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1월


들어가기


성 경에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야기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수한 환경과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부르심을 접하게 되며, 거기에 대하여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였고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구체적으로 보게 된다. 이야기에 나오는 한 시대와 인물의 특수한 상황 안에 나 자신을 투영해 보는 일은 결코 놓칠 수 없는 묵상 포인트의 하나이기도 한데, 그것은 이러한 과정들 가운데서 성경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동일한 생명력을 지닌 입체적인 말씀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 야기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므로 우리는 어느 특정 인물의 입장에 선택적으로 서보게 된다. 이야기의 흐름이나 주제와 가장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사람이 주인공이니 만큼 아무래도 그들의 입장에 서는 경우가 많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다가 시각의 폭을 넓혀서 조연들이나 단역들의 입장이 되어보기도 하는데, 이때에는 상대적으로 그 의미나 교훈을 건져내기가 쉽지 않거나, 아니면 반대로, 뜻밖의 깨달음을 선물처럼 얻게 되기도 한다.


성 경에 나오는 조연과 단역들에 대하여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은 열왕기 시대의 이야기들을 묵상하면서 부터였다. 왕 한 사람이 정직한지 악한지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의 삶이 좌우되는 것을 보면서, 그렇다면 일반 백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의미는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궁금함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이름도 빛도 없는” 이들이 많이 나오지만, 대개 본문은 그들의 생각과 판단에 대하여 많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인생들의 구체적인 모습이나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관찰과 묵상이 요구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경의 다른 곳을 살펴보기도 하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다양한 일들의 인과관계를 성경적 원리라는 보편성의 빛 아래에서 음미하면서 시공을 초월한 두 시대의 상황들을 오버랩해보기도 한다. 오늘의 삶을 관찰하는 일은 성경의 이야기 안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도와주고, 그들의 삶을 묵상하는 일은 오늘의 삶을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런 경우에, 이 시대의 한 부분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이야기는 더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 된다.


그 래서, 때때로 묵상 가운데 건져올린 작은 깨달음 하나가 우리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깨닫게 하는 신선한 시각을 주기도 하는데, 이렇게 얻는 깨달음은 그 대상 인물들이 이야기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것처럼 스쳐 보내기에는 아까운 것인 경우도 종종 있다. 성경에 잠시 등장하는 인물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특별한 묵상의 의미를 주었던 이름들에는 아벨, 에서, 이름 모를 선지자들, 그리고 아말렉 족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1. 아벨: 이 생을 넘어선 영원으로의 시각


아 벨은 하나님 앞에서 제사 한 번 잘 드린 죄 아닌 죄로 인류 첫 살인 희생자가 되었으며, 가해자 가인은 모든 범죄자의 조상이 되었다. 가인은 결국 자기 죄에 상응하는 징계를 받았고, 또한 하나님의 긍휼의 손길도 경험하였다. 다만 아벨의 입장에 섰을 때 의문을 감추기 어려웠던 것은, 가인이 자기 죄에 합당한 형벌을 받았다고 해서 이미 죽임을 당한 그의 억울함이 온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었다. 내가 아벨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흠 없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받았어야 할 기본적인 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끔찍한 일 가운데에 그대로 내버려졌다고 혹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아 벨에 관하여 그의 입장에서 곰곰히 생각해보면, 비록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는 몹시 억울하고 고통스러웠겠지만, 사실 그는 그 모든 일들 가운데서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아벨이 자기에게 닥친 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벨이 죽었을 때는 인류 최초의 인간이었던 그 아버지 아담조차 아직 생존해 있었다. 따라서, 아벨이 천국에 들어갔을 때, 그곳은 아직 텅 비어서 하나님과 천사들 이외에 사람의 영혼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입성한 유일한 인간이었으며, 오히려 천국의 ‘설립자 스탭 (founding staff)’의 일원으로서 늘 주님 가장 가까이에서 동행하고 동역하면서 이후에 올 모든 영혼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먼저 된 자로서 섬김어린 주인의식을 가지고 다른 영혼들의 처소를 주님과 함께 마련하고 있었을 그의 마음은 지극한 영광스러움과 보람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더구나, 계시록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순교자들이 먼저 살아나서 주님의 다스리심에 참예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인류 최초의 순교자인 아벨은 천국의 맨 처음에 함께했던 사람이자 세상 끝날에 맨 먼저 예수님을 보좌하는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있어서 아벨은 가엽고 안타깝게 생각되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부러워해야 할 대상이 아닐런지…


우 리는 종종 선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형통하며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언제나 공평하게 이루어지지만은 않음을 목격한다. 죄에 의하여 왜곡된 세상이 되므로써,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반하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세상의 참 주인이심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일들 또한 하나님께서 그리 되도록 허락하신 것이 아닐 수 없음을 기억하게 된다. 이 생각은 더 큰 깨달음으로 우리를 인도하는데, 즉 조금의 불완전함이나 부당함도 용납하실 수 없는 주님께서 이 모든 일을 허락하셨다면 그것은 이 땅에서의 일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무언으로 역설하시는 그분의 메세지일 수 있는 것이다. 이 땅에서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었을 아벨이 천국에서 얻는 더 큰 행복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일과 결과에만 집착하곤 하는 우리의 시선이 얼마나 현세적인 것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하나님의 다스림의 영역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이 땅으로부터 영원으로까지 확장될 때, 이 세상의 일들 가운데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수 많은 의문들 역시도 비로소 많은 부분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벨은 그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의 삶이라는 시각을 일깨워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생을 넘어선 저 생의 소망을 가지고 경주하도록 큰 위로와 격려를 주고 있는 것이다.


