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4월호

최근에 멜 깁슨이 감독한 “The Passion of the Christ” 영화가 개봉되어, 여러 논란이 있는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 감당하신 고난의 무게에 관한 강렬한 영상으로 많은 이들에게 도전을 주고 있다. 이 영화로 인하여 믿는 자들의 신앙이 새로와지고 믿지 않는 자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있다는 소식은 금년의 사순절과 고난주간에 특별한 의미를 더하여 주고 있는 듯하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 팔십 년 전 유럽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었는데, 그 당시에는 영화가 아닌 요한 제바스티안 바하(Johann Sebastian Bach)의 음악들이 그 매개체가 되었고, 그 한 가운데에는 ‘마태수난곡’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바하의 모든 음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 “합창 음악의 최고봉”, 더 나아가서는 “인류 음악 예술의 최고 걸작” 등 찬사를 아끼지 않는 작품이건만, 당시에는 난이하고 복잡하게만 받아들여진 탓에 작곡된 무렵에 세 번 정도 연주된 이후로는 근 백 년간이나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지게 된다.  그러던 것을 당대의 작곡가 겸 지휘자였던 멘델스존이 발굴하여, 작곡된지 꼭 백 년이 되는 해에 다시금 연주되어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에 대한 각성과 신앙적인 도전이 이루어짐은 물론, 당시 전 유럽을 휩쓸고 오늘날까지도 맥을 이어 내려오는 ‘바하 르네상스’ (“바하의 음악으로 돌아가자” 는 음악 무브먼트) 의 싹이 틔여지게 된다.1) 바하 음악이 지니는 완벽함과 순수함,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으로 나타나는 그의 음악의 깊은 정신성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음악적인, 그리고 사회적인 반향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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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태수난곡은 바하가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학교와 교회에서 칸토르(음악감독)로 지냈던 그의 장년기 시절에 만든 작품으로, 마태복음에 나와있는 예수님의 수난 부분(26, 27장)을 기본 텍스트로 하여 작곡된, 연주 시간이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대곡이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었고 백 년 후에는 이미 상당히 유명해져 있었던 헨델의 “메시아”가 3부로 구성된 전체의 한 부분(제 2부)을 예수님의 수난에 할애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바하의 수난곡들은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만 촛점을 맞추고 있다.2), 3) 당시에는 네 개의 복음서를 바탕으로 한 각각의 수난곡들이 존재하였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마가수난곡은 분실되었고 누가수난곡은 후세의 위작으로 여겨지고 있는 까닭에 현재에는 마태수난곡과 이보다 몇 년 앞서 작곡된 요한수난곡만이 연주되고 있다. 음악적인 면을 살펴보면, 독창자들과 두 개의 합창단 및 두 개의 오케스트라가 솔로에서 이중 합창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제공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다양한 음악적 기법들이 동원되어 예수님, 성경 나레이터, 베드로, 빌라도, 군중들 등 다양한 인물들의 심리 전개와 그에 따른 일련의 사건의 흐름들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하고 있다.  개별곡들은 단순한 모음집의 차원을 넘어서 하나의 미적인 통일체로서 파악되는 전체적인 구조를 가지며, 이 안에는 회화적인 특성과 상징적인 표현들이 풍부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극적인 묘사들,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인 요소와 정신적인 요소 등 다소 상반된 성격의 측면들이 조화 속의 대비를 이루는 가운데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음악 자체만으로도 비할 바 없이 뛰어난 이 모든 기법들이라 할지라도, 작곡자 자신의 신앙 고백으로 승화된 주님의 십자가 고난의 메세지를 음악을 듣는 이들에게 같은 감동과 도전으로 전달하기 원하는 작곡자의 의도를 놓치는 경우에는 이 음악 작품이 가지는 진정한 가치와 기능에 대한 온전한 자리매김을 이루기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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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하의 마태수난곡이 단지 음악적으로만 위대한 작품이 아니라, 작곡자 자신의 신앙이 음악을 통하여 표현되고 승화된 것이었다는 점에 관하여, 그의 부인 안나 막달레나 바하는 남편이 작고한 얼마 후에 그가 마태수난곡을 작곡하던 때를 회상하며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어느날 그의 방으로 불쑥 들어갔을 때, 마침 그는 마태수난곡의 알토 독창 “아, 골고다”를 작곡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평안하고 안색도 좋았던 그의 얼굴이 완전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어두워진 모습을 본 순간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와 그의 방문 옆 계단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곡을 쓰면서 비통해하는 모습을 내가 보았다는 사실을 끝내 모른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 사실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하나님만이 볼 수 있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이 곡을 쓰고 있었을 때, 그는 간절하게 구원받기를 원하는 영혼들의 모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숭고하심과 그 비밀들에 관하여 깊이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후 한 수난절에 토마스 교회에서 마침내 연주된 마태수난곡을 듣게 되었을 때 나는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으로 벅차서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곡에 주목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너무 난해하고 상당히 많은 연습을 하지 않으면 연주하기가 어려운 곡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마 언젠가는 그 음악을 천국에서 다시 들을 수 있겠지요…  (안나 막달레나 바흐 저, “내 남편 바흐”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있으며 수많은 연주자들과 음악학자들이 자신의 평생을 바칠 만한 “순수 서양 음악의 시작이요 완성”이라고 여기고 있는 바하.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이 생각한 음악이란, 루터 신학이 강조하는 바와 같이 “explicatio textus (interpreting texture)” 였으며, “praedicatio sonora (resounding proclamation)” 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서의 음악 철학이란, 하나님께 경배드리고 그분을 계시하는 ‘예배의 행위’요, 그러한 목적에 사용되도록 인간에게 허락하신 또 하나의 ‘언어’와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일찌기 바하 음악에 깊이 심취하였던 슈바이처 박사(Albert Schweitzer)는 이러한 바하의 음악의 본질적인 면모를 일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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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예배의 행위이다. 따라서 모든 예술, 심지어는 세속적인 것들마저도 그에게는 신앙적인 표현의 대상이 된다. 그 결과로 그의 음악은 가장 깊은 기도와도 같이 하나님께 상달되는 그 무엇이 되고 있다



