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5년 6/7월호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 복음과 민족 1

미국에 이민 온 1.5세나 혹은 2세 그리스도인들이 미국 땅에 살면서 꼭 돌아보게 되는 질문이 있다. 미국유학 후 미국에서 취직할지 아니면 한국에 돌아갈 지를 결정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장기적으로 당면하게 될 질문이 있다. 한국 땅에 살면서, 혹은 외국생활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한국인이라고 느끼는 그리스도인들이 묻게 되는 질문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민족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질문을 제기하면 어떤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새삼스럽게 묻느냐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복음의 보편성을 넘어서 쓸데없는 민족주의를 자극하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많은 분들은 이미 이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해답이나 선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어느 하나의 입장을 취하게 되면 반드시 논쟁을 야기할 수 밖에 없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내가 고민해 온 주제일 뿐 아니라 또 앞으로 내가 사역하고자 하는 방향과도 관계되기에, 독자들도 기존의 선입관을 내려 놓고 기초부터 함께 생각해 수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는 모든 신자들이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여 한 하나님에 속한 자임을 말하는 구절들이 많이 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빌 3:20).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없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이니라”(갈 3:28),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롬 10: 12),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 줄 알지어다”(갈 3:7). 한 마디로 모든 신자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늘에 속한 자라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를 제대로 받아들이는 자라면 이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으며, 이 땅에서의 신분이나 모든 것은 일시적인 것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약에서 이스라엘이란 한 특정 민족을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민족이 얻게 될 구원의 한 모델로 선택하셨지만, 예수님이 오신 이후 그 특수성은 사라지고 모든 민족에게 동일하게 임할 구원의 복음만이 남게 되었다.


그렇다면 오늘날 국가와 민족이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국가간의 분쟁이나 이해관계에 있어서 전쟁의 위험을 무릎쓰고 그렇게 매달릴 필요가 있는 것인가?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그리스도안에 있다면 한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미국인이 된다는 것이나 일본인이 되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다 동일한 것이 아닌가?


사실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고 나 역시 한 때는 이런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성경을 가만히 읽다 보면, 미묘한 부분들이 발견된다. 바울은 주안에서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한 바로 그 로마서에서 자신의 민족과 혈육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들을 토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 9:2) 그는 얼마나 자신의 동족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었으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의 구원을 원하고 있다고 자신의 양심을 걸면서 까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로마서 10:1에서는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나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라고 말한다. 바울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복음안에서 한 자손임을 믿었지만, 여전히 자신의 골육과 친척에 대한 우선적 책임감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당위적 명령이 아니라 바울이 가졌던 애정에 대한 사실적 표현이기 때문에 이 자체가 곧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명령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 구절들을 가지고 ‘민족주의는 성경적이다’ 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사실(IS)에서 당위(OUGHT)를 추론하는 ‘자연주의적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지만, 적어도 사도 바울이 그랬다는 것은 우리 역시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 줄 수는 있다.


그러면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말하는 직접적인 명령은 없는가? 사실 성경, 특히 신약에서 이 부분에 대한 명시적인 구절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시사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는 있다. 바울은 과부나 나이 든 부모를 봉양할 우선적 책임이 그 가족과 친족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 5:8) 즉 신자일수록 자기 가족과 친족에 대해 일차적인 책임이 있으며 더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족과 친족에 대한 의무는 구약에서부터 강조되어 온 것이다.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레 25:25) 즉 형제가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 그의 친척이 그것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심지어 형의 아내가 과부가 될 경우에는 동생이 그 형수와 그 재산을 책임질 의무까지 부여하고 있다(신 25:5-10). 이러한 친족에 대한 의무는 바울의 말을 통해 신약에 와서도 형태는 다소 변해도 신자의 공동체 내에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가족이나 친족은 기본적으로 혈연적 관계이다. 이것은 이 땅에서만 유효할 뿐 하늘나라에 가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제도이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결혼제도 자체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이 천사와 같은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마 22:30)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족이나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땅에서만 유효한 제도라고 하더라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조금 더 확장하면 민족과 국가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물론 민족과 국가는 엄밀히 말하면 동일하지 않겠지만 우리나라처럼 단일민족 국가에서는 동일시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족과 친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이 있다면, 그 관계가 가족보다는 상대적으로 느슨해 졌을 지라도 민족과 국가도 혈연적 유대로 이루어진 공동체인 한, 국가와 민족에 대해서도 우선적 책임을 가진다. 적어도 이 땅에 있는 동안에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대한민국 땅에 태어나게 하셨고 한국인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면, 우리는 이 땅에 있는 동안 좋든 싫든 한국민으로 살아야 하며 동족에 대한 우선적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여러 사람가운데서 일차적으로 부모를 전도할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의 동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것은 성경적인 정신이 부합한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다. 각 개인들은 국가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면 국가가 하는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가지는 공동체적 운명을 갖는다. 나는 내가 목회를 하기 전 한 때 철학을 공부하면서, 코넬대에서 박사후 과정으로 집단윤리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집단윤리의 핵심은, 국가와 같은 집단은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을 넘어선 어떤 공동체이며, 이 집단의 행동에는 그 구성원들 모두가 함께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이나 일본이 이웃나라를 침략했다면 그 집단행동에는 그 나라 모든 국민들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으며, 따라서 모든 국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행동에 대한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국민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행동에 대해 책임있게 결정해야 하며, 그 결과에 대해서도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 개인과 그가 속한 집단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는 성경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할 때는 그 가운데 개인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 징계의 채찍을 그 국가 전체에 함께 내리셨다. 가데스바네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신앙의 행동을 했을 때, 비록 여호수아와 갈렙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함께 40년동안 광야의 생활을 해야만 했다. 또 유다왕국의 말기에 예레미야나 에스겔, 다니엘과 같은 선지자들은 그 자신은 비록 의인이었을지 몰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범죄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도 국가에 대한 징계의 현실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국가 전체의 책임을 묻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은 개인과 국가의 운명이 별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우리나라가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경제적 위기나 전쟁의 채찍을 맞는다면, 비록 그 가운데 의인이 있고 참 신앙인이 있다 하더라도 어느 사람도 그 운명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비록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 책임은 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 국가적 형벌의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은 별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국가와 민족에 대해 더더욱 우선적 책임감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그리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욱 더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신앙인들에게 있어서도 나라와 민족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아니 신앙인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 나라와 민족을 보면서 안타까와 하며, 울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신앙인들을 찾고 계신다. 예레미야나 다니엘처럼, 나라와 민족의 죄가 자신의 죄인 것처럼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계신다. 우리 모두 이러한 부름에 응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