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과 치유의 신학 – 내 아버지의 뜻


우리 연변에서는


(1)


얼마 전 MBC TV에서 탈북자들의 비참한 실상을 방영하여 충격을 준 일이 있었다. 탈북 여성들이 중국 공안과 결탁한 중국인들에게 이리 저리 팔려 다니며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육체적 유린을 당하며 그 일에 일부 조선족들도 연루되어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 말미암아 분개한 한국인들이 조선족들을 향해 질타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고, 또 그에 반박하는 조선족의 글을 함께 읽게 되었다. 문제의 사이트에 올라온 한 조선족의 글을 한번 옮겨보자. (참조: http://www.unikorean.net)



한국 사람은 한국에 있는 조선족을 어떻게 했는가? 또 지금도 어떻게 하고 있는가? 님 글 쓴 것을 보니 한국 사람이 분명한데 당신이 그렇게 입을 벌려 말할 자격이 있어요? <북한 사람을 구해 줘야 하는 이는 조선족>이라고 말이다. 지금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이 어떤 개고생 다하면서 살아가는 지는 알긴 하는가! 우리도 너네한테 팔려봤고 당했었다. 비록 우리 중에 나쁜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래도 대부분의 북한형제들에 대해 감싸주고 있다. 만약 중국에 조선족이라도 없었더라면 30만 탈북자가 이보다 더 비참한 짓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북한 사람들이 대부분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고 그들을 먹여주고 탈북 동포들을 살려주느라 중국 공안에 붙들려 가는 이들 또 누구더냐? 바로 조선족이다. 북조선 사람들이 건너올 때도 그나마 한 가닥에 희망이 조선족이다. 우리들은 한국보다는 못 살지만 우리들은 우리 힘있는 대로 돕는다. …(중략)… 자기들이 그런 짓을 할 때는 모르겠더니만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니까 그렇게 참혹하게 여겨지는지….. 하지만 나는 그런 짓을 한 우리 조선족도 용서 못한다. 아무튼 우리 민족은 서로를 생각해야할 자태가 필요하다.


“우리 연변에서는….” 으로 시작하는 한창 유행했던 개그 프로그램이 있다. 그로인해 상처 받은 조선족들이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들을 표현하고 있는 글이 같은 사이트에 올라 와 있어 재차 인용해 본다.




한국 사람들이 이램다. 너무 기차서 한번 그대루 옴겨 봄다. 아이구 기차지…, 그럼 시작하겠슴다. 와땀다. 우리 연변에서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는 여우 축에두 못감다. 꼬리 스물이 넘어야 여우라구 부름다. 꼬리 스무 개씩 달린 여우는 그 꼬리를 빗자루로 씀다 한번은 꼬리가 팔십 개 달린 여우를 봤슴다. 궁둥이가 이만함다~~



난 그 <<봉숭아학당>>한번 보구 다신 안 본다. 한국 사람들이 개그한다구 뭐 대통령두 갖구 놀 정도긴 하지만 이건 그 사람들 내부 일이고, 우리 교포들의 가뜩이나 예민한 감정을 왜 이렇게 건드리는지 알고도 모를 일이다, 그 사람들은 그저 한번 가볍게 웃고 넘기지만 그게 우리들에겐 얼마나 큰 상처가 되는지는 생각지두 않는다.


중국에서두 한국에서두 대접받지 못하구 사는 우리 어정쩡한 위치, 중국에서 사는 사람들은 그다지 절실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이란 나라에 와서 그 아픔과 설움을 겪어보지 못했다면…. 이런 설움과 아픔 때문에 여기 있는 대부분 교포들이 한국이 4강에 들었을 때에도 그 희열을 느끼지 못하고 담담하게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한국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하니까….한국 사람의 눈엔 동포보다도 중국사람으로 보이는 우리들이니까….


연변에서 장기간 일하면서 느끼게 되는 가장 큰 아픔 중 하나는 조선족들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상처들과 그로 인한 왜곡된 심성들을 보게 될 때이다.




