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2년 6/7월호

환경에 대한 크리스챤의 자세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는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환경과 환경문제에 대해 살펴 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현재와 미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성경적인 자세를 살펴보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폐기물 처리문제, 오염된 물 정화, 오염된 땅의 정화, 대기질의 향상 등의 구체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기술적인 해결책을 제기하는 대신에 필자의 능력의 한계와 지면의 한정됨을 고려하여 성경에 바탕을 둔 기본적이고 원론적인 자세에 초점을 맞춰 논의를 진행하려고 한다.


1. 환경문제의 재조명


세계교회협의회(WCC)는 1989년에 발간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이라는 보고서에서 세계의 종말적인 위기 상황을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1. 매일 생물종이 하나씩 멸종하고 있다

  2. 매년 남한 면적의 3/4 크기의 열대림이 파괴되어 없어진다.

  3. 지난 몇 십년 동안 매 십년 마다 해수면이 높아져 왔다. 이는 지구가 뜨거워지는 추세에 따른 것으로 우리 지구와 전 인류의 비참한 결과를 암시하는 것이며 이 추세는 앞으로 계속 될 것이다.

그 때로부터 10년이 훨씬 넘은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 화석연료의 과다 사용으로 인해 현재의 소비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면 지구의 대기 온도가 오는 21세기 중반에 화씨 4도에서 15도 정도나 상승할 것이라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남미의 아마죤 (Amazon)은 축구장 만한 크기의 열대림이 하루에 벌목 되어 사라지고 있다고 보고되고 있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지만 그들의 경제문제는 여전히 힘든 상태이다. 열대림 및 전지구적인 삼림벌채로 인해서 토양유실, 온실효과, 물 부족 및 홍수 등의 문제가 우려되고 있다. 화학혁명으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생겨나는 화학물질로 인해 자연계 및 인간의 건강 등이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지난 97년 이후 한국을 포함한 많은 개발도상국들이 IMF 위기를 맞았고 아직도 그 여파에 시달리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사슬처럼 묶여 있는 경제 공동체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다. 환경문제는 경제문제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만큼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당분간은 개발도상국들에 국한된 문제가 되겠지만 얼마 후에는 전 지구적인 위기가 될 것이다.


2.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성경적인 입장


지난 호에서도 살펴 보았듯이 이러한 환경문제의 원인은 흔히들 지적하듯이 인구의 증가나 통제되지 않은 기술개발 등에만 있지는 않다. 성경적으로 보면 오히려 피조물인 인간이 자연을 착취하고 이기적인 동기로 모든 관계를 어그러뜨리고 악화시킨 교만과 욕심이 모든 환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환경문제는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하나님이 된 후 하나님을 중심으로 맺어진 모든 관계가 깨어지면서 생겨난 엄청난 무질서의 결과이다. 인간과 자연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생겨난 관계의 파괴가 빚어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닥쳐 올지도 모를 환경의 위기를 사전에 예방하면서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성경적인 자세는 무엇일까? 본 고에서는 그러한 성경적인 입장을 창조신앙, 속죄 (십자가)신앙, 부활 및 재림 신앙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한다.


1) 창조신앙의 입장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을 포함한 온 세상의 주인이 되심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곧 인간과 다른 피조물의 관계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같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같은 피조물로서 다른 피조물을 돌보는 관리자의 책임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다. 사물의 이치를 잘 알아서 이름을 짓고 이름을 지은 책임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짓고는 평생토록 자식의 삶을 책임지며 돌보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러한 고귀한 권한과 의무를 인간에게 주셨다.


창조신앙은 또한 우리에게 주인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순종을 가르쳐 준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시면서 또한 생명의 주인이시다. 친근함에 있어서 아버지라고 한다면 권위와 질서의 면에서 하나님은 인간의 주인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주인의 뜻을 잘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그대로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은 창세기 1, 2장, 이사야 11장, 35장 등에서 나타나는 모든 피조물이 조화를 이루어 잘 사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화의 중심에 바로 인간이 있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힘과 성령의 인도에서 나오는 지혜를 동원하여 피조물들의 특성에 맞게 잘 섬기고 스스로의 행동이 다른 피조물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주인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피조물을 근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서 로마서 8장 21절에서 모든 피조물들이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고 있다고 한 것은 아닐까?


