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2월

열왕기상 13장에 나오는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는 솔로몬의 우상숭배에 대한 심판으로 인하여 통일 이스라엘 왕국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로 분열된 직후에 있은 일이다. 북왕국의 첫 왕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길을 따르지 않으므로써, 이후의 모든 이스라엘 왕들이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였다고 일컬어지게 되는 악한 행실의 한 전형을 세워놓았다. 북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 안에서가 아니라 멀리 유대 땅으로부터 한 선지자를 보내시는데, 여기에는 북이스라엘의 왕과 관리는 물론 제사장과 선지자들도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엄격한 뜻이 있었다. 당시의 관습에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연합과 승인을 상징하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에게는 북왕국의 그 누구와도 더불어 먹거나 마시지 말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그는 여로보암 앞에서는 이러한 주님의 메세지를 온전히 전달하였지만, 돌아오는 길에 북왕국의 다른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머물기를 청하였을 때는 그 말을 받아들여 더불어 먹고 마시므로써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어 징계를 받아 길가에서 사자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는 왜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유대 선지자를 만나기 원하였을까? 한 주석서의 해설처럼, 하나님의 사람과 함께하는 행위를 통해서 북이스라엘의 길도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모양새를 얻고 싶었던 것일까? [Westminster Bible Companion: 열왕기] 아니면, 하나님의 영이 떠난 곳에서 오래동안 지내다 보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왔다는 소리에 단순히 무리해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북왕국 선지자의 동기가 어디에 있었건, 유대 선지자에게 내려진 판정은 불순종이었고 그 결과는 죽음이었다. 이 선지자에게 내려진 처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는 다른 나쁜 의도나 불순한 동기가 없었더라도 하나님께 그런 징계를 받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그 유대 선지자였다면, 다른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길래 따른 것 뿐이었는데 하며 황망해하고 억울해하지 않았을까?  


하나님의 사람 유대 선지자는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었다. 여로보암에게 가서 전하여야할 말도 하나님께로부터 들어서 알 수 있았다. 그가 만일, 하나님은 스스로 하신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조금만 더 신뢰하고 기억하였더라면 사태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마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주님께 이것이 정말로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입니까? 하고 직접 여쭈어보게 되지 않았을까? 그가 만일 그렇게 질문하고 주를 간절히 찾았더라면 (잠언 8:17), 그에게 친히 말씀하셔서 보내기까지 하신 주님이 그를 만나주시고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시켜 주지 않으셨을까? 그렇다면, 노상에서 사자에게 죽는 비극은 혹 발생하지 않았을런지도 모른다. 이런 측면에서, 이 이야기는 하나님을 직접 만나는 일에 대한 중요성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주님께서는, 꼭 징계의 의미로서만이 아니라 주님과 직접 만나는 삶을 가까이에서 영원히 배우게 하시고자 당신의 사람을 그분 곁으로 급히 불러올리신 것이었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주님을 직접 만나는 일. 아마도 이것만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일도 달리 없을 것이다. 구원받는 일도, 은혜 안에서 변화되고 성화의 골짜기를 걸어가는 일도 다 여기에 열쇠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큰 선물도,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직접 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신 것이었다. [예수께서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마가복음 15:37-38)] 욥 은 온갖 이해되지 않는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대하여 수많은 질문을 품었지만, 하나님을 만나뵌 그 자체로 그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마디도 그의 질문들에 대하여 직접적인 답을 주지 않으셨는데도 말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측면에서 뛰어났던 우리의 신앙적 선배들은, 우리의 신앙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가 일단 주님을 만나고 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변화와 영적 성장은 주님께서 친히 인도하시는 가운데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 마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모든 성도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직접 나아가는 일은 그들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사상이었고 이유였다. 그들은 면죄부나 공로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님 앞에 직접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으며,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교회 찬양음악을 정리, 보급함으로써 일반 성도들이 말씀과 찬양 가운데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제의 한 이름없는 유대 선지자의 이야기가 뜻밖에 전해주는 교훈의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주님의 백성이 그분 앞에 직접 나와서 진리의 말씀을 듣고 아버지와 교제하며 주인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는 일의 중요성은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일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여로보암에게 전달할 메세지를 받아서 전한 후에도 북왕국 선지자의 거짓말에 속지 않을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을 고려할 때, 북왕국 선지자의 교훈을 떠올리는 일도 중요하기는 매한가지이다. 내 스스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와 같이 되지 않으려면, 혹시라도 다른 영혼들에게 잘못된 주님의 뜻을 전달하여 실족하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 살펴야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영혼들이 각자 스스로 주님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교제할 수 있도록 인내 가운데 구체적으로 도와주고 권면할 수 있다면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들 모두가 결국에는 다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을 뵙기 원합니다. 오늘도 만나 주소서. 그리고, 내 주변의 다른 영혼들도 주님 앞에 스스로 나아가 주를 뵙는 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아말렉 족속: 천 년 동안 기다리시고 천 년 동안 이루시는 하나님


