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A: 1. 질문자의 겉을 보지말고 그 마음가운데 있는 상처를 돌보아 주세요.
2. 그리고 할 수 있는 적절한 대답을 해 주세요. 그럴 때 영적으로 새롭게 성장하는 기회가 열려지게 됩니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우리 집의 첫째 아이 하일이를 학교에 데리고 가야 하는 분주한 가운데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렸다. 한국에 계신 아버지로부터의 전화였다. 전화 소리는 다급한 마음이셨다. “미국에 전쟁이 났다며? 너는 괜찮냐?” 갑작스런 아버지의 염려 전화로 어리둥절한 나는 “여기 전쟁이 안 났는데요?” “무슨 소리야. 아니 지금 한국 TV는 미국에 전쟁이 나서 계속 방송이 되고 있는데…”


한국에서 걸려온 아버지의 전화에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한 나는 TV를 켰고, 그때서야 World Trade Center가 테러리스트들이 납치한 비행기와 함께 부딪히는 참담한 현장을 보게 되었다. 너무 어이가 없고, 실감나지 않는 장면이었다. 그러던 중 또 다른 한 비행기가 이번에는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World Trade Center로 날아가 부딪히는 장면을 보게 되었고, 그러더니 잠시 후 이번에는 World Trade Center가 폭삭 무너져 내렸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참사의 현장과 피와 눈물, 두려움으로 가득한 두려워하는 뉴욕 시민들의 모습은 너무나도 실감나지 않는 현실이었다. TV로 방영된 빌딩을 향해 날아드는 민간 항공기의 모습, 빌딩과 부딪히면서 비행기가 빌딩 안에 들어가 터지는 모습, 빌딩이 얼마나 큰지 비행기가 돌진하여 부딪힌 그 자리가 그저 자그마한 칼의 흠집처럼 조금 찢어진 모습, 그리고 그 안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연기, 그러더니 갑자기 빌딩이 어이없이 재처럼 그냥 푹석 내려않는 모습… 시카고에 살고 있는 내게, TV를 통해 보는 장면이 정말 실감나지 않았다. 마치 영화 ‘다이하드’의 한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던 가운데 또 다른 전화가 요란하게 울렸다.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였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예배를 드린다고… 그리고 그룹 멤버들에게 전화하여 함께 추모와 시국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게 하라고…’


그 날 저녁 특별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문명, 종교, 테러, 목적, 인간, 생명, 삶 등등 다양한 삶의 현장 문제들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그리고는 만일 이 순간 내가 예배를 준비했다면 이러한 참사의 현실 속에서 어떻게 예배를 준비할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쉽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교회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큰 예배당 밖에까지 회중들로 가득 메워진 가운데 예배가 시작되었다. 특별 예배는 담임 빌 하이빌스 목사를 중심으로 2명의 교육목사들과 함께 3단계 예배로 1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상담의 예배였다. 먼저 3-4명의 옆 사람과 함께 World Trade Center 가 무너지던 그 시간에 어디에 있었는지, 그 참사를 보면서 무엇을 느끼는지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 옆 사람과 함께 그때의 느낌을 나누려고 할 때 사실 나는 할 이야기가 없었다. ‘다이하드’의 한 장면과 같았다고 할 수 도 없고, 그저 나는 “이것이 사실인지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그룹에 있는 다른 3 사람 모두 다 너무 너무 가슴 아파하고, 슬퍼하면서, 한편으로는 분한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와 너무나도 다른 반응의 모습이었다. 예배는 이렇게 자신의 분(anger)과 아픔을 나누도록 하고 함께 이 아픔에 대한 주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기도하는 순서로 이어졌다.


두 번째 20여분은 교육의 예배로 이어졌다. 내용은 한 마디로 “자녀들 앞에서 말조심하라” 는 것이었다. 오늘 일어난 테러와 참사에 대해서 우리가 어른으로서 혹은 부모로서 아직 성숙하지 못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자녀들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그들의 미래와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는 지혜의 가르침이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만일 단순히 회교권에서 이 참사를 일으켰다고 이야기하면 그들이 회교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원수처럼 적대시 할 수 있는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 언어에 조심성과 그 영향력을 생각하도록 교육했다.


