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학에 입학한 후 첫 등교 길, 신입생을 환영하는 여러 현수막들이 가득한 캠퍼스를 꿈에 부풀어 더듬어 올라갈 때, 푸른 창공에 휘날리며 내 눈을 사로잡는 한 글귀가 있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느 단체에서 내다 붙인 현수막이었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고, 그 때는 그 글이 예수의 말씀인 것조차 몰랐지만, 그 글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내면 깊은
곳에서 대학 생활의 막연한 기대와 용솟음치는 희망이 부풀어 올랐다. 대학입시라는 질곡을 통과하여 마침내 자유의 바닷가 앞에
위풍당당하게 세워진 것처럼, 지난 날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유아기적인 몽상과 신화로부터 탈출하여 진리의 대양으로 마음껏 노
저어 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싱그러운 봄날의 부푼 가슴으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동경심을 품고 찾아간 강의실에서 어느 젊은 교수의 실존주의 철학 강의로부터 나의 대학 생활은 시작되었다.

“인간은 피투성(被投性)이다”

아무 이유도 아무런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그저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 그 실존의 인식으로부터 인생이 시작된다는 그의 말에 나는 순간 당황하였다.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펼쳐질
피비린내 나는 대학생활에 대한 예고요 선언이기도 했다. 모호한 것이 약간은 멋있어 보이던 그 교수의 강의를 통해 내가 받았던
감정은 절반은 매력적이게 느껴지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본능적 거부감이었다. 만일 인생이 그와 같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렇게 줄달음질치는 것인가? 그리고 삶을 지배하는 절대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유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독재 정권의 시녀로 전락해 자유로운 학문 정신을
상실해버린 피폐해진 캠퍼스, 지성의 전당이라고 상상하던 교실 안에서 자행되는 공공연한 부정행위, 절대 권위의 부재로 인한 영적
빈곤 상태를 권위주의로 억누르는 교수들에 대한 실망 감들로 진리와 자유에 대한 대학생활의 꿈이 허상이었음을 점차 깨달아가던 그
해 가을, 캠퍼스는 최루탄 연기 속에서 첫 휴교를 맞이했다. 그리고 최루탄과 실연의 따가움에 뒤섞인 눈물을 흘리며 진리를 향한
내 인생의 길고 험한 장외 투쟁의 노정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20대의 청춘을 술과 담배 연기 속에 쏟아 붓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진리를 찾게 되었을 때, 나는 다시 같은 자로 되돌아 와 있었다.

(2)

장님으로 살다가 눈을 뜨게 된 사람의 마음이 어떠할까?

그토록 보고팠던 딸 효녀 심청의 얼굴을 보고 울다 웃다
너무 좋아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을 심 봉사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흑암의 세월 속에서 살다가 광명의 세계로 옮겨간 사람의 그
자유함… 얼마나 기뻤을까? 그러나 더러는 시각장애인이 되면서 비로소 진리의 빛을 찾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안요한 목사님의 이야기에 우리는 또 다른 감동을 맛본다. 참 자유란 반드시 육신의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2003년 캐나다 토론토 코스타에서 아주 특별한
두 사람을 만났다. 한창의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은 안요한 목사님과, 불의의 교통 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청초했던 소녀의
아름다움을 잃은 이지선 자매가 함께 강사로 참석한 것이다. 흑암 속에서 잔잔히 빛나는 촛불을 바라보듯 그 두 사람의 간증을 듣는
동안 아름다움의 본질과 영혼의 자유함에 대한 근원적 생각을 다시 다듬게 되었다. 인간으로서 감내키 힘든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들
안에서 타오르는 아름다운 생명의 빛은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의 간증은 우리의 건강한 육체를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다. 이지선
자매의 정금같이 순수한 간증을 듣고 난 후, 안요한 목사님은 그의 맑고 투명한 두 눈을 허공을 향해 깜박이며 이렇게 말했다.
“자매야말로 우리의 자랑스런 미스코리아 진입니다.” 육순의 이 시각장애인 목사가 보았던 것이 무엇일까? 육신의 아름다움을 상실한
한 여인의 아름다운 영혼을 향한 그 고백이야말로 진리 속에서 위대한 자유를 체득한 자만이 낼 수 있는 승리의 목소리였다.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께 묻는다.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 죄 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전혀 다르다.
“그가 소경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다.”

예수는 종종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함으로 자신의 빛 되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를 보고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반드시 심판이 있을 것을 선언하였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요한복음 9:39)”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어두운 세상 가운데 진리의 빛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러하기에 빛을 보고도 눈을 감아 피하는 자들은 스스로 소경 된 자들이며 이미 심판의 길로 들어섰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육신의 질병과 영혼의 불구로 고통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 저들에게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자유를 주기 위해 찾아온 예수, 그가 십자가에 매달려 당한 그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고통이 아니었다.“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고 간절히 부르짖었던 예수의 겟세마네의 기도는, 십자가에서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잔에 대한 영적 두려움 때문이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의 영적 분리(分離)와 유기(遺棄)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표현이었다.
겁에 질려 아빠 양을 찾는 어린양의 울음소리처럼 간절했던 그 기도… 사실상 그 형벌은 바로 우리들이 받아야 할 죄의
삯이었다. 그 시간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은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던 그
‘야훼의 밤’에 애굽의 모든 이들이 잠이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아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의 절규 앞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신다. 우리에게 임할 그 심판은 오직 어린양의 흘린 피로만
대속 될 수 있음을 아시는 하나님은 인류를 구원키 위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하는 외 아들의 고통과 외침을 외면하시는 것이다.
아들의 죽음을 통해 많은 사람을 아버지께로 이끌어 살리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침내 하나님은 그 아들을 버리셨다. 그리고 그 아들은 완전한 순종을 이루었다.
“다 이루었다.”

