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1월호

동양 속담 중에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다 나의 스승이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사람은 본받을 만한 모델로서, 또 어떤 사람은 본받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反面敎師)로서, 다 나름대로 배울 만한 점들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이 말이 사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면, “모든 사람으로부터 최소한 한 가지씩의 장점을 발견할 줄 아는눈을 가지도록 하는 권유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인격적으로, 또는 책 등을 통하여 직간접적으로 만나게 되는 만남이 믿는 이들에게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각 사람들에게서 부분적으로만 드러났던 하나님의 형상이 만남과 나눔들 가운데서 더욱 온전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헨리 나우웬(Henry Nouwen)간접적으로만나는 만남도 우리의 묵상과 깨달음에 풍성함을 더하여 주는 한 좋은 예인데,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는 일에 탁월하였던 그를 통하여 우리 역시 주님을 만나기를 소망한다.



헨리 나우웬의 삶은 사역적인 면에서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예일대에서 신학적 심리학을 가르쳤던 70 년대, 하버드에서의 파트타임 강의와 남미 선교를 병행하였던 80 년대, 그리고 캐나다의 라르쉬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 들어가서 장애인들, 특별히 아담이라고 하는 한 중증 장애인과 함께 남은 생애를 보낸 90년대가 그것이다. 그가 유명 작가와 일류 대학의 교수라는 영향력을 뒤로 하고 (사실은 그의 모든 존재를 집약해서!) 한 영혼을 섬기는 삶을 사는 데에 생의 마지막 10년을 보낸 사실은 잘 알려진 대로이므로, 그런 면에서 아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라는 책에는 그의 인생의 무게가 실려있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담과의 만남



아담 아네트(Adam Arnett) 1996 2월에 34 년의 생을 마감하였으며, 헨리 나우웬도 이 책을 쓰고 난 직후인 같은 해 9 , 마치 자신도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 아담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아담의 삶을 통하여 본 예수님과 그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자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나는 관에 누워있는 아담의 시신을 본 순간부터, 그의 삶과 죽음의 신비에 사로잡혔다. 그때 섬광처럼 내 가슴에 와닿은 사실은, 바로 이 장애인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으며 독특한 사명을 띄고 이 세상으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이제 그 사명을 완수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그런 시선으로만 아담을 보았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를 아끼던 많은 친구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한 도움, 더 체계적인 인도함, 더 큰 섬김의 기회들을 마다하고 이런 곳에 와 있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헨리, 자네가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데가 여기인가?” 그는 혼란스러워했을 뿐만 아니라 화를 내고 있었다. “아담에게 자네의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던 대학을 떠났단 말인가?”…”



생각의 변화



사명감과 의욕으로 시작하였던 새로운 섬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의문과 방황과 영적 침체의 모습으로 그에게 다가오게 된다. 그러던 그의 마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어 갔다.  



“…한 주 두 주, 한 달 두 달이 지나면서 나는 아담과 함께하는 한두 시간을 사모하게 되었다형세가 역전되고 있었다. 아담은 나의 선생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삶의 광야를 혼란 가운데 헤메고 있는 나와 함께 걷고 있었으며, 나를 이끌어주었다. 아니,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와 함께있는 동안 나는 그를 돌보는 모든 활동을 넘어, 내면에서 들려오는 사랑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 시간은 순수한 선물이요, 묵상의 시간이었다. 우리는 함께 하나님의 어떤 부분과 만나고 있었다. 아담과 함께 나는 거룩한 존재의 현존을 알았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모두의 눈에 선생이었고 돕는 자였던 그가, 실제로 주님 안에서 배우고 도움을 받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의 섬김과 양육의 대상이 되어주므로써, 그러한 일들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하였을 배움과 자라남을 가능케 했던 아담이야말로, 그 자신을 위하여 세워주신 영적 스승이요 영적 은인이었다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아담을 통하여 만나는 예수님, 그를 통하여 만나는 우리 자신



“…예수님은 권세와 힘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연약함의 옷을 입고 오셨다. 나는 아담이 제 2의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예수님의 연약함 때문에 아담의 극도로 연약한 삶을 최고의 영적 의미가 있는 삶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내면의 공간을 채우려는, 마음의 산란함이나 집착 그리고 야망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아담은 하나님을 위해 마음을 비우는 영적 훈련을 할 필요가 없었다. 소위 그의 장애가 그에게 이러한 선물을 준 것이다대부분은 아담을 불구자로 보았다. 우리에게 줄 것이 거의 없고, 가족과 공동체와 사회에 짐만 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가 그런 식으로 여겨지는 한, 그의 진리는 숨겨진 채로 있을 것이다…”  



