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세상 읽기


학력과 학벌


글을 시작하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알아야 이 세상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사고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영적인 세계에만 국한된 하나님이시라면, 우리는 굳이 이 세상을 알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또 우리에게 이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보전하라고 명령하셨기에 우리는 결코 방관자가 될 수 없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적인 세계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순간과 공간 속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서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크고, 작은 일들을 그냥 소홀히 지나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또 어떻게 이 세상과 관계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곧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신앙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세상 이야기


1. “서울대생은 단결하자!”


얼마전 한 네티즌이 서울대 생활정보사이트(www.snulife.com)의 구인/구직게시판에 ‘서울대생은 단결하자!’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가 해당 사이트가 폐쇄되는 소동이 일어났다. 문제의 글에서 자신을 서울대 재학생(실제 서울대 대학원생)으로 밝힌 이 학생은 “물가는 계속 오르는데 과외비는 10년 전보다 낮아진다”며 “일주일 2번 2시간에 40 이하라면 하지 맙시다”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또 “혹시 중.고생이 이 글을 본다면, 더 싼 가격에 배우고 싶으면 차라리 학원에 다니는 게 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7월 2일 올려진 이 글은 12일 오후까지는 15개 정도의 건설적인 비판글들이 게재되며 좋은 방향으로 토론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갑자기 12일 저녁부터 13일 오후 사이에 5284개의 답글과 코멘트(comment)가 폭주하면서 글의 조회수만 2만 7천번에 이르는 등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결국 서버의 과다접속으로 사이트가 잠정 폐쇄된 것이다.


거세게 분노한 다수 네티즌들의 주장들을 요약 나열하자면, 아이들이 돈으로 보이냐, 극빈 계층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돈타령이냐, 서울대생의 특권적 지위를 이용해 돈을 벌겠다는 건 학력차별사회를 조장하는 것이다, 학생의 입에서 대기업 같은 담합주장이 나온 것이 경악스럽다, 우리는 서울대생의 우월감에 반감을 가진다, 사교육비 과다지출이 사회 문제화된 마당에 서울대생의 의식수준이 고작 이 정도냐… 등등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소수의 반론적인 의견 또한 있었다. 일부 네티즌들은 왜 가난한 사람들과[만] 비교하느냐, 이 동료학생의 주장을 일반인이 이해하긴 힘들겠지만 우리[서울대생]에겐 충분히 토론할 가치가 있다, 40만원이 고액과외는 아니지 않느냐, 능력에 따라 대우받자는데 왜 난리냐 등등의 의견을 표했다.


이 사건을 기사화한 하니리포터(www.hanireporter.hani.co.kr)의 지용민 기자는 “하나의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에는 밤을 새며 글을 남겼던 수천 네티즌들의 열기가 대단했다”고 말하며, 이는 “우리 사회의 자본에 대한 종속성과 원죄처럼 극복하기 어려운 학벌중심주의를 여실히 보여준 한 현상으로 이해되기에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몇몇 서울대생들은 한 학생의 원색적인 주장이 결코 서울대생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음을 주장하며, 인터넷 공간의 파괴적이고 진지하지 못한 토론문화를 비판했다.


