-12에 시카고 외곽에 위치해 있는 윌로우 크릭 컴뮤니티 교회에서는 Cosmic Fingerprint 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신앙과 과학의 대화를 위한 4주 변증 씨리즈 중 첫 시간으로 ” New Discoveries of Design in the Universe” 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주 강사로 초빙된 문리 학자이자 천문학자인 Hugh Ross 박사는 자신은 본래 전혀 신앙이 없던 자 (religious ground zero)로서 우주의 생성과 그 디자인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7살부터 가지고 있었고, 이 관심이 그의 전공으로 이어져, 우주의 생성과 그 디자인에 대해서 연구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여러 종교에 기록되고 있는 우주의 생성과 기원의 내용들을 과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시험해 보았다. 그 결과 놀랍게도 성서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이 이 역사의 창조자시고, 오늘도 살아 우리의 우주와 지구, 그리고 우리의 삶의 한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분, 참 하나님임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그러한 확신은 그에게 신앙의 첫걸음을 걷게 하였고 그 이후 하루 2시간씩 2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하나님과 성서, 우주와 인간의 삶, 그리고 성서 안에 계시된 하나님과 인간의 삶에 대해서 연구하였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리고는 그의 연구의 결과들에 대해서 설명을 덧 붙이고 공개 질의 토의 응답 시간을 가졌다.


놀라운 사실은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62명의 과학자들과 이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원근각처에서 약 3200명에 몰려들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휴 박사에게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졌고, 휴 박사는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게 과학적인 논리를 가지고 성서에 나타난 우주와 하나님의 계시, 하나님의 디자인을 설명해 냈다. 그 이튼 날 이어진 구체적인 웍샾에도 과학자들과 우주 과학에 관심있는 520명의 사람들이 등록을 하여 과학적인 논리 안에서 만난 하나님에 대해 함께 연구하였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www.willowcreek.org 를 참조하라.)


놀랍지 않은가? 한 과학자의 지식과 신앙이 이렇게 수없이 많은 과학자들과 과학적 사고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세미나를 듣고 태도가 변화된 한 중국인 무신론자의 반응이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는 좀처럼 설득이 되지 않는다고 늘 말해 왔다. 그런데 이 강연 후 이 강연이 자신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고, 참 좋았다고 하면서 어느 정도 이해되어진다는 믿음의 열린 고백을 하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일은 이 강연 이후 한 사람이 예수 믿기로 결정을 해 수요예배에서 한 사람이 세례를 받으러 나온 사실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맞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도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각각 다른 신앙의 여정을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먼저 감정이 움직여야 믿음이 생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으면 감정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사람의 성격이 삐뚫어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해 놓으신 질서 가 그렇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둘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창조 하실 때 우리 삶 가운데 감성적인 차원(emotional dimension)과 지적인 (intelectual Dimension)차원을 동시에 주셨다. 그렇기 때문이 우리들의 감성적인 차원이 먼저 채워지면 그 다음은 지적인 차원의 필요를 느끼도록 만드셨고, 반대로 우리들의 지적인 차원이 먼저 채워지면 감성적인 차원의 필요를 목말라 하도록 우리를 질서지워 놓으셨다. 따라서 이 둘의 차원은 서로 떨어져 있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의 차원인 것이다. 그러기에 먼저 이성적으로 지적으로 이해가 되어져야 믿음에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이 여전히 많은 것이다. 그 중국인 무신론자도 그렇고 이 강연을 들은 후 믿음의 자리에 나온 분도 그 가운데 한 명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그리스도인의 1분 응답 능력은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능력에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부분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매우 약하다는 사실이다. 오랜 기간의 신앙 경험을 가지고 있어도, 감성적인 측면의 신앙적 토대는 강하지만 체계적인 이론적 신앙(solid foundation of Christianity)이라든지, 설명을 통한 다른 사람의 설득면에서는 매우 약하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변명의 응답은 ‘뭐, 신앙이라는 것이 말로 해서 아나요? 그냥 삶으로 보여 주어야 되는 것이지요.!’ 하고 이야기 한다. 맞다. 백번 지당한 말이다. 삶이 병행되지 않은 신앙은 능력이 없다. 하지만 문제는 나에게 다른 사람에게 복음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혹은 다른 사람들이 제기하는 신앙적 문제나 질문에 대해서 대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의 문제이다. 주부는 주부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사업가는 사업 측면에서, 천문학자는 천문학자대로, 문리 학자는 문리학자대로, 신학자는 신학자 대로, 경제학자는 경제학자대로, 의학자는 의학자 대로—각자의 영영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삶, 우리의 사업, 우리의 연구 영역속에서 역사하시는 분으로, 이분이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증거할 수 있어야 복음이 영향력 있게 전하여 지는 것이다. 물론 감성적 차원에서의 믿음이 잘못된 신앙은 아니다. 하지만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섬기는 데에 있어서, 변증의 능력은 매우 중요한 부분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가 변증이라 하면 매우 어렵게 생각하지만, 다른 쉬운 이야기로 바꾸어 말하면, 이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론적 정리라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그러면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우리가 성경을 믿는다. 그러면 그 성경이 어떤 책인지. 등등 우리가 믿는 바를 요약하는 것이 변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면에서 변증은 나의 신앙의 기초를 분명히 그리고 튼튼히 하는데 필수적인 것이다.


