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3월호

발렌타인 데이를 겨냥해 상점마다 예쁘게 포장한 여러 종류의 초코렛과 사탕들이 눈길을 끕니다. 그 예쁜 상품들에 현혹되어 나도 누구에겐가 선물을 하고 싶어져서 여러 이름과 얼굴들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상업적으로 변모한 의미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많지만, 평소 마음을 나누고 싶었던 사람들이나 사랑을 주고받은 대상들에게 달콤한 언어를 보내는 날로 생각한다면 소박하게 사탕 하나, 초코렛 하나쯤 건네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일지 너무나 많은 상상과 고찰, 경험담과 나름대로의 설명들이 있지만 쉽게 알 수도 없고 잡히지 않는 것이 사랑에 대한 해석인 것 같습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얼마 전 본 영화 한편이 떠오릅니다. 바로 이창동감독의 ‘오아시스’라는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이나 문제 의식을 제기하는 영화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보고 나니 사랑에 대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깨닫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한마디로 쉽게 정의할 수 없지만 아! 하고 느낌을 갖게 하는 경험을 했습니다.






사회 생활을 하기에는 부족한 것이 많은 주인공 남자 종두는 좀 모자라는 청년이지만 순박하고 따뜻한 성품을 가진 인물입니다. 가정과 직장이 있는 형의 교통 사고를 대신 뒤집어 쓰고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가족들이 이사해서 집을 찾지도 못해 동생을 통해 귀가하지만 가족들도 골치거리인 그를 그다지 반기지는 않습니다. 추운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집에 돌아온 그의 손에는 어머니에게 드릴 스웨터가 전부입니다. 자신을 달가와 하지 않는 가족들이나 자신이 대신한 옥살이에 대해서도 그는 별 불만을 토로하지 않습니다. 그가 유달리 희생적인 인품을 가졌다기 보다는 자신의 것을 챙길 만한 자의식이 없는, 생각이 단순한 인물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가족들의 냉대와 모욕적인 말에도 실없이 웃고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 무심할 정도로 모자라지만 낙천적인 성품을 가진 것이지요. 가족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자신은 가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달팽이 집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가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였을 때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딸을 만나게 됩니다. 종일 햇빛에 거울을 가지고 장난을 하고 있는 뇌성마비 장애인인 공주라는 아가씨이지요. 얼굴은 일그러지고 사지가 뒤틀리며 언어 소통이 불가능한 공주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종두는 공주에게 예쁘다고 말합니다. 아무도 섬세한 감정을 가진 어엿한 여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공주에게 호감을 갖고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 종두와 공주가 즐기는 데이트는 일반 정상인들의 만남처럼 자연스러운 것이 되어갑니다. 영화 속에서 공주가 자신을 건강한 여자로 상상하는 장면들에서 그녀의 바램과 소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오빠도 그녀를 버리고 이사가고 가정부는 그녀를 속이며 존재 자체를 무시하지만 종두를 통해서 그녀는 ‘여자’가 되어갑니다. 여기서 종두가 그녀를 선택하고 예쁘! 다고 말해주는 것이 그에게 높은 도덕적인 의식이 있거나 차원 높은 윤리관이 있기 때문은 절대 아닌 것 같습니다. “ 방금 전에 저는 담배를 피우기 위해 마당에 나갔었답니다. 여기서 몇 시간씩이나 참아서 담배를 여러 개 계속해서 피고 있었는데 한나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하도 열심히 쳐다보기에 왜냐고 물었죠. 한나가 뭐라는 줄 아세요? 오, 세상에…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면 아줌마가 아프게 되지 않냐고 물으면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거였어요. 정말 걱정스런 표정으로 말이죠.“ 그녀는 다시 울먹이느냐고 목이 메인 것 같았다우.


창밖에 있는 나무의 그림자가 벽에 걸린 그림에 비쳐서 무섭다고 공주가 말하자, 종두는 그림자를 지우는 마술을 걸어 줍니다. 종두의 서툰 주문에 그림자가 지워지면 공주는 행복하게 잠이 듭니다. 바로 여기서 ‘사랑은 마법에 걸리는 일’이라는 해법이 읽혀집니다. 객관적으로 결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는 공주의 외모나 서투른 언어가 종두에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사랑은 객관적이고 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발생적이고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종두에겐 공주가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내겐 너무 예쁜” 아가씨로 보이는 것이지요. 종두에게 눈이 어떻게 되었냐 거나 판단력을 의심하며 따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는 흔한 말이 바로 이런 경우이겠지요. 친남매간에도 소통이 어렵건만 종두는 공주의 모든 의사 표현을 알아내는 것만 보아도 그들 사이엔 특별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종두가 걸어준 마술은 공주의 두려움, 그림자라는 어둠의 세력을 지워 줍니다. 사랑은 닫혀 있던 공주의 언어와 마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웅얼거림이 종두에 의해서 언어가 되었고, 밝은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절실한 사랑은 세상사람들 눈에는 그릇되고 뒤틀린 관계로 보여지고, 사랑의 행위는 폭력으로 보여집니다. 종두나 공주 두 사람 모두 자신들을 항변하고 표현할 능력이 없기에 세상의 편견과 오해에 무자비하게 습격(?) 당하는 안타까운 상황에 몰리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방해와 강제력도 그들의 사랑을 막지는 못합니다. 종일 햇볕이나 바라던 공주는 종두가 옥살이를 하는 동안 스스로 방 청소를 할 정도로 적극적인 생활을 하고 있게 됩니다.


종두는 편지에다 “공주님이 싫어하는 콩밥이 이젠 저도 싫어졌사와요”라고 써 보냅니다.


사랑은 닮아 가는 것, 같은 것을 즐기고 기뻐하는 마음인 것을 이렇게 알아 가는 것이지요.


사랑은 지독한 마법에 걸리는 일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종두와 공주의 사랑을 통해 주님과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 사랑해요”라는 단순한 주문만 외우면 엄청난 마술이 우리에게 벌어집니다. 어둠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빛이 들어와 불안과 절망이 기쁨과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는 우리의 외모나 조건도 상관없이, 추악하고 끔직한 죄에 젖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우리에게 빠져 있는지, 늘 아름답고 귀하다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힐난과 비웃음을 보낼지라도 나와 그의 사랑만이 확실하다면 우리의 삶은 이미 오아시스를 찾은 것이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대는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