2. 시티은행의 학력차별 이율


서울대생의 과외비 담합 기사가 논란이 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번에는 은행대출과 관련된 기사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기사의 요지는 한국 시티은행이 무담보 신용대출에 있어 ‘학력차별 이율’을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경제신문인 ‘서울경제’의 7월 21일자 기사를 보면, 시티은행이 직장인 신용대출을 주는데 있어 서울지역의 고려대, 서강대, 서울대, 성균관대, 연세대, 외국어대, 중앙대, 한양대와 지방의 부산대 등 9개 대학 졸업자들에게만 0.5%포인트의 금리 할인 혜택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일반 무담보 대출 이율은 9%이지만 위 대학의 출신들이라면 특별히 0.5%의 이율을 면제받아 8.5%에 대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티은행의 이러한 대출정책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비교적 조용했다. 이는 무엇보다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사금융기관의 특성 상, 신용평가를 위한 그들만의 기준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티은행의 관계자는 이 기사와 관련해서 “한국의 특수상황으로 인해 학력이 개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평가기준이 될 수 있다”면서 “담보가 없는 신용대출에서 개인의 신용도를 평가하는 하나의 기준으로 사용했다”고 말했다. 곧 한국의 그 ‘특수상황’이란, 학력이 사람의 신용을 평가할 만큼 중요한 요소가 되는 한국의 사회현실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정서에 반하는 이러한 시티은행의 대출정책은 학력, 학벌 중심적인 한국사회의 병폐를 더욱 노골적으로 가시화 함으로써 오히려 잘못된 흐름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논란이, 네티즌 사이에서 일어났다. 실제로 이번 대출 관련기사(하나리포터)에 실린 네티즌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시티은행이 그런 평가기준을 내린 게 한국의 특수상황 때문이라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외국계은행이 그런 상황을 더욱더 부채질하는데 한 몫 한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아들아 명문대 또는 이름 있는 학교에 가야 한다. 적성은 필요 없어. 무조건 가야 해. 왜냐하면 말이지 나중에 돈 빌려 쓸 때도 이자가 적게 붙거든.”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학벌에 따라 이자가 다르네요. 국내의 아홉 개 대학에만 이자감면 혜택을 준대나. 그런데 그 아홉개 학교 중에 우리 학교가 들어가네요. 어이없는 학력차별이라고 분개해야 할까. 우리 학교도 잘 나간다고 기뻐해야 할까?” – 9개 대학 중 한 대학 게시판에 올라온 글


“중요한 건 이대가 빠진 게 아니라 외국인의 시각이 우리 사회에 학벌주의가 만연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리고 그것을 인정해야 하는 이 사회 분위기가 정말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이대가 빠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지요.” – 언론고시 게시판에 올라온 글


고독의 세상 바라보기


위의 두 기사를 통해 우리가 엿볼 수 있는 이 시대(특히 한국사회)의 조류는 무엇인가? 먼저는 바로 학력(교육을 통하여 획득한 능력)과 학벌(같은 학교 출신)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쉽게 무시될 수 없는 중요한 필요조건(necessary or demanding condition)적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곧 ‘나’라는 존재의 가치와 능력(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신용)이 ‘내가’ 어느 학교에서, 어느 정도를 공부했나에 따라 평가되는,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은 새삼스럽지 않을 만큼, 이미 우리 안에 자연스럽게 인식되고 있는 한국사회의 고질적 흐름이다. 우리 모두는 자의든 타의든, 이러한 학력, 학벌 중심적 구조에 의해 이익과 편리를 누렸거나, 아니면 피해와 손해를 경험했고, 또한 앞으로도 계속 이러한 상황들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사회는 어떠한 세계관(worldview)의 주도적 지배를 받기에, 학력과 학벌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는가? 먼저 위의 서울대생과 시티은행 기사가 공통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인식의 틀'(perceptual frameworks)은 “인간은 자신이 획득한 학력과 학벌에 맞는 합당한 물질적(material) 대우와 형편을 요구하고, 또한 요구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가늠하는데 절대적 기준으로 사용되는 부(wealth)를 획득함에 있어, 학력과 학벌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말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13세기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의 말이 요즘 시대에는 ‘아는 것이 곧 돈이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이해된다. 그러기에 “공부해서 남 주냐?”는 말이 우리 사회 안에서는 전혀 낯설거나 이상한 말이 아니다. 중. 고등학교 때부터 우리 나라의 수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부모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대학입학에 모든 것을 내걸고 필사적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인 배금주의가 학문의 궁극적인 목적 안에까지 스며들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좋은 학교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고자 하는 이유가 단순히 나의 가치와 능력을 높임으로 더 좋은 물질적 대우를 받으려는 이기적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배금주의적 자본주의와 대가 지향적 학문관의 만남으로 인해 아래와 같은 공식이 성립될 수 있다.