세 번째 20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리더의 자세와 역할에 대한 예배였다. 이제 우리가 예배를 마치고 교회 밖으로 나가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많은 사람들로부터 질문을 받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것이 기독교와 회교의 종교 전쟁 아니냐?” “종교가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인 종교의 아집이 사람의 생명을 죽이는 것 아니냐?” “이렇게 자기 종교를 위해 전쟁하다 죽으면 순교냐?” “이러면 구원 얻는 것이냐?” “기독교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데 저 죽은 가족들은 가만있어야 하는 거냐?” “믿어도 광신적으로 믿으면 안되지 않느냐?” “보복은 하나님 손에 있다고 하는데 보복해야 하냐, 아니냐?” 등등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개인의 신앙이 성숙 하냐, 아니냐와 상관없이, 땡땡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교회에 다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받게 되는 질문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본의 아니게 그리스도인의 대표자가 될 것이고, 이러한 비판이 섞여있는 가시 같은 물음을 사람들이 제기하게 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자세를 취하고 응답을 하겠느냐는 것이 이 예배의 내용이었다. 여기서 주어진 권고는 “비판적으로 공격하는 사람의 질문 겉 표면을 보지말고 그 뒤에 있는 상처를 보라” 그리고 “치유하는데 더 초점을 맞추라”였다.


이 1시간의 예배 후 돌아 나오는 나의 마음은 깊은 감동으로 솟아 오른 기쁨이 가득 하였다. 내가 이러한 참사의 현장가운데 서 있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그리고 앞으로 내가 처신을 어떠한 방향으로 어떻게 행동해 나아가야 할 지를 알게 해 준 안내자의 예배고, 동시에 나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숙한 자리에 설 수 있도록 인도한 영감 있는 예배였다.


이 예배를 드리고 돌아오는 내게 가슴속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방향성’ 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은 영적 성숙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좁은 의미에서의 리더, 넓은 의미에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역할 중 하나는 ‘방향을 잡아주는 것’ 이었다. 주어진 오늘의 현실의 구체적인 문제 속에 혼돈 되어 있거나, 근심 속에 쌓여 있거나, 아니면 편견 속에 쌓여 있거나, 믿음의 삶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방향을 알려주어 바른 길을, 주님이 주시는 축복된 은총의 길을 잘 갈 수 있도록 방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며 더 나아가 그것을 통해 그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된다는 가슴 벅찬 영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 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그리고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하는 제기된 물음을 9.11 윌로우 크릭 특별 예배가 던져준 영감을 토대로 이 문제 해결에 접근해 보자.


일반적으로 위에서 제기된 질문처럼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의도적인 가시의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전혀 다니고 있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면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마음에 그들의 이야기를 웃고 지나가면서 무시(ignore)해 버리거나, 반대로 반박을 하면서 논쟁 할 준비가 되어 있거나 상대방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물음을 던지는 주체가 교회에 갈 마음은 전혀 없으면서 비판을 위한 비판하는 사람들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이들의 많은 사람들이 이미 교회에 대한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거나 편견 속에 갇혀진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반면에 이미 교회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는 경우는 그의 마음에 무엇인가 상처로 그 문제를 경험하고 있거나 그러한 문제를 경험한 후 그 문제가 해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 문제 제기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하고 처신해야 할까?


첫째는 그들의 상처를 돌아 보라.