순종의 아들 예수가 가장 높은 하늘 생명의 보좌에서
가장 낮은 땅 사망의 십자가로 내려와 마침내 숨을 거두는 그 순간,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엄청난 사랑의 빛이 흑암에 싸인
온 세상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 진리의 광채가 역사의 시공을 따라 흘러 이 시간 이곳까지 이른 것이다. 그 섬광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 기이한 빛을 한 번 비추인 사람마다 그의 딱딱한 머리와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내리고 세상의 욕심을 향하던 그의
옛 눈은 멀어버리며 새로운 영적 세계를 향해 눈뜨게 되는 것이다.

(3)

만주 벌판의 끝없이 펼쳐진 구릉지대에 초원의 신록이
한껏 물을 먹어 싱싱하게 오르고 있다. 멀리서 보면 무덤을 갈아엎어 세운 학교가 흰 파도 거품처럼 꿈틀거리며 그 능선을 따라
물결 치듯 늘어서 있다. 화사한 주일 오후, 분홍색 벚꽃과 철쭉, 노란 개나리가 만발한 교내 정원에서 쌍쌍이 데이트하며 지나가는
대학생들 사이에 교직원 자녀 아이들이 깡충깡충 뛰논다. 이웃에 사는 동역자가 첫 딸을 낳고 이름을 ‘진리’라고 지었다. 그리고
다시 남동생을 보자 이름을 ‘길’이라고 지었다. 일곱 살짜리 내 아들 문영(데이빗)이도 길과 진리와 어울려 함께 달린다.

정신지체장애 아들을 둔 고등학교 후배 J 교수가 있다.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며 걸어가는 얼굴이 하얀 찬영(가명)이가 그 집 아들이다. 막내 문영이와 동갑인 찬영이를 바라볼 때마다
나는 항상 가슴 한 귀퉁이가 아리며 당황스런 마음을 감추게 된다. J교수가 후배여서 그럴까? 아니면 찬영이가 우리 아들과
동갑내기여서 그럴까? 가슴이 아프다. 그 부부를 도우려 해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고 위로를 하고자 해도 어떤 한계를
느낀다. 천사와 같이 천진스러운 찬영이를 간혹 안아주고 항상 밝음을 유지하며 지내는 젊은 그 부부가 기특(?)하게 여겨지다가도,
그들이 비장애인 아동들을 바라보며 어쩌다 흘리는 눈물 앞에서 우리 부부는 어쩔 줄 몰라 가만히 외면한다. 장애를 안고 태어난 그
아들을 바라보는 J 교수 부부의 마음속에 담긴 그 고통과 절규를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찬영이를 위해서 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사랑 고백을 하는 그 아버지의 마음 뒤에는 어쩌면 십자가 위에서 침묵하시던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 건 아닌지…

J교수가 언젠가 대학생들 앞에서 특강을 했다. “나는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여러분들을 만나기 위해 연변과기대의 교수가 되는 것이 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박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것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의
참 행복은 내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때 얻어집니다. 여러분들이 장차 그런 사람들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나는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내 아들 찬영이를 바라보며 과연 이 아이가 커서 누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줄 수 있는 그 도전을 내 아들에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 가슴 아팠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찬영이로 인해 아픈
자녀를 둔 다른 부모들이 위로 받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찬영이가 상처 받은 다른 사람들을 위로해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찬영이가
항상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인 나는 찬영이가 있음으로 인해 정말 행복합니다.”

지금도 순종의 아들들이 당하는 고통 뒤에는 그로 인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의 계획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믿는다. 그 믿음으로만 함께
고통을 감내할 수 있다. 부활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에게서는 빛이 난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사십 일간 하나님과 함께 거한 후 내려올 때에 그 얼굴에서 광채(shekinah)가 났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중국으로 오기 직전 깊은 기도로 매일 새벽 하나님과 만나고 있었던 무렵,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내 얼굴에서 어떤 광채가
나는 것 같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더러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하는 동역자들의 얼굴에서 은혜의 광채가 발하는 것을 드문드문
경험하기도 했다.

우리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에서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여 만나게 되는 날, 희미하게 깨달아 보던 그 진리의 빛을 완전히 바라볼 날이 올 것이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고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으며, 이전에 있던 모든 상처와
질병들이 다 지나간 곳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 그 성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고 진리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처럼, 수정처럼 빛나며 해와 달의 비췸이 소용이 없고 오직 어린 양 예수가 그 등불이 되며 만국의 백성들과 만왕들이 그 빛
가운데 지나갈 것이다.

그 행렬 가운데는 통일된 조선의 백성들도 흰옷을 입고
얼굴에 광채를 내며 함께 줄지어 지나갈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한국인과 북한 사람의 경계도 없을 것이요, 중국 조선족과 미국
교포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재일교포와 사할린 동포가, 우즈벡의 고려인 3세와 브라질의 교포2세가 함께 어울려 웃으며 지나가지
않겠는가? 연변과기대 졸업생과 한동대학 졸업생이, 평양과기대 출신과 포항공대 출신이 함께 지나갈 것이다. 목사요 장로요 집사의
구분도 없을 것이며 기업 총수와 문지기의 구분도 없을 것이다. 북한의 탈북자와 순교자가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한족과 조선족이
하나가 되고, 이라크인과 미국인이 하나가 되어 예수 앞으로 모여들 것이다. 그때 거기서…… 루카스와 상재가 웃으며
손짓하고, 찬영이와 문영이가 어깨동무로 함께 손잡고 씩씩하게 걸어갈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던 그분이 인자하게 웃으시며, 다시 한번 영원한 진리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실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