창조신앙에 들어가게 되면 인간은 인간만의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인간중심주의에 기반을 둔 모든 시도들을 포기하게 된다.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지상주의에 빠져서 무한 성장을 통한 ‘문명의 발전’을 추구해 오던 노력들을 재점검하고 방향을 선회하게 될 것이다. 창조신앙의 확고한 정립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우월주의와 욕망절대주의를 벗고 인간과 자연의 조화는 물론 인간 자신의 생존을 가장 확실하게 보장 받게 될 것이다.


2) 속죄신앙 (십자가) 신앙의 입장


우리 기독교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기반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속죄의 신앙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대속의 피로 인하여 죄 씻음을 받게 되었다. 여기서 죄 씻음이라 하면 구약적인 의미에서 보여지는 율법적인 의미의 개별 행위에 대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본질적인 죄인 ‘교만,’ 즉 인간이 하나님이 되려 했던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단절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즉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와 자격의 회복이자 책임과 의무의 부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게 되고 그 아버지를 더욱 깊이 알아갈수록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 속죄의 신앙 (십자가의 신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 인간의 어떠한 노력도 속죄를 위해 필요하지 않았으며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의지와 사랑으로 이루어 내신 은혜의 산물이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어그러진 관계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고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멸시와 냉대를 무릅쓰고 결국 십자가의 희생이 되셨기에 우리의 구원이 이뤄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속죄 신앙이 자칫 소극적이고 패배적인 모습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십자가에 담겨 있는 깊은 힘을 모르고 겉으로 나타나는 것만 보았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십자가의 신앙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의 시각과 은혜의 시각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오직 성령의 힘을 의지하면서 예수께서 가셨던 고난의 길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면에서 세상의 어떤 철학적인 시도보다 심오한 가치를 지닌다.


우리는 십자가의 신앙을 통해 참 회복과 희생의 자세를 갖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회복해 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이웃인 사람들과 자연 만물들과 회복과 조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와 이성을 동원하여 이웃과 자연 만물들과 하나됨을 이루어 낼 수 있게 된다. 오직 십자가의 신앙만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하여 마치 부모가 자식들을 위해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듯이 전체의 질서와 화합을 위해서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고 조화를 선택하게 한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불고있는 이기적인 기복신앙은 기독교의 십자가 신앙을 뿌리부터 뒤흔들고 있다. 인간의 필요만 채우려고 기술을 개발하고 그 결과는 책임지지도 않는 경제 중심적인 제 행위들을 기복 신앙의 하나로 보면 무리일까? 우리가 입으로는 환경, 환경 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정작 어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 국가적으로나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모두 다 돈 되는 일이면 혈안이 되어 사람도 해치고 땅도 해치고 있으니 기독교의 정체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인 의식과 계명들은 거창하지만 정작 십자가의 신앙이 드러나야 할 곳에서는 모두 숨어 버리고 진지한 타 종교인이나 무신론자들에게 자리를 겸손히 (?) 양보하고 있다. 그러한 세속적인 일들에는 드릴 시간적인 여유도 없으며 거룩한 (?) 일들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들을 들면서…


하나님이 지으시고 좋았더라고 하셨고 우리에게 잘 관리하라고 맡기신 세상. 십자가의 신앙을 통하면 인간의 타락으로 함께 신음하고 있는 피조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게 된다. 아니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서 현재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의 세대들이 겪어야 할 아픔까지도 보게 될 것이다. 어느 곳은 부가 편중되어 가난에 찌들고, 어느 곳은 경제를 살리기 위해 외국 기업의 위험한 쓰레기를 들여와야 하고, 어느 곳은 배고픔으로 인해 자식마저 먹어야 하고, 어느 곳은 숨쉴 수 없을 만큼 공기가 나빠져서 사람들의 건강이 극도로 나빠지고, 어느 곳은 먹을 물이 없어 헤매며, 결국 전쟁으로 연결될 이 땅의 처절한 아픔들을…


십자가의 신앙으로 우리는 이 손해나는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라고 하는 예수님의 자신의 삶과 구원의 도리를 가리켜 말씀하신 이 절대 진리의 말씀을 오늘의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가르침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지금의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발걸음으로 그냥 걸어가면 우리는 머지 않은 장래에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될 것이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이천 년 전에 십자가를 지셨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과 앞으로의 세대를 위해 예수께서 지셨던 십자가를 자원하여서 지고 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가정에서, 각자의 학문 영역에서, 각자의 직업에서,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현장에서, 국가의 정책이 입안 되는 과정을 감시하는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흐름을 파악하고 그에 적절한 대응을 해 가면서…


