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10월호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과 반짝이는 나뭇잎들과 신선한 바람이 있는 초가을의 오후에 공원을 산책하며 온몸으로 맑은 공기를 호흡하다보니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삶을 살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손에는 작은 물병과 책 한 권을 지녔을 뿐이지만 마음은 천하를 가진 듯이 우쭐해질 지경입니다. 하늘을 들어 마신다는 시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하늘을 마시고 나면 몸은 구름처럼 자유롭고 가볍게 대기를 춤추며 다닐 수 있겠지요.


커다란 나무의 뿌리에 걸터앉거나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으면 마음은 평화롭고 무언가 충만해지는 느낌이 밀려옵니다.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무척 인상적이고 특별한 시집 한 권을 발견했습니다. 빨리 읽고 싶은 생각에 빌리자마자 근처 공원에 가서 자릴 잡고 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 시집에는 오십 여 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데 처음으로 시라는 것을 써본다는 사람에서부터 대부분 평소에 시 쓰는 일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의 자작시들을 한 편씩 모아서 편집한 시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십 명이 넘는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읽을 수 있는 얇지만 그 내용이 두터운 시집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시를 쓴 이들은 모두 나이, 종교, 직업, 가족 관계, 인종, 주거지역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지만 유방암이라는 공통된 경험과 상처를 공유하고 있는 여성들입니다. 유방암으로 투병하면서 겪는 고통, 소외감, 두려움, 수술 후에 찾아온 극심한 우울증, 상실감등에 대한 진솔한 감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시들을 읽으면서 미지의 그들과 마음이 닿는 것만 같아졌습니다. 수유에 대한 행복한 기억, 가족들의 섬세한 배려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 같아서 스스로를 가둔 경험, 더운 여름 가발을 벗고 외출했다가 경험한 따가운 시선, 수술대 위에서 숫자를 세면서 점점 아득해져 가던 의식의 공포… 한 명 한 명의 시들 속에는 전혀 다른 시각과 경험과 감정들이 녹아 있어서 읽는 저의 느낌도 다양하게! 확장되었습니다. 또한 과장이나 거짓 없이 체험한 진솔한 내용들에서 받은 감동이 물결처럼 서서히 제 안에 퍼져 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시집의 뒷부분에는 경험을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위로 받고 상처를 극복하게 되었는지, 만난 적도 없는 타인과 고통을 나눔으로써 서로를 어떻게 격려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후담과 앞으로도 같은 질병으로 진단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속적인 교류를 하겠다는 계획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나 혼자 짊어진, 나만의 고통이라고 여겼던 일들을 타인들과 나누며, 그 고통이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동질 감을 통해서 슬픔과 어두움이 작아지는 신비한 경험을 그들은 공유한 것이지요, 슬픔과 슬픔이 만나면 더 큰 슬픔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작아지고, 기쁨은 몇 배가 되어버리는 법칙은 우리가 체험하는 작은 기적 같은 일 중의 하나 같습니다.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모임, 테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 장애 아를 가진 부모들의 모임 등 여러 종류의 모임을 통해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상처의 공유가 아닐까요? 우리가 지극한 비탄에 빠졌을 때 흔히 하는 말 중에 ” 나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인지, 내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아무도 몰라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고통만이 절실하고 태산 만하고 나만 이 모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데 아무도 이해 해주지 못하는 것 같아 더 괴로운 것이 대부분의 인지상정이니까요. 그런데 나와 같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는 나의 아픔을 정확하게 이해 해줄 것 같아 안심이 됩니다. 이해 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감정은 본능적으로 무척이나! 강렬한 욕구이니까요.


우리가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상처를 한 몸에 지닌 사내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결코 이해 받지 못했고 멸시 당했고, 가장 가까운 벗들로부터 배신당했으며 몇 푼에 팔려졌고, 온 몸이 찢기도록 매를 맞았고, 이 세상에서 가져본 것도 없이 누려본 것도 없이 가장 누추한 삶을 살다가 가장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라면 여러 형태의 상처와 아픔들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을까요?


내가 어둠 속에 숨어 울고 있을 때, 분노와 좌절로 비틀거릴 때 그가 다가와 손을 내밉니다. 나의 아픔과 절박함을 이미 알고 있으며 , 나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려는 깊은 사랑이 전해지는 순간입니다. 그와 손을 잡는 순간 나는 그가 초대한 잔치에 참여하게 됩니다. 서투른 스텝이 어느덧 우아하고 경쾌한 왈츠의 스텝으로 바뀌어 가는 동안 나는 고통을 잊어 갑니다. 나 또한 상처 입은 한 영혼에게 다가가 감히 손을 내밀고 싶어집니다. 손을 잡고 발 동작을 익혀 가는 동안 마음이 하나되어 두려움이 없어질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럿이서 함께 추는 춤 속에서 우리는 서서히 치유되어 갈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음악에 이끌려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말하게 되겠지요.


“Hey, Shall we danc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