헨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아담의 참된 가치를 보았으며, 아담을 통하여 세상이라는 거품을 걷어낸 예수님의 참 모습을 그의 마음에 되새길 수 있었다. 내게 다가오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정직한 의미에서 어떤 모습일까? 나는 혹 내가 보기 원하는 주님의 모습만 보고 있으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의 눈을 덮고있는 비늘을 벗겨주기 위하여 때때로 삶의 한복판으로 찾아오는 장애고난의 의미에 대하여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들은 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내신 자로, 곧 철저한 연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가 되도록 하기 위해 보내신 자로 환영했다. 그를 이렇게 바라보면 근본적으로 모든 것이 바뀐다. 그때부터 아담은 특별하고, 경이롭고, 타고난 재능이 있는 약속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그의 경이로운 존재 자체와 믿어지지 않는 가치는 우리에게,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께 귀히 여김을 받고 은혜를 입었으며 사랑받는 자녀임 자신을 부자라고 생각하건 가난하다고 생각하건, 지성인으로 보든 불구자로 보든, 잘생겼다고 생각하든 매력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든 상관없이 을 이해할 수 있도록 안내해줄 것이다…” 



우리는 존귀한 존재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자체를 그토록 귀히 여겨주시며 사랑하고 계시는 그 단 한 가지의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자주 잊어버리곤 한다. 그렇기에, 나의 수고와 지식, 성취에 기대어 존귀함을 획득하고자 애쓰기도 하고, 같은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네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네가 진실로 아느냐? 네가 이토록 귀하기 때문에 네 죄 값으로 인하여 네가 죽는 것 보다는 내가 대신 죽는 편이 낫겠다고 여긴 것이란다…”  



존재에 관하여 



“…인생은 선물이다. 우리 각 사람은 독특하며, 우리 이름이 아신 바 되었으며, 우리를 만드신 그분의 사랑을 받는다. 불행히도 우리 사회로부터 우리에게 다가오는 너무 크고 끈질기며 강력한 메세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가진 것 그리고 성취할 수 있는 것으로 사랑받는 존재임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도록 한다. 우리는 이생에서 무언가 해내는 일에 몰두해 있으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진리 곧 우리의 기원과 종말에 대한 진리를 이해하는 데 너무나 느리다 그들은 아담의 장애만을 보게 하는 시험을 이겨냈다. 그들은 그가 돌을 떡으로 바꾸거나, 높은 탑에서 안전하게 뛰어내리거나, 큰 부를 획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받아들였다. 아담은 이런 세상적인 일들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가 사랑받는 자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로서만은 귀히 여겨질 수 없다는 생각에 불안하고 두려워질 때가 있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심지어는 가정에서조차, 우리가 귀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무엇 때문에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들이 필요하다.  용모가 아름답거나 능력이 있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있으며 좋은 결과를 내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나 지위가 주는 신분적인 잇점들 때문에 믿는 이들의 모임은 대개 이런 점들에서 다소나마 위로와 소망을 주곤 한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도 이보다 낫다고 늘 자신할 수 있을까? 출석과 봉사를 잘 하고 있기 때문에, 책임과 섬김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이 좋기 때문에, 말씀이 좋기 때문에 귀할 뿐, 그러한 이유들을 상실할 때에는 더이상 귀중한 존재가 아닐 수도 있다면 말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귀중히 여김을 받을 수는 없는걸까? 잘못했던 일까지 칭찬하고 내버려둘 수는 없겠지만, 어느 경우에도 존재 그 자체만은 남겨져서 최소한 계속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는걸까? 모든 수고와 섬김과 업적들은, 이미 귀중한 존재 위에 더하여진 감사 제목일 수는 없는걸까?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오히려 나 자신이야말로 그러한 세상과 공동체와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는 당사자라는 점일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끊임없이 평가받고 때로는 버려지기도 하는 우리가 동시에 우리의 옆사람들을 평가하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밀어내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에너희는 그저할 것은하고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 5:37)”



사역에 관하여 



아담이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의 이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을까?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했을까?” 나는 오랫동안 이런 질문들에 대해 생각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얼마나 아담이 알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이해하고 있는 바를 얼마나 아담이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아래로부터 오는질문들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보다는 나의 걱정과 불안이 반영된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 위로부터 오는질문들은 아담이 너를 기도로 이끌도록 맡길 수 있느냐? 너는 내가 아담과 깊은 교제 가운데 있다는 사실과 그의 삶이 기도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느냐? 아담이 너의 식탁에서 살아있는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느냐? 너는 아담의 얼굴에서 내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였다…” 



너는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볼 수 있느냐?”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고 씌임받느라 지금 분주한 나에게, 주님께서 내 옆의 한 사람 한 사람을 가리키시면서 이렇게 물으신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대답하게 될까  



“…나는 내가 한 일과 얼마나 많이 이루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염려하는 동안, 아담은 내게 행위보다는 존재가 더 중요합니다라고 선포하고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에 몰두해 있을 때, 아담은 내게 조용히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의 칭찬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중요합니다내가 나의 개인적인 성취에 관심을 쏟고 있었을 때, 아담은 내게 혼자서 하는 것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라고 나를 일깨워주었다. 그는 바로 삶 그 자체로, 내가 접한 인생의 진리를 가장 철저하게 증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