많은 사람들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 명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이해하기 어려운 성경의 사례로 꼽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했던 당사자들이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조상의 자손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진멸의 대상이 되는 후손들을 생각할 때 이를 사랑이신 하나님의 속성과 어떻게 연결하여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창세기 36장을 보면, 아말렉은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의 아들이라고 나와있다. 아말렉 족속의 조상 아말렉은 원래 야곱의 아들들, 즉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조상들에게 조카 뻘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창세기 이후에 성경에는 아말렉 족속이 크게 세 번 등장하는데, 모두 이스라엘 민족과는 더불어 살아남을 수 없는 원수의 모습으로 나온다. 일가 친척이 원수가 되어버리는 데에는, 모세 영도하의 출애굽 시절에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을 두려워 하지 않고 그들의 피곤함을 타서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치므로써 (신명기 25:17-18) 하나님을 대적했던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적군이 이겼던 유명한 전투가 바로 아말렉 족속과의 싸움이었는데,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는 각각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너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찌니라 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음성이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 시대를 지나 다시 아말렉의 이름이 이야기의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사울과 다윗의 시대이다. 사울 왕은 선지자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압도적으로 우세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적을 무찌르지만, 노획한 가축과 재물이 아까와서 진멸하지 않고 아말렉의 왕 아각을 살려두는 등 제한적인 순종을 하다가 하나님이 세우신 자리로부터 버림받는 직접적인 계기를 만든다. 한편, 다윗에게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의 모습은 출애굽 시대에 이스라엘에게 다가왔던 그 조상들의 모습과 더 유사하다. 그들은 사울왕의 위협을 피하여 블레셋의 영토인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의 진지를 습격하여 그와 그의 부하들의 가족과 재산을 약탈하여 간 것이다. 결국, 다윗과 그의 용사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힘입어 그들을 무찌르고 잃어버린 가족과 재산을 다시 찾아오는데,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사울왕이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던 남아있던 아말렉과의 싸움을 다윗이 본의로 (사무엘상 27장), 그리고 본의 아닌 사건을 통하여 (사무엘상 30장) 계승하여 수행하고 있는 점이다. 다윗은 아마도 하나님께서 아말렉 족속에게 두고 계신 진노의 말씀과 뜻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말렉 민족이 성경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은 에스더서에 나오는 페르시아 통치 시대를 무대로 하고 있다. 사울왕과 싸웠던 아각 왕의 후예라는 뜻의 아각 족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한번 등장하는 아말렉 족속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진멸하고자 일을 꾸미는 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아각 족속인 대신 하만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진멸하도록 왕의 조서를 꾸몄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구를 들이신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영적 분별력과 에스더의 헌신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을 구하고 오히려 아각 족속을 진멸하시어 출애굽기 17장과 신명기 25장에서 하셨던 말씀을 이루신다. 인터넷 성경이나 성경 CD-ROM으로 검색해 보면, 이 이후로 다시는 아말렉 족속의 이야기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모세가 출애굽하던 시기는 기원전 약 1500 년 전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사울 및 다윗 왕의 통치는 대략 기원전 1000 년 전, 그리고 페르시아 통치 아래에 있던 에스더의 시대는 그로부터 약 500 년이 흐른 뒤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고 말씀하신지 천 년 후에야 그 말씀하신 바를 이루신 것이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 중요한 하나님의 속성을 유추하여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비록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고 그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겠다 하셨지만 실제로 그 말씀을 이루기까지는 천 년이라는 세월을 돌아온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던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들 수 있다. 