문제 제기를 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이미 그들 마음에 있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나쁜 이미지 와 편견, 그리고 상처 경험은 믿음에 있어서 일종의 ‘바이러스’라 할 수 있다. 이 바이러스는 점점 그들을 영적으로 병들게(distort) 만든다. 그리고 나서 그 영적인 병이 서서히 밖으로 표출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공격적이고, 비판적 가시를 가진 문제제기로 나타난다. 만일 비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공격을 하면 원래 믿음이 없으니까, 혹은 아직 모르니까 하고 넘어갈 수 있는데, 리더를 가장 당황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 좋았던 사람들이 그리고 공동체에서 아주 성실했던 사람들이 그러한 질문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이다. 실제로 그들의 문제 제기가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부정적 파장이 얼마나 큰 지 모른다. 그런데 더욱더 큰 문제는, 대다수 비판적 질문을 던지거나 가시 있는 물음을 가지고 공격하는 사람들 대다수가 자신이 경험한 상처는 드러내지를 않기에, 리더들이 이 문제 제기의 핵심을 빨리 파악해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개인적으로 잘 아는 가정이 장시간의 자동차 운전을 하고 시카고로 여행을 와서 우리 집에 며칠 머무르게 되었다. 며칠 즐겁게 머물고 돌아가려는 날 아침에 그 형제가 갑자기 허리가 아프고, 힘을 전혀 허리에 주지 못해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화장실을 가려해도 허리에 힘을 줄 수 없어 가서 앉을 수도 없었다. 마사지를 해주면서 시간이 가면 조금씩 좋아지겠지 하고 지켜보았지만 시간을 두고 보면 볼수록 점점 악화만 되어 갔다. 그래서 아는 의사에게 연락을 해, 오늘 아침 갑자기 몸이 이렇게 되었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 의사가 이야기하기를 “모든 병은 갑자기가 없어요. 이미 그 전에 내재되어 있던 것이 밖으로 이제 나왔을 뿐 이예요” 라고 하였다.


우리가 볼 때에는 갑작스러운 것처럼 보였던 그 육체적 병의 문제도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그 의사의 이야기처럼 영적으로 가시의 문제를 가지고 온 사람의 문제 역시 이미 그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곯은 상처가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문제를 제기하는 대상이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간에 그 표면적 문제를 응답하기 전에 그 상대방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먼저 손을 뻗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들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일까?


1 단계는 기본적으로 잘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부부 싸움에 있어서 대화를 안 하는 것이 제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고 상담 가들은 경고를 한다. 따라서 부부 싸움을 해도 말하면서 싸우도록 권하다. 말하지 않는 가운데 갇혀 있으면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이 없다. 리더의 역할은 바로 그 상처받은 심령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실 공간을 만들어 드리는 중간 다리 (bridge)역할을 하는 것이다. 문제 제기자가 말하는 가운데 성령이 치유하시기 시작한다. 문제 제기자가 이야기를 하다보면 실제로 속에 담아 놓았던 이야기를 충분히 하게 된다. 이때는 리더 자신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그의 이야기 가운데 성령이 역사 하신다. 답변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충분하게 들어 주라. 하지만 만일 내가 그 사람의 이야기와 상처를 들어주지 못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거나 공격한다면 그 사람에게 성령이 역사 하실 수 있는 자리를 내가 막아 놓게 됨도 기억하라.


2 단계는 그 이야기에 공감을 표현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그의 아픔을 이해해 주는 것이다. 함께 그 상황을 아파하는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나도 처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상처를 혹은 그런 반응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공감의 표현이다. 그런데 많은 부분에 있어 이 부분에 리더들이 실패를 한다. 일단 상대방이 믿음의 문제, 혹은 공동체의 문제를 제기하면 리더는 혹은 그리스도인들은 기분이 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리더십과 혹은 자신의 공동체의 명예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심하면 어떤 사람은 들으면서 얼굴까지 상기되고 가슴에서 불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이야기는 들어도 무엇인가 상대방의 이야기의 모순이나 허점을 찾는데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는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기보다는 대부분 논쟁으로 빠지게 되고, 결국 그 상대방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더 이상 내 놓지 않도록 마음의 문을 닫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눈을 잘 쳐다 보라. 그리고 대화의 중간 중간 공감의 표현을 해 주라. 예를 들면 “정말 힘들었겠네요” “정말요?” “저도 가슴이 답답하네요” “저도 느껴요”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되었어요” “그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풀어야 할 부분이에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제가 책임을 느껴요” 등등. 인정할 것은 인정하라. 그리고 상대방의 이야기 속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혹은 과장하여 표현하는 것이 있어도 넘어 가라. 왜냐하면 그 과장의 초점은 문제를 강조하는데 있기에 그 문제를 치유하기 시작하면 그 문제도 사그라지고 만다. 왜 그것을 과장 하냐 하고 파고들면 오히려 더 상황을 악화시키게 된다.