3) 부활과 재림 신앙의 입장


기독교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 죽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였다면 부활은 우리에게 이 땅에서 고난과 희생과 화합의 삶을 살아갈 근본적인 힘과 소망을 줌으로써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기 때문이다. 부활은 또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과 연결되어있다. 구원으로 인한 위로가 우리에게 있지만 결국 부활과 재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자칫 왜소해 지기도 하고, 오만해지기도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세상과 대립적인 입장에 섰던 것처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세상과 반대적인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의 주권과 아버지 됨을 거부하는 모든 인본적인 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겉으로는 평화와 화목을 도모하는 것처럼 보여도 참 중심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신 사랑과 겸손이 없다. 따라서 세상적인 시각을 가진 대부분의 시도들은 인간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려 할 뿐 진정한 조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인간마저 스스로 파놓은 함정에 빠져 버리게 할 뿐이다.


부활과 재림을 생각하지 않게 되면 이 세상만을 바라보게 되어서 극한 어려움이 오게 되면 자포자기의 모습이 되어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서로 간에 양보나 포기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고 어떻게든지 이땅에 있을 동안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가지려고 발버둥을 치게 된다. 여기에서 부활과 재림신앙의 중요함을 더욱 볼 수 있다.


재림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자칫하면 염세적으로 될 가능성이 있으나 그것은 재림의 근본 정신이 결여된 데서 오는 현상이다. 재림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뵈옵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마다 신랑이신 그 분을 얼마나 기억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갔는지를 고백하고 위로를 받는 환희 그 자체이다. 재림 때에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있을 동안 맡기신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고 사용하여 마지막 주인에게 보고하고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된다. 한 번 뿐인 세상이니까 적당히 살자는 생각은 십자가와 부활, 재림의 신앙을 전제하면 결코 할 수 없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 (계 21장)은 바로 이런 눈물어린 기다림이 전제된 것이라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재림 때에 모든 것이 다시 주어지니까 마구 파괴하며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불신에서 출발한 질문에 불과하다.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근거할 때만 현실에서의 우리의 삶이 가장 잘 깨어 있게 되고 모든 기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 안에서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며 아끼고 돌보아야 한다. 본향으로 돌아갈 나그네로서, 신랑을 맞이할 신부로서…


3. 실제적인 대안들


창조신앙, 십자가의 신앙, 부활과 재림의 신앙으로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환경을 보호하고 서로 화목하게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일까? 각 개인이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삶의 예배를 드릴 제사장들로서 개인, 가정, 지역, 국가, 세계 차원에서 할 수 있는 대안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 이유는 각 개인이 바로 작게는 가정 크게는 우주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이 모든 영역의 관리자 또는 제사장으로 부르셨다. 따라서 모든 일에 있어서 우주적인 시각과 종말적인 시각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 작은 의사결정에서부터 국가적인 의사결정에 까지 세심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1) 개인


먼저 개인은 가장 기본적인 구성단위로서 하나님 중심의 사고에 기반을 둔 건강하고 독립적인 세계관을 키워가야 한다. 창조, 십자가,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투철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들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가깝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부터 멀리는 우리의 시야를 벗어난 우주까지 하나님의 눈으로 사랑하고 보살피는 마음이… 이 마음으로만 개인이 날마다 숨쉬고 먹고 쓰는 행위들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충만하여 어떠한 조직이나 세상의 압박과 꾀임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의사를 결정하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개인이 절실히 필요하다. 모든 정치 경제적인 갈등구조에서 파생되는 이익의 부조화 속에서 참 신앙과 현실에 바탕을 둔 지혜와 지식을 동원하여 화목을 이루어내는 한 사람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어느 그리스도인이 과학자로서 기술을 개발하려는 아이디어를 구상하거나 실제 실험을 하게 되었을 경우 그 기술의 득과 실을 잘 알 수 있는 현실적인 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혹시 그것의 위험이나 좋은 점을 발견하였을 때 국가적인 이익과 조직의 이익과 상반되어 많은 반대와 위협을 무릅쓰게 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여 담대히 나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필자의 전공인 도시환경계획 분야를 포함해서 인간의 활동이 관련된 모든 영역에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날마다 성령에 충만하고 성경의 진리로 무장하여서…


