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2년 10월호

어린 형제 둘이 장난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아무리 중간에서 설득하고 말리려해도 둘 다 고집을 꺽으려 하지 않습니다. 갖고 싶은 욕망이 서로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어머니가 나섭니다. “애들아, 평소에 엄마나 아빠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가르쳤지? 서로 양보하라고 했지. 형제끼리 서로 사랑하라고 늘 말하건만 너희는 어찌 그리 서로 위하고 사랑할 줄을 모른단 말이냐?” 어머니의 화난 목소리에 아이들은 잠시 주춤하고 서있겠지요. 하지만 잠시 후 다툼은 다시 시작됩니다. 참다 못한 어머니가 개입을 합니다. “형인 네가 양보해라” 또는 “동생인 네가 차례를 기다려라.”

형이 양보하고 나면 동생은 금새 얼굴이 밝아지지만 한쪽에 물러선 형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엄만 왜 동생만 사랑하는 거죠?” 동생이 양보해도 똑같은 상황이 연출되겠지요. 물건을 갖겠다는 욕망이 이제는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질투로 바뀌고 만 것입니다. 어머니는 벌을 주거나 둘을 앉혀 놓고 긴 이야기로 훈계를 하기도 합니다. 영리한 아이들은 이내 반성을 하고 서로 사과를 합니다. 그러나 다음날이 되기도 전에 또 다른 일로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곤 합니다.

카인은 하나님께 왜 아벨만 사랑하느냐고 따지고 들었습니다. 자신의 심중을 읽으시는 하나님의 눈보다는 아벨의 제사를 기꺼이 받으시는 하나님께 질투하였습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을 질투하여 죄를 공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의 모습입니다.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한 끝없는 욕망과 탐욕, 내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갖고 있는 사람에 대한 질투. 살아 숨쉬는 동안 우리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본능이기에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인간이 이룩하는 문화적인 환경과 지적인 산출은 무언가 이루고자하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상승하려는 의지와 경쟁력도 질투심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릇되고 지나친 욕망과 시기심은 온갖 인간의 범죄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 자신을 스스로 자제하고 길들여야하는 것이 모든 종교와 도덕의 과제가 되어 온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라, 사랑을 실천하라, 배려하고 격려하라, 양보하고 겸손하라…. 얼마나 아름답고 근사한 마음과 행동에 대해서 들어 왔는지 모릅니다.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라는 책제목처럼, 어릴 때부터 귀에 익어온 말들입니다. 모든 책들은 권선징악과 인과응보에 대해 말해 주고 모든 종교는 선한 마음과 영혼에 대해, 삶의 결과에 대해 말해 줍니다. 진리는 간단한 명제처럼 보이지만 거기에 이르는 길에는 지름길이 없어 보입니다. 그렇게 많은 교육과 선포를 통해서도 인간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에 늘 좌절하게 되니까요.

어머니가 화를 내며 서로 사랑하라고 했다고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사랑과 자비심이 생기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불교에서는 타인의 상황을 자신에게 감정 이입시키면서 자비심을 유발시키는 수행법(통렌명상)을 통해서 선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훈련을 하기도 합니다. 따끔한 지적을 받거나 어떤 상황을 통해 스스로 깨닫고 뉘우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는 정신적으로 지적(知的)으로 각성하고 실천하는 인간의 능력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며,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도덕적 능력에 자긍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능력이 우리의 본능적인 막강한 힘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너무나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이성적인 판단보다는 당장 자신의 유익과 편리함, 자아의 완고함에 이끌릴 때가 더 많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위함인가 숙고하게 됩니다.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며 또는 목사님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설교를 상기하며 행동을 반성하고 매순간 다짐하고 결의하는 것인가 하고 자문하게 됩니다. 아, 미워하고 시기하지 말라고 했지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것,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의 의미는 나의 전(全)존재가 변화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이성적인 판단이나 지적 성향과는 상관없이 나의 본질이 바뀌는 경험을 의미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려는 의지, 시기하지 않겠다는 결단, 분노하지 않고 인내하겠다는 노력이 아닌 것이지요. 내 안에 사랑이 넘쳐서 절로 분함과 시기함이 없어지는 것, 모든 것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보여지는 것.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존재와 하나가 될 때 그의 강한 사랑의 힘이 나의 그릇됨을 감싸주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니 닮고자 노력하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님이 이미 계셔서 그분의 속성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 신앙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어떤 훌륭한 교리와 치유로도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변환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나의 혈관과 골수에 흐르는 삶, 나의 몸이 그분의 형상으로 다가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내게 해를 입히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하고 나를 비난하는 사람을 어떻게 축복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고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파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경이로움은 나의 수행의 결과가 아닌 것입니다. 진실하고 아름다운 삶의 몫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축복의 열매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을 발견하고 끝없는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모두가 경험하는 가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