(2)


“우리 살아가는 날 동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스런 일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라고 시작하는 용혜원 시인의 시가 있다.


지난 월드컵의 감동과 감격은 아마 우리 민족이라면 세월을 두고 그 기쁨을 반추할 만한 사건이었다. 특히, 이태리와의 대 역전 드라마는 월드컵 역사상 가장 짜릿한 명승부로 기록되기에 전혀 손색이 없는 일전이었다. 밴쿠버 코스타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던 그날 새벽, 경기가 끝나고 중심가로 뛰쳐나온 교민과 학생들 사이에 코스타 강사진들이 함께 섞여 환호하던 모습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될 것만 같다.


나는 이번에 캐나다와 미국 코스타를 참석하느라 우연찮게 중국, 한국, 캐나다, 미국의 4개국을 거치면서 월드컵을 관전하게 되었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한마음이 되어 목 터져라 응원하던 그 순간에…. 그러나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던 것은 그 함성에서 제외되고 소외되어 있는 북한에 있는 우리 동포들과… 그리고 이상하게도 가장 가까워야할 우리 연변 조선족들이 캐나다와 미국에 있는 동포들보다 한국을 응원하는데 소원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조선족들이 품은 마음은 두 갈래 마음이었다. 한국 축구에 대해 편파보도를 하는 중국 CCTV에 항의하다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연변대학의 모 교수처럼 더러는 목숨을 걸고 응원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일부 사람들은 관심은 있으나 짐짓 외면하고픈 마음으로 멀찌감치 관망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그들이 누구인가? 오히려 잃어버린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주로 떠났던 우리 선조들의 후예들이다. 민족심과 자긍심이 누구보다도 더 강한 사람들이다. 가장 큰 소리로 소리 질러 응원해야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올해는 한중 수교 10주년을 맞이하는 해이기도 하다. 양국 간의 괄목할만한 경제 교류의 표면적 성장 뒤에는 지난 10년간 이곳 연변의 조선족들이 우리 한국 사람들로부터 받아야했던 많은 수모와 상처들이 있다. 어쩌면 심중 깊은 곳에서 그리던 모국이 올림픽을 치른 잘사는 나라로 갑자기 눈앞에 부상한 이후, 그들이 가졌던 기대와 장밋빛 꿈들이 서서히 시들어가며 그리고 마지막에는 산산이 분노로 찢겨져 버린 그런 세월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월드컵이 시작하기 얼마 전부터 나는 새벽마다 옆방에서 기도하는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갑작스레 한국 축구를 위해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평상시에 스포츠나 특히 축구에는 전혀 관심도 없던 사람인지라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하루는 이상하여 “당신 요즘 왜 축구 기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라고 물어보았더니 “나도 모르겠어요.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기도를 시키시는 것 같아요. 그냥 기도만 시작하면 이번 월드컵에 기대를 걸고 있는 불쌍한 우리 민족이 생각나서…”라는 대답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월드컵이 시작되었다. 한국전이 있는 날이면 아내는 가슴이 떨려서 제대로 응원도 못하고 안절부절 다른 방을 오가며 기도를 하곤 했다. 그러다가 한국이 게임 도중 잠시 패했을 때에는 통곡을 하고 울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 모습을 보던 중 내가 문득 깨닫게 된 것은 이번 월드컵이 단순히 축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그 속에 담겨 있는 것만 같았다. 지난 세기 갈가리 찢기고 나뉘어 진 우리 민족의 상처들을 싸매 주며 이번 월드컵을 통해서 한 마음으로 뭉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이 떠올랐다. 그 아버지의 마음이 바로 아내의 기도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독일과의 4강전이 치러지던 날은 우리 민족에게는 민족상잔과 분단의 뼈아픈 상처의 기억을 담고 있는 비극의 날 6.25의 기념일이었다. 그날 우리는 통일된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다. 그 경기의 패배는 나에게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의 커다란 상징처럼 다가왔다. 분단된 이 민족… 고통받는 저 백성들을 남겨두고… 우리가 기쁨의 환성을 지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하였다. 우리는 아직 완전한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3)