3단계는 그/그녀의 아픔을 끌어안고 함께 기도하라. 그리고 그/그녀의 아픔을 그대로 주님께 드리라. “저도 느껴요” “제 마음도 참 아프네요” 등등의 공감을 표현한 후에 만약 상황이 허락을 한다면 “ 괜찮으시면 제가 잠시 기도해도 될까요?” 하고 물어보고 상대방의 상처를 놓고 기도하라. 예를 들면 “주님, 누구 형제/자매 님의 아픔이야기 들으셨죠? 이야기로 나누지 못한 저의 마음 한가운데 있는 많은 아픔들 하나님 아시지요? 간절히 소원하옵기는 저의 아픈 가슴을 치유해 주세요. 그리고 예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일어나 승리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끄러운 모습, 저 자신부터 비로소 변화시키도록 지혜와 용기를 주세요. 오늘 우리의 만남을 주님이 계획해 주셨음을 감사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두 번째로, 날카로운 가시를 가진 비판적 문제 제기에 대한 처신은 적절한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숙으로의 안내이다.


가능한 적절한 응답은 믿음의 갈등을 많이 해소 시켜 줄 뿐 아니라 새로이 영적인 성장을 이루게 한다. 기독교 교육학자 존 웨스터 호프 3세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성장 단계가 기본적으로 4단계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단계는 경험적 단계이다. 교회에 처음 온 사람이 어떤 사람들이 이 교회를 다니는지. 이 교회 목 사가 설교는 잘하는지, 성가대가 잘하는지, 나를 알아주는지 등등 교회를 처음으로 경험하는 단계이다. 교회 좌석으로 본다면 맨 뒷줄에 앉아 교회를 쳐다보고 탐색하는 상태라 할 수 있다.


둘째 단계는 귀속적 단계이다. 교회의 맨 뒷줄에 앉아 교회와 목사, 성가대, 사람들을 탐색하면서 나쁘지 않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맨 뒷줄의 좌석에서 조금씩 앞으로 나와 앉게 되고, 교회 부서든, 아니면 활동자리에 참여를 하게 된다. 심지어는 임원까지 맞아 적극적으로 섬기게 된다. 교회가 익숙해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셋째 단계는 이성적 단계이다. 이렇게 교회에 익숙해져서 여러 모양으로 참여하여 섬기다 보면 외적, 내적이든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개인적인 삶의 문제와 더불어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된다. 예를 들면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많이 지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책임감을 가지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적어지고, 도와주지도 않았으면서 와서 사람들이 불평만 늘어놓을 때, 지도자가 격려에 인색할 때, 기획 안이 지도자에 의해서 거절될 때 등… 이러한 외적 문제와 더불어 개인적 삶의 문제까지 겹치면서 영적인 시험이 찾아오게 되고, 그리고는 근본적인 신앙의 질문을 하게 된다. “내가 정말 구원의 확신이 있어 이렇게 열심히 섬기는 것인가?” “믿음이 무엇인가?” “교회 섬김이 믿음인가?” “교회가 그럴 수 있는가?” 등등 수없이 많은 신앙의 근본적 물음이 제기된다.


그런데 웨스터 호프 3세에 의하면 미국 교회의 젊은이들이 이 단계에서 대답을 얻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 현재 미국교회는 허리 없는 호리병의 모양과 같은 교회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넷째 단계는 고백적 단계이다. 그러면서 웨스터 호프는 이 이성적 단계에 교회가 응답할 수 있다면 사람들의 믿음은 근본적인 믿음의 회의 질문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적어도 주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신앙의 문제에 흔들리지 않는 고백적 단계에 들어서기 시작한다고 이야기한다.


웨스터 호프 3세의 이론은 수없이 많은 신앙의 성장 이론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 면에서 모든 사람들의 신앙성장 변화가 그의 이론처럼 다 동일할 과정을 거치게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고백적 단계에서도 여러 가지 신앙적 단계가 나타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기초적으로 그의 이론은 초신자들이 교회에 적응해 적어도 환경으로 인해 근본적인 구원의 확신이 흔들리지 않는 안정된 신앙의 기초 단계로의 변화 과정을 체계화하는 점에서 어느 정도 타당성을 주고 있다.


