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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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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의 인생관 : 고지론을 수정 보완하라 (1)


2.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의지하라!: I can do it? No, only God can do it!


39장에서 하나님만을 고지로 삼고 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요셉의 인생관을 보여준 성경의 이야기(narrative)는 이제 다시 40장과 41장에 이르러 또 다른 요셉의 특성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요셉이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컨대 내게 고하소서.” (창 40:8)
“요셉이 바로에게 대답하였다. “저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임금님께서 기뻐하실 대답은, 하나님이 해주실 것입니다.”” (창 41:16 표준새번역)


자신이 주인으로 모시고 섬기던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부함으로서 감옥에 갇히게 된 요셉은 그 곳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관원장'(chief cupbearer)과 ‘떡 굽는 관원장'(chief baker)을 만나 그들의 꿈을 해석하게 된다.(40장) 그리고 그 계기로 인해 나중에는 애굽의 왕 바로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게 되고, 결국 왕의 꿈을 명쾌하게 해석함으로서 애굽의 총리가 되는 기대하지 않았던 고지를 점령하게 된 것이다.(41장)


요셉의 이러한 극적인 ‘인간승리’ 스토리(story)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점은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변함없는 고백이다. 마치 39장의 이야기가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전환된 삶을 의도적으로 확연하게 드러내듯이, 40장과 41장에서는 요셉이 꿈을 해석할 때마다 드러내는 그의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자신의 삶 속에서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자임을 이야기상의 중요한 주제로 반복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덧붙여서 우리가 이 이야기(narrative) 속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그 당시 애굽의 사회적 배경은, 바로 해몽이 당시의 종교적 과학적 토대 속에서 엄연하게 인정받는 하나의 학문분야였다는 점이다. 이는 창세기 41장 8절에서 자신이 꾼 꿈을 해석하고자 바로왕이 맨 처음 부른자들이 바로 술객(magician)과 박사(wise men)였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그 당시 고대 문명에서 술객과 박사라 함이 단순히 현대의 서커스 단원이나 동네 마을의 지혜로운 촌장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구약 성경의 여러 예를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다니엘서에서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모든 재주를 통달하며 지식이 구비하며 학문에 익숙하여 왕궁에 모실만한 소년'(단 1:4)중 일부였던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바벨론 왕궁에서의 3년 교육 후, “그들의 지혜와 총명이 온 나라 박수(magicians)와 술객보다 십배나 나은 줄을 아니라”(단 1:20)는 말씀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왕을 옆에서 모시는 술객과 박수라 함은 그 당시의 지식인층 중에서도 최상의 엘리트(elite)를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일개 노예 출신으로서 이런 위대한 학문적 성과(?)라 할 수 있는 해몽(解夢)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치 현대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버금갈만한 이 기발한 이론(?)을 모든 왕궁의 사람들 앞에서 자랑스럽게 발표하기도 전에, 그는 이 모든 일이 오직 하나님에게 달린,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이룰 수 있는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길고 길었던 고난과 시련의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야 온 세상 앞에서 기세 등등하게 자신의 이름을 떨치며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있는 절호의 순간에 그는 이런 김 빠지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이 분위기 파악 못하는 고백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자임을, 누가 그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관하고 있는지를 온전하게 인식한 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고지론’을 바라보면서 갖게 되는 두번째 염려는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 이후 이에 영향을 받은 비슷한 부류의 고지론 설교들이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서 ‘고지론’을 설파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가능성과 능력에 더 집중하는 “You can do it!”식의 성공 인생적 ‘고지론’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부연설명은 지면의 한계 상 이곳에서 자세히 나누지는 못하지만 간단한 예를 들어 필자는 90년대 후반 전병욱 목사님의 성공 지향적이고 진취적인 청년 인생론이나, 예수 전도단 원 베네딕트 선교사님의 책들: ‘인생의 역전을 꿈꾸는 자들이 되라’ ‘Never Never Never Give Up’ 속에서 이런 경향들을 엿보게 된다) 다시 말해 도대체 누가 이 고지 점령의 궁극적인 주체인지, 또 고지점령의 승패와 의미가 누구의 주권 하에 달린 문제인지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면서 오히려 “올라가자!” “세상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자! 공부하자!”에만 혈안이 되어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과연 우리네 인생이 그러한가? 내가 아무리 난리를 치고 악을 써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시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우리 믿는 자들의 인생관이다. 그리고 내가 막상 땀을 흘리고 용을 써서 그 무엇을 성취했다 해도 사실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믿는 우리들이 아닌가? 야곱의 경우처럼 아무리 자신 스스로가 높은 ‘고지’에 올라가고 싶다고 하나님께 떼를 쓰고 난리를 친다해도, 하나님의 뜻이 나를 세례 요한과 같이 그냥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 쓰기 원하신다면 그 뜻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반대로 모세처럼(출 3, 4장) 아무리 스스로는 지도자적인 고지에 올라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뜻에 사용되는 것을 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를 강권하신다면 우린 그 고지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소명으로 알고 올라가야 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 (창 45:8)


