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국민학교에 참으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만이 모여있는 문제아 반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그 반에 젊은 여자 선생님이 온 이후로 학생들의 성적이 불과 몇 달 만에 급성장을 이루었다. 교장 선생님이 이런 새로운 현상에 대하여 궁금하여 한번 그 여자 선생님을 불러 도대체 어떻게 하였길래 짧은 시간에 그렇게 좋은 학습의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느냐고 알아보았다. 그러니까 그 젊은 선생님이 하는 말이 내가 학생들의 아이큐를 적어놓은 표를 보니까 학생들의 아이큐가 모두 120-150사이인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런 아이큐 수준에 맞게 학습내용을 맞추어서 수업을 진행하였더니 학생들의 성적이 부쩍 올라갔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으면 그냥 재미가 없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사실은 그 젊은 선생님이 아이큐 수치인 줄 알고 학생들에게 수준을 높여서 교육시킨 바로 그 자료가 학생들의 아이큐가 아니라 학생들의 사물함 번호를 적어놓은 것이었다. 하나의 우스운 이야기거리이지만 사실은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진리가 있다. 비록 선생님이 잘못 알고 한 것이지만 선생님이 학생들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면서 그들을 도전하였을 때에 학생들의 놀라운 학습 성과가 있었던 것이다.


풀러신학교의 지도자학 교수인 클링톤 박사가 말하는 지도력의 이론 중에 “지도자 기대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것은 “추종자들은 자기가 존경하는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에 부응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사람들을 훈련시키며 또 이끌면서 그들에게 정말로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가 추종자들의 역량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역을 하면서 교육시키면서 정말로 사람들에게 진지하고도 마음 속에서부터 우러 나오는 기대를 가지고 하는가?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이점에 있어서 탁월한 지도자이셨다.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비록 당시의 기준으로 지도자 층에 속한 사람들을 아니었지만 그들 가운데 가능성을 보시고 그들에게 진지한 기대를 가지셨다.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불리는 사도 베드로를 보면 그가 당시의 사회 속에서 무시를 받던 어부였다. 그리고 그는 성격이 불 같아서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시몬”은 바로 이러한 그의 성격과 불안정성을 보여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런 이름과 성격을 가진 시몬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바위”를 본 것이다. 강하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기초가 될 수 있는 인물을 보았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초로써의 바위와 같은 인물을 본 것이다. 물론 시몬이 하루 아침에 베드로 가 되지는 않았다. 이름은 바뀌었지만 그의 삶은 여전히 감정에 휩싸이고 서두르고 실수투성이의 인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속에서 지속적으로 바위와 같은 견고한 사람을 기대하셨고 결국 베드로는 그 기대에 부응하여 초대교회의 사도가 되어 교회를 이끌었다. 우리는 우리를 진정으로 믿어주고 기대를 가져주는 지도자들의 기대에 부응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지도자가 된 사람들은 사역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관점보다는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기대하고 믿어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지도자들의 기대대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지도자가 자신을 믿어주면 그를 존경하고 자신을 믿어주는 지도자의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지도자가 자기를 믿어주지 않고 의심하고 비판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또한 그 기대에 부응하여 지도자를 힘들게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사역의 대상들이 혹시 좀 부족함이 있어도 지속적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믿어주고 기대하면 결국은 “시몬”이 변하여 “베드로”가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역하는 사람들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비론 현재의 모습은 실망스럽고 때로는 우리를 좌절 시키는 그런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갈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사람으로 기대를 하고 사역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런 진지한 기대가 없이 현재의 실망스런 모습에 좌절하고 절망하고 있는가? 성도들의 향한 진지한 기대는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이다. 몰론 우리의 욕심을 상대방에게 투여하여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나의 욕심에 맞추어 버리려는 기대나 사람들을 이용하기 위하여 기술적으로 좋은 말을 해주는 유치한 차원의 처세술이 아니라 모든 실망스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진지하게 믿음의 눈으로 기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지도자의 진지한 기대대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실망스런 현재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사람들에게 대하여 진지하게 아름다운 기대를 가질 수가 있을까? 첫째,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의 눈으로 그 사람 속에 있는 가능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지금은 비록 나약하고 부족하고 허물 많은 존재라고 할찌라도 그 속에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이 맺어지는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기대를 하는 것이다. 현실에는 아무런 가능성의 흔적 조차 없을지라도 하나님의 형상이 넘치는 모습을 마음 속에 그리는 것이다. 둘째로 이런 믿음의 눈으로 사람을 보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위해서 지속적으로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것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일을 이루셔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형상이 맺어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른 기대를 갖는 것이다. 세째로 믿음의 눈으로 또 기도로 사람들에게 선한 기대를 갖는 사람은 그것을 향하여 사람들을 강제로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있는 그대로의 부족한 모습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대와 소망을 잃지않는 비젼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사도 바울의 성도를 위한 기도를 좋아한다. 그리고 나의 사역 가운데 그 기도를 모범으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이 기도 속에서 사도 바울의 성도들을 향한 바르고 진지한 기대가 나타나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든 사역자가 성도들을 향하여 이런 기대를 가지고 사역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겅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배소서 3:1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