사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수없이 많이 제기되는 질문들 가운데 서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 많은 질문을 받는다. 꼭 기독교인이 되어야만 구원을 얻게 되나요? 믿음은 개인의 신념 아닌가요? 꼭 교회 나아가야만 구원을 얻나요? 술과 담배를 하면은 죄를 짓는 것인가요? 이러한 질문들은 신앙 공동체에는 속해 있으나 믿음의 혼돈에 있는 사람들도 역시 제기하는 질문들 중 하나이다. 혹은 믿음의 상처로 신앙 공동체를 떠나 있는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교회가 왜 이렇게 많아야 하는가요? 한 동네에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제사를 드리는 것이 죄인가요? 왜 그렇게 잘 믿은 사람에게 그런일이 생길 수 있지요? 목회자가 그럴 수 있나요? 등등—


어떤면에서 우리들이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주어지는 설교, 그리고 성경공부, 상담도 변증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예수님이 누구신지, 성령이 어떤분인지, 교회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혹은 위에서 제기된 질문들에 대해 하나 하나 응답이 주어진다. 이 모든 것들이 변증의 한 분분으로 사실상 우리들의 믿음을 분명하게 가지도록 해 온 것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들 스스로는 늘 변증의 능력이 부족한 것으로 느끼는가? 오랜 세월의 믿음의 연륜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인들이 변증의 능력에 스스로 부족한 것으로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생각해 보자. 주로 어떠한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의 변증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자신이 없어지는가? 언제 주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변증의 능력의 부족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가? 첫째, 가까운 사람들에게 전도할 때이다. 둘째, 하나님 존재에 의심을 품거나 신앙생활이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이다. 셋째, 학생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논리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교회 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이다.


이 모든 상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주 접하는 상황이다. 이 상황에서 우리들은 무엇인가 분명하게 말해주고 싶은데 그 분명한 근거에 대한 설명을 어디서 어떻게 찾아 보여야 할지 모를 때 당황하게 됨을 경험한다. 이 당황하는 경험의 이유의 기초를 자세히 들여다 보라. 우리들이 알고 있는 복음의 말씀이 분명하게 체계가 잡혀져 있지 않고, 안개처럼 뿌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들의 응답은 주로 개인적인 신앙적 경험담으로 대치된다. 많은 경우는 신앙에대한 이성적 논쟁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개인의 신비한 신앙적 경험으로 대처하지 못해,그냥 침묵하기가 일수이다. 그리고 실제로 본인 스스로도 이에 답답해한다.


왜 그렇게 우리에게 신앙의 내용 자체가 안개속에 서 있는 것처럼 뿌연가? 왜 이성적인 질문도 신앙적 경험의 응답으로만 그 대답이 주어지는 것인가? 그 분명한 이유 중 하나는 신앙에 대한 체계 (solid foundation of Christianity)가 세워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늘 자신의 신앙이 약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복음의 변증에 대한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복음을 전하는데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변증의 능력이 부족한 중요한 이유 중 또 다른 이유 하나는 복음을 체계화하려는 의도적인 환경의 부족 (lack of intention)이다. 변증의 능력은 의도적인 차원 (intentional dimension)에서 얻어지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변증의 능력은 의도성을 가지고 집중 개발하지 않으면 이 능력은 자연스럽게 개발되지 않는 부분에 속하기 때문이다. 에스 칼레이터는 본인이 가만히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아래 층(lower level)에서 다음 층(high level)으로 올라간다. 이처럼, 믿음의 성숙에 있어서도 믿음의 시간적 길이를 통해서 성숙해 가는 것이 있다. 그러나 반대로 믿음의 시간적 길이와는 상관없이, 의도적인 노력 없이는 아래층에서 다음 층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신앙의 성숙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변증의 능력인 것이다. 이는 집중적인 관심과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필요하다. 그러기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변증의 능력에 늘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바로 변증을 할 수 있도록 의도적인 차원에서의 준비된 환경에 대한 리더의 투자가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