라고 평한 바 있다.  학교의 음악감독으로 있으면서 때로는 학생들에게 직접 성경을 가르치기도 했던 바하는,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을 늘 깊이 묵상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묵상하고 연구한 점들은 본문 옆에 스스로 주석으로 달아놓곤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가 소장했던 성경책의 역대하 5장 부분을 보면, 솔로몬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렸을 때 찬양대와 기악대가 함께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기 시작하자 여호와의 영광이 구름과 같이 임하였다는 대목이 나오는 13절 옆에다 바하는 자필로 다음과 같은 주석을 적어놓았다고 한다. 



경건한 음악에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하신다! 



어쩌면 이 말이야말로 작곡가로서의 바하의 일생을 지배한 그의 삶의 동기요 소명이자 간증을 가장 적절한 말로 표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인 작곡 활동의 첫 소산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첫 칸타타의 제목이 “하나님은 나의 왕”4) 이었으며, 숨을 거두기 바로 며칠 전 그의 생애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르간 코랄전주곡의 제목이 “주의 보좌 앞으로 이제 나아갑니다” 였다는 점은 이러한 측면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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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그의 작품들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수난을 기리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한 흔적들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백 여 개나 되는 칸타타와 수난곡 등 직접적인 찬양 가사가 달려있는 합창 음악들이나, 성경 말씀을 멜로디로 표현한 수백 개의 오르간 곡들은 우선 그 직접적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슈바이처 박사가 말한 “세속적인 것에 묻어있는 성스러움”이라는 측면은, 일반인들이 좋아하는 쾨텐 시절의 기악곡들 – 무반주 첼로곡, 평균율 피아노곡, 각종 기악 협주곡들 등 – 으로부터 ‘커피 칸타타’, 결혼 음악 등과 같은 세속 주제에 의한 곡들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곡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신성을 그 문맥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입증은 아마도 직접 들어보는 것으로써 가능할 것이다.5)  몇 년 전에는 한 연주가가 그러한 고백을 했던 것이 알려지기도 하였는데, 현존하는 가장 손꼽히는 피아니스트의 한 명인 머레이 퍼라이아(Murray Perahia)는, 연주자의 길을 거의 포기할 뻔한 위기를 넘긴 직후 “골드베르크 변주곡”6) 을 녹음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다.



“이 변주곡들은 각각 예수님의 다양한 사역을 표현하고 있으며, 특히 25번 변주곡은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을 연상시킨다.” 



한편, 당대 최고의 오르간 연주가이자 바하 전문가이기도 했던 슈바이처 박사는, 바하의 음악에는 인간 정신의 깊이가 담겨있고 영성이 있으며 내적 평화가 깃들여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음악들에는 무의식 중에라도 사람들의 영혼을 일깨우는 힘이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역하는 동안 원주민들의 정신과 영혼을 가꾸는 데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매일 아침 교회의 문을 열어놓고 바하의 오르간 음악들을 연주해 들려주었다고 전해진다.7)  그리고, 그런 노력은 슈바이처 자신의 사랑 및 섬김의 삶과 더하여져 영혼들을 일깨우고 변화시키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이와 같이, 바하의 음악은 조금만 귀기울여 들으면 그 안에 주님의 흔적이 직간접으로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그 안에는 참다운 의미에서 ‘영혼을 울리는’ 힘이 있음을 우리는 또한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다.  바하의 음악에 보편적으로 영성에 관련된 측면이 묻어있다는 점은, 마태수난곡이 지닌 면모가 그의 음악들 중 결코 이 한 곡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다른 모든 곡들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주님의 흔적이 가장 직접적으로 표현된 곳 그 정점에 마태수난곡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이 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찬사이기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마태수난곡의 개별 곡들을 일부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도록 하자.