하나님의 주권을 삶 속에서 인정하는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분명한 삶의 원칙(principal)이 있다. 그들은 고지를 올라가다가 행여나 감당 못할 시련이나 핍박을 당한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고지’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소명으로 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반드시 정복될 고지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지고, 또한 애굽에 와 힘든 종살이를 하다가 다시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어도, 또 술 맡은 관원장이 자신의 은혜를 잊어버렸다가 2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을 기억했어도, 단 한번의 원망과 낙심도 없이 이 모든 일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인내하며 바라본다. 그러하기에 그는 자신을 애굽으로 보낸 자가 형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고 담담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삶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의지하는 고지 점령자들은 고지에 올라간 후 행여나 자만하거나 과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고지가 자신들의 뼈를 깎는 노력과 열정으로 점령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안에서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믿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요셉은 자신을 ‘바로의 아비로 삼고 온 집과 나라의 주인과 치리자’로 만든 것은 바로 자신의 노력이나 실력이 아닌 하나님이셨다고 고백한다.


요셉의 인생관은 우리에게 ‘고지론’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우리에게 각각의 ‘고지’를 소명으로 허락하시고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하기에 우린 고지에 올라간 후 교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다. 그리고 남들이 별로 중요하다고 여기지 않는 변두리(?) 고지나 아예 남들이 잘 가지 않는, ‘미답지’적 고지에 소명을 받았다고 해서 부끄러워하거나 기죽을 것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고 하나님의 주권이지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동네의 어느 고지에 소명을 받았든 정말 중요한 것은 누가 나의 삶을 궁극적으로 주장하고 인도하는지, 또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작고 부족한 자인지를 온전하게 인정하고 그분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고지 점령자들에게는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부여한 주권적인 소명이 중요하지, 자신이 오를 고지가 얼마나 높고 또 얼마나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에 있는지가 중요하지 않다. 우린 사도 바울이 로마의 시민권을 버리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유용하게 사용한 것에만 관심을 갖지 말고, 먼저는 그가 당시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그 고달프고 힘든 이방인 전도를 하나님이 자신에게 준 소명으로 알고 자신의 생애를 바친 그의 인생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3. 성실함과 거룩함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라!: 그리스도인에게는 매일 매일의 삶이 곧 예배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창 39:3, 6a)
“전옥(典獄)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창 39:22-23a)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보증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 바로가 또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로 애굽 온 땅을 총리(總理)하게 하노라 하고” (창 41:40-41)


우리가 요셉의 생애를 통해 꾸준하게 발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가는 곳곳마다 사람들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자였다는 점이다. 과연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서 이와 같은 인복(人福)을 누리는 자가 또 어디에 있었던가? 물론 그는 이에 못지 않은 가족적 아픔을 경험하고 또 억울한 누명까지 썼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러한 가슴 아픈 현실 속에서도 그는 놀라우리만큼 가는 곳곳, 만나는 사람들의 끔찍한(?) 사랑과 신뢰를 받는다.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를 처음 만나게 되면 그의 첫인상과 하는 행동에 홀딱 반하기라도 하듯이, 그는 고위 공무원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든, 감옥에 갇히게 되든, 아니 한 나라의 통수권자 앞에 서게 되든 어디에서든지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 중책을 맡게 되는 재주(?)를 보여준다.


물론 성경은 요셉의 이런 성공적인 인간관계 뒤편에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변함없는 삶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암시를 우리에게 주고있다.(창 39:3, 21, 41:38, 39) 그러나 우린 간단하게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라는 어찌 보면 추상적(abstractive)일 수 있는 성경적 언어에 갇혀 요셉의 삶을 분석, 묵상하고자 하는 노력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는 이 영적인 표현(spiritual expression)에 그냥 만족해서, 그 뒤에 감추어져 있을 요셉의 실제적인 삶의 특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도대체 하나님과 함께하는 요셉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의 일상생활을 통해 표출되었기에, 그를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가 하나님과 함께하고 있음을 인식했으며, 또한 그에게 끓임 없는 사랑과 신뢰를 보이게 되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이다.


앞에서도 주장했지만, 요셉에게 있어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존재론(being)적인 것이었다. 그건 자신의 매일 매일의 삶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그의 실체적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과 동행하는, 하나님을 자신의 삶 속에서 꾸준하게 의식하고 경험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마음가짐과 자세로 다른 사람들과 관계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일까?