지난 코스타의 세미나 제목을 전체 주제에 맞추어 <치유와 회복의 신학>이라고 붙였더니… 내가 어느새 신학을 공부했는가 하고 묻는 분들이 있었다. <치유와 회복>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썰렁한 제목인 것 같아 단지 운율을 맞추기 위해 붙인 것이었는데… 그게 좀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보니 과연 신학이 무엇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평신도는 신학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인가? 라는 질문도 생겼다.


신학(theology)도 일종의 학문인가? 학(學)자가 붙었으니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생물학(biology)이나 심리학(psychology)과 마찬가지로 학문의 대상을 신(神)으로 두고 이성적으로 반응하며 앎을 추구하는 그런 행위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것일 게다. 아니 그렇다면 생물이나 인간의 심리처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할수록 신(God)에 대해서도 더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야말로 엄청난 난센스다. 만일 인간의 이성적 사유로서 파악될 수 있는 존재가 신이라면 그것은 이미 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기독교의 신관은 철저하게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는 초월적 신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로마서 3장 11절에서 말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다. 인간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으며, 인간은 도무지 하나님이 어디 계신지 어떤 분인지 찾아갈 수도 없는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이 기독교의 인간관이기도 하다. 오직 하나님은 당신이 스스로를 계시(啓示)할 때만 우리 인간에게 그 모습을 드러내신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신을 학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결과물(즉, 신에 대해 알아낸 결과들)을 판단하고 그것으로 학위를 주고 말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타종교의 신이라면 몰라도 기독교의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학이란 아예 존재할 수조차 없는 개념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성육신 하신 예수였다.


상처받고 왜곡된 우리 인간들을 치유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 그분이 오셨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고 볼 수 있었고 들을 수 있었으며 또 만질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야말로 모든 신학의 시작이다. 우리가 부서지고 깨어진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분이 오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상처들 또한 신학의 전적인 대상이요 출발점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있는 수많은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예수… 그렇다면, 신학이란 다름 아닌 “예수를 통한 치유와 회복의 과정”이라고 정의되어야만 할 것이다.


우리에겐 상처들이 너무 많다. 개인의 상처, 가정의 상처, 사회적 상처, 민족의 상처, 그리고 온 인류가 짊어진 상처와 그로 인해 피폐해진 피조계의 우주적 상처에 이르기까지…. 그 상처들을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이야말로 예수를 따라가는 우리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그것이 곧 신학이요 신학함이 되어야할 것이다.


갈라진 겨레의 상처를 아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중적 마음을 표현한 연변의 한 무명 시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겨레


다섯 손가락을 보니
흩어진 겨레의 모습 같다.


꽉- 으스러지게 틀어쥔다.
주먹을….


나는 이렇게 밖에
사랑을 표시할 수밖에 없다.


사랑하고파 주먹을 쥐는데
펴보면 또 다섯 손가락이다.


몸은 서로 떨어져 멀리 있어도
마음은 하나가 되여 살아가는 사람들…


쥐면 주먹
펴면 다섯 손가락


쉼 없이 반복한다.
이 사랑의 손짓을


다섯 손가락을 보니
언제나 운명을 같이 할
겨레의 모습이다.


(최진성, 1999년 1월 연변문학)


흩어진 우리 겨레… 상처 입은 연변의 조선족들… 그리고 그들이 또 돌보아야할 죽어가는 북한의 형제들… 그러나 그들의 상처 속에서 우리는 피 흘리는 예수를 발견한다. 그리고 흩어진 디아스포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는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우리 민족의 치유와 회복의 소망을 느낀다.


“우리 연변에서는… 평신도도 신학을 함다. 일 없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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