존 웨스터 호프 3세가 그의 이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성적 질문은 그 문제 제기자의 신앙을 한층 더 성숙한 길로 인도 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거나 반대로 교회 공동체를 떠나게 하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리더는 제기되는 가시 같은 질문들에 대해 피하거나 대적(against) 하기보다는 겸손하면서도 적절한 응답(confrontation)을 할 준비도 필요하다. 상한 마음을 돌아보는 데서 한 발자국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 응답을 통한 영적인 성장(spiritual transformation)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성적인 단계의 질문에 대해서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질문에 답을 줄 때 정확한 답을 줄 수 있는 문제도 있는 반면에 너무 큰 문제 (big question)들 일 경우는 답을 주어도 답이 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를 들면 “왜 그리스도인이 잘 되어야 하는데 고통을 받나요?” “ 왜 새벽기도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나요?” “왜 선한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악을 만드셨나요?” 그런 면에서 리더는 그 질문이 어느 범주 안에 들어 있는가를 먼저 생각해야한다. 가장 기초적으로 이 질문이 상처에서 나온 질문인가? 둘째: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인가? 셋째: 대답을 해 주어도 답이 시원하게 되지 않는 질문인가? 등의 간단한 범위 안에서 판단을 해야한다.


중요한 것은 상처 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상한 마음의 상처를 안아주고, 어루만져 주고 기도해 주는 것이 더 해답인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응답은 오히려 변명으로밖에 혹은 상처난 사람이 잘못 이해했다는 변론밖에 결과가 나오지 않게 된다. 그럴 경우 상처를 더 깊게 만들게도 한다. 만일 제기한 질문이 간단한 지식적 문제일 경우는 명확한 답을 주면 쉽게 해결이 된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르는 경우는 “나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주면 된다. 그런데 만일 제기된 질문이 대답하려 해도 대답이 되기 어려운, 대답을 해 주어도 납득하기가 쉽지 않은 큰 질문(big question)일 경우는 “Big Question 에 Small Answer를 준다고 해서 그 답변을 채워 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경우는 지극히 개인적 입장에서의 내가 개인적으로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 이야기를 간증으로 하는 편이 더 낫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왜 이렇게 교회가 많지요? 천주교처럼 한 지역에 하나씩만 있으면 될 텐데요…” “왜 그렇게 교인들이 싸움을 많이 하나요? 교회 다니면 무언가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질문들을 분석할 때 어느 범주에 드는가? 상처가 있는 질문인가? 간단히 정보를 요구하는 궁금해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대답해도 대답이 시원하게 들리지 않는 큰 질문인가? 사실 이러한 질문은 상처가 있는 질문인 동시에 대답도 어렵고, 대답해도 납득하기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먼저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상처를 안아 주는 것이 중요하고, 그리고 나 자신이 그 문제를 풀 수 있었던 경험과 간증으로 하는 편이 오히려 더 좋다.


나의 경우는 이렇게 대답을 하곤 했다. 나 역시 그러한 질문을 신학교 다니고 있던 86년도에 가지게 되었다. 그때 당시 한참 잠실과 가락동의 아파트 단지들이 개발되고 있었을 때 이었는데 어느 날 친구 집에 갔다가 밤에 산책을 나와 주위를 돌아보는데 조금 과장해서 근 100m 안에 빨간 십자가가 14개가 있었다. 심지어 어느 교회는 1층 교회 2층 다른 교단의 교회 그리고 지하는 유흥업소였다.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집에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는 얼굴이 상기가 되어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때 아버지가 가만히 듣고 계시더니 말씀을 하셨다. “이규야! 너는 신학생으로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시각을 가져야 하지 않겠냐? 너는 이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젊은이들의 대학가 앞에 가득 메워있고, 그것도 모자라 늘어만 가는 유흥업소와 창녀촌에 대해서는 한번도 비판을 한 적이 없었어. 지금 네가 비판하는 것은 교회가 교회 된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지, 만일 교회가 교회된 사명을 잘 감당하면 그러한 교회는 이 땅에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겠냐?”