2) 가정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기본적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의사결정이 곧 더 큰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각 가정은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좀 더 공동체적인 시각에서 경제행위를 비롯한 대 사회 관계를 가져야 한다. 가정은 엄연히 한 개인을 넘어선 국가나 인류 공동체의 공적 기관이므로 각 가정의 구성원들은 의사결정에 있어서 책임감을 갖고 임해야 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자연 및 관계들을 대하고 이용할 때 가정 나름대로 바람직한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이웃과의 연대를 추구해야 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든 에너지를 사용할 때 가능한 만큼 아끼고 자연의 질서를 깨뜨리지 않는 길을 찾아가려는 시도를 할 필요가 있다. 수돗물과 전기를 쓸 때, 쓰레기를 버릴 때, 교통수단을 선택할 때 가능한 대로 환경 친화적인 방법을 찾아서 실천해야 한다.


3) 공동체 (교회, 학교, 마을, 직장 등)


개인이나 가정이 비슷한 기호, 종교, 지리적인 위치, 경제행위를 중심으로 뭉쳐서 이룬 기관을 우리는 공동체라 부른다. 대부분의 공동체는 경제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게 되는데 각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상황에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의견을 개진하고 필요하다면 정보를 공유하며 설득력 있고 전체의 공감을 얻어 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교회를 포함하여 의견을 같이하는 작은 공동체와 함께 대 사회적인 역할도 감당할 필요가 있다. 공동체적으로 주위의 어두운 곳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환경적으로 열악한 곳들을 찾아 고발하고 건설적인 대안들을 모색하도록 정부의 관심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유해한 정책결정에 대하여 적극적인 감시자 역할도 해야 한다. 각 교회나 공동체에서는 환경문제 뿐만 아니라 각 정치 경제 인권문제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 적극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다수의 힘과 자본의 힘이 지배하고 있으므로 뱀 같이 지혜로운 자세로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제 사건들에 심도 깊은 관심을 표현해야 한다. 흔히 재세례파로 구분되는 메노나이트 교도들은 미국의 종교단체로서는 유일하게 워싱톤에 대표부를 설치하고 각종 법제 및 정치적인 이슈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현실 안주적이고 이기적이며 좁은 시각을 반성해야 할 것 같다.


환경문제는 몇몇 전문가들이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개인과 국가가 함께 노력하여 풀어가야 하는 인류 공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환경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영역과 관련되어 있어서 어느 누구도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우리의 발걸음이 세심하게 신경 쓰지 않으면 환경을 악화시키고 결국 우리 자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의 삶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며 이 땅의 관리자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환경문제는 더 더욱 중요한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개인은 물론 교회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빨리 인식하여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뜻에 맞게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 가는데 힘을 모아야 한다. 창조의 신앙과 십자가의 신앙과 부활과 재림의 신앙에 굳게 서서…


끝으로 알트너가 제시하는 몇 가지의 실천방안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는다.



  1. 자연자원을 최대한 아껴쓰고 재생이 가능한 자원은 재생하여 다시 사용한다.
  2. 생태계의 균형을 충분히 고려하고 그것을 파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태계를 사용해야 한다.
  3.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주로 경제적, 정치적 관심에서 발전되었으나 앞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행복을 위하여 봉사하는 목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 발견되는 과학기술이 생태계에 대하여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가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4. 지금까지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이 별다른 고려 없이 함부로 사용되었으나 앞으로는 땅과 바다와 우주의 공간은 책임적이며 이성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것이다. 바다와 우주 공간에 핵 폐기물을 버리는 행위는 철저히 금지되어야 한다.
  5. 지금까지 묵살되어 온 힘없는 사람들, 특히 후진국 국민들과 말을 하지 못하는 자연의 삶의 권리와 존재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6. 언젠가 고갈될 수 밖에 없는 에너지 자원을 무계획적으로 사용함으로써 각종 오염과 파괴를 유발하였으나 앞으로는 고갈되지 않으며 오염과 파괴를 일으키지 않은 에너지 자원, 예를 들어 태양에너지, 물과 바람의 에너지를 개발하여 사용해야 한다.
  7. 지금까지는 핵무기, 화학무기, 광학무기 등의 현대무기를 통하여 평화를 보장하려 하였으나 앞으로는 무기의 제한과 폐기, 평화조약 등을 통하여 세계평화를 보장해야 한다. *

* 이인우, 1995, 자연환경에 대한 일반 은총적 인식의 중요성, 1996년 기독학문학회 발표문. p.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