인간의 가치와 능력 = 물질(돈) = 학력과 학벌


그리고 이러한 세계관이 자신의 삶 속에 보편화된 사람들은, 출신학교의 명성이 바로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상징해 준다는 학벌주의적 망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므로 명문대 출신이면 명문대 출신 대로, 소위 이름 없는 학교에서 공부한 사람은 그런 사람 대로, 각자의 편협한 관점에서 서로를 일방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이러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가치와 능력을 그 사람의 됨됨이와 삶의 내용이 아닌 학력과 학벌로 평가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러한 기준에 의해 상대방을 인정하거나 홀대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위의 두 기사를 통해서도, 단순히 인간의 가치와 능력이 학력과 학벌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는 사회현실 못지 않게 한국사회 안에는 학벌주의에 의거한 파벌들이 조장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고독의 세상 읽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흐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이러한 세상의 흐름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삶을 요구하시는가? 세상과 벽을 쌓아서는 안되지만 세상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세상의 조류에 어떻게 역류해야 하는가? 어떻게 우리는 구별된 기독교 세계관(worldview)을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백성임을 이 세상에 선포할까?


먼저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무엇으로 평가하는가?” – 나는 학력과 학벌에 의해 스스로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지는 않는가? 이러한 가치관으로 나는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 앞에서는 스스로를 더 당당하게 생각하거나, 아니면 창피하게 여기지는 않는가?


“나는 지금 왜 공부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내 학업의 궁극적인 목적(학업 이후의 삶)은 무엇인가?” – 나는 졸업 후,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는가? 혹시 나는 대가지향적인 학문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까지 내가 누린 학문의 정도가(또는 능력이) 어떻게 해서 나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진지한 고민과 답변을 한 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내 안에 현재 자리잡혀 있는 관점과 성경적 세계관을 비교해 보면서 나의 사고를 반성, 조정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적 세계관에 입각해서, 인간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이야기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왜,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알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와 우리를 위해 친히 죽으셨는지를 아는 것처럼 더 명확하게,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설명해주는 성경 상의 이야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를 통해 성경적 관점을 이해하게 될 때, 우리는 좀더 실제적이고 적극적으로 한국사회의 학력, 학벌 중심적 흐름에 역류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로 이 글에서는 창조 이야기만을 통해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겠다.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세기 1:31)


제품은 제조자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그 가치와 능력을 다하는 것이다. 아무리 보기에는 멋지고 잘 나가는(?) 최신기종의 휴대폰이라 하더라도, 제조자의 기본적 제조목적인 통화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면, 그 휴대폰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무용지물인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인 우리도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맞게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게 사는 방법이다. 아무리 명문대에, 경쟁률 높은 학과에서 공부를 했다 하더라도,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도 모르는 체 살아가는 인생은 삶을 헛되이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사람들이 들어보지도 못하고, 알아주지도 않는 학교에서 소정의 학문을 이수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를 왜 이 땅에 보내셨고, 또 나를 어떤 일을 위해 구체적으로 사용하기 원하시는지, 그 소명의식이 분명한 인생은 그 자체로 이미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창조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인간의 창조 목적은 과연 무엇인가? 두 개의 창조 이야기(창1:1-2:3과 2:4-2:25)로 구성되어 있는 성경에서, 특히 우리가 관심을 가질 부분은 첫번째 이야기이다. 두번째 창조 이야기가 하나님의 창조 중에서도 인간창조와 에덴동산에 대한 구체적인 서술에 집약된 것에 비해, 첫번째 이야기는 거시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이야기하며 창조사역의 전반적인 배경과 목적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의 창조목적, 곧 인간의 가치평가기준(존재목적)을 이야기하며 주로 창세기 1장 26절에서 29절의 말씀에 집중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26절에서 28절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말씀은 인간의 존재목적보다는, 존재목적을 위한 삶의 일반적 방식과 방향을 설명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오히려 나는 좀더 원론적이고, 근본적인 인간창조의 목적을 1장 31절의 말씀에서 찾게 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표현은 사실 첫번째 창조 이야기에서 거듭 강조되는 핵심어이다. 총 7번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든 창조의 배경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는 목적이 존재함을 보게 된다. 곧 우리의 존재가치와 능력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시각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창조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삶’, ‘하나님이 보시고 기뻐하실 삶’을 사느냐에 따라 우리의 가치와 능력이 평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존재목적을 구약의 스바냐 선지자의 고백과 예수님의 세례(공생애의 시작)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스바냐 3:17)