이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 순간 이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그 당시 나는 신촌 로터리를 중심으로 있는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서강대학교, 홍익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는 신수동이라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그 동네는 유흥업소와 창녀촌, 그리고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 우리 동네 가정집을 사서 룸 살롱으로 바꾸고 있는 상태였다. 아버지의 말씀은 나의 마음에 내 편견을 볼 수 있게 만드신 설득력 있는 답변이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러면 왜 그렇게 교인들이 쌈을 잘 하냐? 차라리 세상 사람들은 싸움을 하더라도 술 먹고 바로 푸는데… 교인들은 한번 터지면 끝이더라!” 하면서 다시 공격을 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환자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오늘 교회도 죄인을 위해 있는 것이야. 교회는 죄인의 공동체지. 사실 그리고 의인은 하나도 없어. 그리고 사실 성질이 더러워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든 도둑이든 강도든 그들이 교회에 마저 올 수 없다면 어디서 그들의 삶이 변화 될 수 있겠니?” 하셨다. 그리고는 “그런데 죄인들이 교회에 찾아오자마자 바로 바뀌면 그것처럼 좋은 것이 없지만 어디 그러냐?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이 태어나자마자 돈 만원을 쓰지 못하고, 칼로 사과를 깎지 못하듯이 시간과 때가 필요한 거야. 성령께서 그들에 맞게 때에 따라서 새롭게 하시지.”


아버지의 이러한 적절한 답변은 당시 신학생인 나의 비판적 고민을 새로운 영적 성숙의 길로 인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거나 그와 같은 문제를 이야기했을 경우 아버지와의 대화에 대한 나의 간증은 정답은 아니었을는지 몰라도 실로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감했던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가운데 알게된 분명한 것은 그룹 원들이든 믿음의 경험이 없던 사람이든, 혹은 상처 난 그리스도인이든 그들이 제기하는 비판적인 질문들은 성령께서 그들을 새로운 영적인 성숙의 자리로 도약하도록 허락하여 주신 기회임을 리더는 보아야 한다. 이때 리더의 할 역할은 바로 그러한 성령이 새롭게 만지시고 빚으시고 계시는 그 환경을 겸손히, 지혜롭게 잘 응답하여야 한다. 그래서 그 형제/자매로 하여금 새로운 영적 차원의 자리에 서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영적인 변화와 성숙은 모든 순간에 일어난다. 예배를 드릴 때도 기도를 드릴 때도, 말씀을 공부할 때도, 부흥회에서도, 등등 성령의 역사는 어느 순간에 제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것은 영적 성숙을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어느 순간에 “날카롭고, 가시 같은 비판성 질문을 가진 형제나 자매가 다가올 경우는 오히려 그들을 불편해 하고, 마치 불평분자인 것처럼 취급하는 경우가 많다. 존 웨스터 호프 3세의 지적처럼 이 단계는 새로운 영적 성숙을 위해 누구든지 지나야 하는 관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성령께서 그 형제/자매를 영적으로 더욱 굳게 세우셔서 동역 하시려는 계획이요, 그 다리(bridge)로 나를 선택하여주신 축복의 기회인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나의 복음의 동역 자로 붙여주셔서 나의 복음의 사역을 더욱 열매 맺게 하시는 기회주심을 보아야 한다.


지금 누군가 날카로운 그리고 가시 있는 비판의 질문을 던지고 있나요?
1.문제의 분별을 위한 영 분별의 능력을 위해 기도하세요
2.상처 난 마음의 문제는 상한 마음을 안아 주세요. 아픔을 같이 하세요. 그리고 그 상처를 주님께 드리는 기도를 드리세요.
3.간단한 지식의 문제는 분명하게 그 근거를 찾아 알려 주세요. 만일 현재 모르면 “나 도 그 질문이 궁금했는데…” 하면서 나도 물어봐서 알려 주겠다고 대답하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알려 주세요.
4.Big Question에 Small Answer를 주지 마십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간증이 보다 효과적입니다.
5. 이 모든 이성적 질문들이 그 형제/자매에게 성령께서 주신 영적 성숙을 위한 기회임을 잊지 말고 소중히 다루세요. 그 가운데 변화의 영적 변화의 경험과 동시에 리더의 좋은 동역자를 얻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