  제 1곡은 전 곡을 여는 도입 합창으로, 두 개의 합창단이 주고받으며 엮어내는 장엄함과 엄숙함은 주님의 고난의 메세지를 파도와 같은 감동으로 전달하고 있다.  이 음악을 듣는 동안 우리의 마음가짐은 주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현장에 찾아온 듯 옷깃을 여미는 마음으로 준비된다. 음악적으로도 완벽한 대위법적 어법은, 이 곡을 능가하는 대위법적 합창곡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도무지 갖지 못하게 할 정도로 합창 음악의 극치를 들려주고 있다.



  음악으로 그림을 그리는 듯한 표현법은 전 곡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길게 늘여서 연주하는 현악 반주로 예수님을 둘러싼 빛을 표현한다든가, 마리아가 주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대목에서 플룻이 스타카토로 떨어지는 음을 연주하므로써 예수님의 발 위에 떨어지는 눈물을 묘사하고 있는 점, 그리고 예수님이 감람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베이스가 상승하는 음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신 장면을 묘사하는 제 33곡에서는, 주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묘사하는 알토와 소프라노의 이중창이 “나의 예수님이 이제 잡히셨네” 하면서 느리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동안, 군중을 나타내는 합창은 격정적이고 빠른 멜로디로 “놓아줘! 잠깐, 묶으면 안돼!” 하며 다급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한 곡 안에서 서로 전혀 다른 분위기와 템포의 멜로디들이 절묘하게 조화되는 이런 모습들은 마치 여러 영상이 시각적으로 오버랩되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켜 주므로써 듣는 이로 하여금 감정이입이 일어나는 것을 돕는다.



  제 47번곡(버전에 따라서는 39곡)은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한 직후에 부르는, 아마도 전곡에서 가장 유명한 알토 아리아인데, 바이올린의 애를 끊는 듯한 독주를 타고 베드로의 애절한 심경이 노래된다.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이렇게 울고 있나이다. 마음도 눈도 아프게 울고 있는 나를 보소서…  때로는 나 또한 베드로와 같은 입장에서 이렇게 주님께 참회의 기도를 드려야 했었음을 돌이켜 생각할 때, 이 노래는 내 마음 안에 밀려들어 공명하는 ‘나의 노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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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숨가쁘게 진행되는 재판 과정,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의 애처로운 모습, 격앙된 군중의 반응,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 아프게 바라보는 여인들의 애닲은 마음들, 돌아가시고 난 후 지진이 일어나며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장면 등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로서 펼쳐지고 난 후에, 맨 마지막으로 찬송가 145장(“오 거룩하신 주님”)에 수록되기도 한 종결 합창8)으로 마무리되면서 주님의 수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바하의 마태수난곡과 같은 작품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유익은 무엇이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고 주신 소명에 충실하기 원하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지에 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는, 우리에게 문화 유산이라는 형태로 이미 주어진 이러한 삶의 자원들이 우리의 일상적인 공간들을 더욱 주님으로 풍성한 곳이 되도록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가장 직접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적 문화 유산’들의 유익이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의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경배하는 수고를 그치지 않았던 한 신앙의 선배를 통하여, 오늘 우리가 주님을 묵상하며 깊은 교제를 나누는 일에 또 하나의 본보기와 길잡이를 삼을 수 있다는 점을 들어야 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이 삶을 그분의 온전한 ‘작품’이 되도록 가꾸어 가야할 것인데, 그런 면에서 이러한 작품들이 뜻밖에도 우리에게 지속적인 격려와 도전을 주는 매개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조명한 한 영화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에 대한 우리의 깊은 묵상을 도와주었듯이,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낸 사람” 이라고 혹자는 일컫기도 하는 바하의 음악들과 가까이 하는 일 또한 보다 다른 각도에서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고 묵상하는 일에 도움과 동기 부여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본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어느 때보다 그분의 고난의 메세지에 가까이 다가서며, 주님 서신 그곳에 동참하라 부르시는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내 안에 깊이 새겨지는 이번 사순절과 고난 주간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우리는 다 양과 같아서 각각 제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4:1-2)








1)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바하 음악의 순수음악적인 측면과 기술적인 측면들만이 남고, 정작 그의 삶의 철학이요 근본적인 창작의 동기가 되었던 신앙적인 측면이 도외시되어 가는 것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깊은 아쉬움을 느낀다. 