“And a voice from heaven said, “This is my beloved Son, and I am fully pleased with him” (마태복음 3:17, NLT)


그럼,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을 말하는가? 역설적이지만 나는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규정적인(prescriptive) 성경해석을 거부한다. 오히려 단순 명료하면서도 무한한 의미를 가진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서술적(descriptive) 표현 그 자체에 집중하기 원한다. 명제적이고 획일적인 방법론이 아닌 피조물의 창조적인 삶을 통해 다변화하는 세상에서 다양한 직업과 방법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마치 이성상대와 배우자를 기쁘게 하기 위해 우리가 여러 가지 창조적이고 기발한 아이디어들을 개발, 행동에 옮기듯,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이어야 한다.


내가 규정적 성경해석을 경계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많은 경우에 한국교회가 성경이 쓰여진 그 시대만의 문화적, 사회적 특징을 현대상황에 맞게 재해석, 적용하지 않고 그대로 일괄 적용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첫번째 이유와는 반대로) 현대상황에만 지나치게 민감한 나머지 성경을 세상적 사고로 재해석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구약시대에 하나님이 주로 사용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되었던 자들은 왕(영적 지도자의 개념), 총리, 사사, 선지자 등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현대교회에서도 목회자가 되거나 아니면 교회문화와 관련된 헌신을 하는 자, 그리고 세상에서 소위 성공했다는 위치에 있는 자들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고, 또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가치 있게 쓰임 받는다는 식의 무리한 해석들을 남발하고 있다.


가치와 능력 =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 = 목회자 및 소위 성공한 사람들


하나님은 가난한 자나 부한 자, 약한 자나 강한 자, 학문이 뛰어난 자나 문외한 자나, 모든 부류의 인생들을 통해 다양한 방법으로 “보기에 심히 좋다”는 기쁨을 누리기 원하신다. 우리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사람의 용모나 외모가 아니다(사무엘상 16:7). 그분은 우리 마음의 중심, 곧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보신다. 그런데 우리가 위와 같이 특정한 시대의 특정한 직업에 국한된 성경해석을 시도한다면, 결국 우리는 자본주의사회의 학력, 학벌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파벌주의적 집단을 신앙 공동체 안에 들여오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해 꾸준히 드려져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기에 정의되거나 규정화 되어서는 안 된다. 단 한번의 명문대 입학과 영광의 졸업장이 우리의 가치와 능력을 평가해서는 안 되듯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 또한 일시적인 그 어떤 행위를 통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첫번째 창조이야기에서,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그대로 창조되었을 때, 그 자체(being)가 하나님 보시기에 마냥 좋았던 것처럼, 우리의 존재(또는 삶) 자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빌립보서 2:13)


결국 위의 설명을 종합하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란,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곧 진정으로 가치 있고 능력 있는 삶임을 믿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삶’을 자신들의 존재목적으로 확신한다. 그리고 이 확신은 그들의 다양한 직업을 통해 창조적으로 드려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냥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듯 그렇게 하나님의 기쁨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기쁨’은 일회성적인 헌신이 아닌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꾸준히 추구되어야 하는 존재론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열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신앙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 개개인 안에 당신의 기쁘신 뜻을 보여주시고 또한 이를 소명으로 믿고 행하게 인도하신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창세기 1장의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그 말씀 그대로의 목적을 위해 우리의 삶을 가치 있고 능력 있게 채워가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