창세기 15:16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를 한 후에야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귀뜸해 주고 계신데, 그 이유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셨다. 사울-다윗의 왕국이 성립한 때로부터 북이스라엘과 남유대 왕국이 멸망한 때까지의 시간도 역시 마찬가지로 약 오백 년 정도였음을 고려하면, 죄악 앞에서는 자기 백성(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셨던 (로마서 11:21)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아모리 족속이나 아말렉 족속에 대해서도 비슷한 기간 동안 기다려 주셨음을 알 수 있다. 아직 죄악이 다 차지 않았다는 말씀은 그들이 아직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하기도 한다. 아말렉 족속의 경우에는, 약 오백 년이 지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이르렀음에도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만큼의 시간이 더 연장된 경우라고 볼 수도 있지만 말이다. 만일 그들이 돌아왔다면 하나님은 용서하셨을까? 악의 화신처럼 기억되고 있는 아합이나 므낫세 왕같은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겸손하게 회개했을 때 자비를 베풀기를 기뻐하셨던 하나님이셨음을 기억하면, 그가 얼마나 악인이었든 돌아오기만 하면 주님은 다시금 용서와 자비를 베푸셨을 것임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신할 수 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아직 하나님의 원수로 남아있었을 것임을 생각할 때 (골로새서 1:21), 아말렉을 기다리신 주님의 마음은 바로 지금 나를 기다리고 계시는 주님의 마음과 다름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호와를 만날만한 때에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불러서 (이사야 55:6)”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께로 돌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디모데전서 2:4)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그가 공의로 말씀하신 일에 대해서는 천 년이 걸리더라도 말씀하신 대로 신실하게 이루고야 마는 분이시라는 점이다. 세상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불의가 선의를 이기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면서 근심하고 낙담하게 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때에 이러한 하나님의 속성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우리가 수고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나서 그 일의 결국과 열매를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신실하신 주님은 그분의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일으키셔서 일을 성취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반드시 일을 지어 성취하실 것이라고 신뢰하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섬김의 현장에서 지쳐 쓰러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준다. 아말렉과 싸우는 일을 모세 때에 여호수아가 시작하여 다윗이 계승하고 그것을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완수하였듯이, 내가 지금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고 있는 하나하나의 사역들 역시도 지금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머선 하나님의 경륜과 시간대 안에서 계승되고 성취되어 그분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인내와 기다리심을 깨닫고 늘 주님께로 돌아오는 자 되게 하여 주소서. 나의 때에 주님의 일 이루어짐을 보지 못할지라도 주의 신실하심을 믿는 믿음이 늘 견고하게 하옵소서.


 


맺음말


주님의 섭리하심과 다스리심이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들 가운데서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의 몇몇 예에서 보았듯이, 조연들이나 단역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삶의 이야기에 주목할 때 우리가 얻는 교훈은 유명한 주연급 인물들의 경우에 비하여 작지 않은 때가 종종 있다. 이 점은 우리로 하여금 깊은 말씀 묵상에 대한 풍성함으로 우리를 안내하며 우리에게 성경을 보게 하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선사한다. (주관적이거나 감상적인 해석에 관한 우려는, 성경의 다른 부분에 있는 말씀들과의 상호 균형 및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맡기고 여기서는 염려치 않기로 한다.)


이렇게 깨달은 이야기들은 다음과 같은 유익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줄 것이다. 첫째로, 깨달은 성경 말씀을 더욱 큰 기쁨과 열정으로 증거하도록 도울 것이며, 둘째로, 우리 주변에 이름도 빛도 없이 묻혀있는 사람들의 삶의 의미를 발굴하는 시야를 키워줄 것이며, 셋째로, 나 자신 주님 뜻 안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이 시대의 조역과 단역을 맡는 일을 더 의미있게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과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브리서 1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