2) 같은 해(1685년)에 독일의 이웃 동네에서 태어난 헨델과 바하는 동시대를 산 위대한 음악인들이었지만, 헨델이 영국 왕실의 지원 아래 부귀와 전유럽에 걸친 명성을 누렸던 것과 달리, 바하는 때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그의 명성 또한 주로 독일 국내에 국한된 것이었다. 더우기, 바하의 음악은 그의 사후에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상당 부분 잊혀져 오고 있었다.



3) 헨델의 “메시아”가 이전에 나온 “Jesus of Nazareth” 등과 같은 주님의 일대기 영화와 같은 방식이라면 바하의 수난곡들은 멜 깁슨의 “The Passion”과 비슷한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결코 신동이 아니었던 그의 작곡가로서의 경력은 열 살 전에 이미 교향곡을 작곡한 모짜르트와는 달리 20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나, 주어진 시간 사용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응답이라고 여겼던 그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갔다. 그에게는 작품 번호가 매겨져 있는 작품들이 1080 가지가 있으며, 세 시간 반이 걸리는 마태수난곡도 그 중 한 번호(BWV 244)를 부여받고 있다.



5) 바하의 음악이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평화가 어떤 것인지 우선적으로 느껴보기 원하는 분은 (Karl Richter 등이 지휘한) 칸타타 140번 “시온은 파숫꾼의 노랫소리를 듣는도다”, 147번 “예수, 나의 기쁨되시네” 나 (Helmut Walcha 등이 연주한) 오르간 코랄 전주곡 BWV 639, BWV 731 등을 들어보기를 권장한다.  가사가 없는 일반 기악곡들 또한 얼마나 정신적 순수함과 영적 경건함을 이끌어내어줄 수 있는지 경험해보기 원하는 분께는 (S. Richter 등이 연주한) 평균율 피아노곡집이나 (Fournier, Maisky 등이 연주한) 무반주 첼로 조곡을 추천한다.  바하의 음악이 어떠한 경건한 마음을 갖게 하는지, 그의 음악이 어떠한 평화를 가져다 주는지에 대해서는,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필설로는 설명이 어렵다고 생각된다. 



6) 주제곡인 아리아(aria)에 대한 30 가지의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 바하의 유일한 변주곡(BWV 988)으로, 그 완벽함과 즉흥성의 조화는 클래식 음악 애호가는 물론 재즈를 좋아하는 사람치고 이 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끔 만드는 그 어떤 매력이 있다.  여기의 주제곡은 바하의 음악들 중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른 소품들과 더불어 “안나 막달레나 바하를 위한 곡집” 에도 삽입되어 있다.



7) 슈바이처 박사가 영혼을 매만지는 사랑을 담아 연주한 바하의 오르간 곡 연주들은, 그가 당대 최고의 오르가니스트였던 만큼 그 녹음이 현재에도 남아서 일부 (음반 석 장의 분량으로) 전해지고 있다 (1930 년대 후반; EMI Record).  위에서 추천한 BWV 731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가 여기 있나이다”) 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한껏 묻어난 그의 바하 연주를 대표할 만한 곡이다.   



8) 원래 해슬러(Hassler)가 작곡한 이 곡은 바하가 특별히 애착하여 요한수난곡에서 도입 합창으로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마태수난곡에서도 다섯 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현재 시중에는 마태수난곡 연주를 수록한 좋은 음반이 많이 나와 있다. 크게 정통적인 (authentic) 연주와 원전 악기 (periodic instrument)를 사용한 연주의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마태수난곡 연주의 모범적인 전형을 세운 칼 리히터 (Karl Richter)의 연주 (Archiv; 1958)는 전자의,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를 애절하고 감미로운 음악으로 승화시킨 가디너의 연주 (Archiv; 1988)는 후자의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최근의 연주로 호평받는 것으로는, 아르농쿠르 (Harnoncourt)의 신작 (Teldec; 2001), 헤레베헤 (Herreweghe)의 신작 (Harmonia Mundi; 1999), 그리고 일본인 스즈키 (Suzuki)의 연주 (Bis; 2000) 등이 통상적인 명연주들로 꼽히고 있다. 경제성과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는 측면을 고려하면, 처음에는 주요 곡들로만 구성된 하이라이트 음반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전곡 감상에 도전하는 방법도 권장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