“주님, 나로 하여금 땅만 보고 사는 자 되지 않게 하사, 눈을 들어 하늘을 보게 하여주소서…”


2. 에서: 물질을 구하는 자 물질로, 영혼을 구하는 자 영혼으로


야 곱의 꾀에 넘어가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의 입장에 섰을 때 이해하기 어려웠던 점은 차별에 관한 문제였다. 약삭빠른 야곱은 이십 여년 간이나 인생의 쓴 맛을 경험하였지만 마침내 그 소원대로 영적 장자가 되어 그 자신이 하나님 백성인 이스라엘이 되었다. 그러나, 에서의 경우에는, 겨우 어릴 때의 작은 실수로 여겨질 수도 있었을, 소위 ‘팥죽 사건’에 대하여, 그는 끝까지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그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하였고, 친아버지에게서 조차도 축복을 얻지 못하였다고 성경에는 나와 있다. 그렇다면, 야곱과 비교할 때 에서에게 주어진 이 모든 처사는 과연 공평한 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에 서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을 받지 못했을 때 무척이나 서러워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영적인 의미에서였는지 현세적인 의미에서였는지는 해당 본문만으로는 판단하기가 다소 불분명하다. 다만 그가 하나님의 주 되심 앞에 인격적으로 나아가길 소원했다는 이야기가 성경의 다른 곳에 더 언급되고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때,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물’ 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랬다면, 그는 애초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지 못하게 된 줄로 알고 슬퍼하였지만, 사실은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을 다 얻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창세기에 에서의 소유가 풍부하였다고 언급된 것이나, 훗날 야곱과 재회할 때 그가 사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이끌고 나타날 수 있었던 모습으로부터, 우리는 에서가 약 사천 년 전 부족국가 시대 당시에 권세있고 풍족한 왕과 같은 지위에 있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세적인 부귀와 복을 원했던 에서의 경우에 하나님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해주셨고, 그리하여 그는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오히려 야곱을 능가하는 가진자와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너의 형제니라… 그들의 삼대 후 자손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신명기 23:7-8)


성 경을 보면,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실 것이라는 우리의 막연한 생각과는 다른 말씀들이 눈에 띈다. 위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에서의 후손은 형제라는 점을 강조하고 계신다. 모압이나 암몬 족속과는 달리, 그들은 여호와의 총회에도 들어올 수 있었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되는 일에 있어서 에서의 후손들은 이스라엘 후손들과 삼대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지위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온전히 열려있었던 것이다.


다 만, 영원한 것을 구하지 않았던 에서에게는, 야곱과는 달리 이 세상의 울타리 너머에까지 면면히 이어질만한 삶의 영적인 의미는 없었다.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삶을 살지 않았던 에서였기에 하나님은 삼대의 간격을 두셔야 하셨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서 우리는, 에서가 하나님을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버리지 못하여 후손들에게나마 하나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두고 계시는 ‘하나님의 기다리심’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인격적이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의 참다운 면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에 비추어 곱씹어볼 때, 에서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이 그를 싫어하셨다는 말은, 실상은 그의 미래의 모습을 현재처럼 볼 수 있으셨던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된 중심을 미리 보아 아시고 그 중심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던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그가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는 말씀도, 결국은 팥죽 사건으로 표면화된 그의 내면의 중심이 그의 평생을 사는 동안 변화되지 않고 지속되고 있었다는 의미와 다름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에서야말로, 잘못된 인생의 선택과 죄된 삶의 모습들 가운데서 더욱 충만하게 드러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인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하 나님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에, 그의 삶에는 더욱 안타까운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가 자신의 소원에 따라서 현세적인 부귀를 누렸지는 모르지만, 그러는 동안 그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눈길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그분께로 돌아갈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혹 마음의 문만이라도 열었더라면 언제고 그의 안에 들어와서 그와 더불어 잡수셨을 주님이, 그의 평생이 다가도록 문 밖에서 기다리기만 하시다가 결국 들어오지는 못하셨다면 주님의 마음은 또 어떠하셨을까?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구하고 그분을 소원하였을 때 닥쳐오는 고난이 실은 그분의 섭리 안에서 우리를 향한 큰 복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야곱의 인생의 경우와 강렬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에서의 삶이 주는 가장 큰 교훈의 하나는, 내일 일 조차 알지 못하는 나의 소견에 옳은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삶 가운데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함을 아는 일이다. 우리는 때로, 잘못된 기도제목이었지만 강청하며 기도하였더니 그 소원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오히려 영적 위기를 뜻할 수 있음을 우리는 에서의 인생이라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하여 배우고 있다. 그리고, 혹 세상에 한눈 팔다가 주님 아닌 다른 것을 붙잡은 경우라 하더라도, 우리를 향한 지극한 은혜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 채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함을 에서의 삶은 우리에게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주님, 어리석은 나의 소원대로 이루지 마시고, 오직 완전하신 주님의 뜻에 따라 나를 이끌어 주소서…”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