비록 직접적인 성경상의 언급은 없지만 나는 창세기 37에서 50장에 이르는(38장 제외) 요셉의 생애를 통해 그가 성실함과 거룩함을 겸비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곧 그는 매일 매일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존재론적 삶이라는 인식아래 자신의 삶을 성실함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시위대장의 집에서 종살이나 감옥생활을 하던, 아니면 대국을 치리하는 총리가 되던 그는 열과 성의를 다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했다. 그러하기에 그의 일 솜씨를 보고 경험한 자마다 결국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게 되고 또한 맡긴 일은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그를 신뢰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열심히만 일한다고 해서 주인의 사랑과 신뢰를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게는 성실한 면과 더불어 거룩한 면이 있었다. 주인의 부인이 아무리 자신을 유혹한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자신을 더럽히지 않았다. 또한 그는 아무리 자신이 대국의 총리요 또한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 자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과 명예를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지 않은 거룩하고 진실한 자였다. 결국 요셉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하기에,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지켜보고 있기에, 결코 불성실하거나 부정직한 삶의 모습을 그분께 보여 드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해석 외에는 그가 누린 인간관계의 축복을 현실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다.


나는 감옥에 갇힌 요셉에게 보인 전옥(典獄)의 호의나, 40장 4절에서 감옥에 갇히게 된 왕의 두 관원장을 시중들게 한 시위대장의 모습을 보면서 그를 변함없이 신뢰하고 아끼는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엿보게 된다. 이 세상에 과연 어느 주인이 자신의 부인을 진정 능욕하고자 한 종을 그 자리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 하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관할 하에 있는 감옥의 책임자가 그를 신임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아니 그것도 모자라 왕을 모셨던 죄수 관원들을 특별히 시중들게 하는 일을 맡기겠는가? 요셉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또한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런 이중적이고 거짓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결코 인간관계 속에서 이러한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 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자기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창 39: 9)


성경의 이야기는 일관되게 요셉에게 허락된 인간관계의 축복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그의 삶을 통해 주어졌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명 하나님과 동행하던 요셉의 삶은 어떤 식으로든 그와 이웃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며 그의 생활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요셉이 매일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마치 하나님 앞에서 하듯(골 3:23) 열심과 진실함으로 감당했다는 말이다. 마치 이는 하나님을 열심히 신앙하며 매일 매일 그분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자가 자신의 가정을 소홀히 여기고 학교와 직장에서 불성실하고 부정직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말과 똑같은 것이다. 곧 하나님을 올바르게 신앙하고자 고민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삶의 현장과 신앙이 괴리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고지론’ 설교가 지난 10여년간 한국교회의 젊은세대에 큰 자극과 도전을 주었던 이유는 바로 이 ‘삶과 신앙의 괴리’를 개혁신학(reformation theology)적 관점에서 질타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추상적이고 영적인 언어에 갇혀 교회에서는 다들 은혜와 감격에 휩싸여 세상을 뒤엎을 듯 흥겨워 하지만 막상 삶의 현장에서는 무기력하고 이중적인 삶의 잣대를 가지고 살아가는 기성세대와 젊은세대들에게, “삶(학업)이 곧 예배요. 우리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영적싸움의 현장이다”라는 메시지(message)는 그들의 가슴을 뒤흔들고도 남았던 것이다. 이원론적(dualistic)인 사고 속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는 강조하면서도, 막상 어떻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았던 한국교회의 병폐 속에 ‘고지론’ 설교는 삶의 현장에서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적극적인 자세를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 그리고 이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관점이요 개혁신앙적인 관점이다. 단지 앞에서 반론한 것처럼 이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개혁신앙의 인생관이 성경의 또 다른 중요한 핵심인 ‘하나님의 주권의식’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무리하게 선동될 때, 일반 세속사회의 “I can do it!”식의 ‘성공 프로그램’과 다를 바 없는 변형된 기복주의 신앙과 허탈감을 기독 청년들에게 안겨 줄 수 있다는 염려가 있을 뿐이다.


더불어 이제 ‘고지론’ 설교는 단순히 영적 매너리즘(spiritual mannerism)에 빠져 있는 기독 청년들에게 ‘모든 직업이 성직’이며 ‘삶이 곧 예배’라는 진취적이고 성실한 ‘기독 세계관’을 심어주는데 멈추지 말고, 이 길을 걸어갈 때 쉽게 봉착할 수 있는 사단의 유혹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경고해야 한다. 고지를 올라가며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의 유혹과 올라간 후에 생기는 ‘안주’의 유혹, 그리고 요셉의 경우와 같은 실제적인 성적, 물질적 유혹에 대해 경고하면서 고지 점령자의 ‘거룩한 삶’을 선포해야 한다. 이는 ‘고지론’ 자체가 가진 역동성과 영향력에 못지 않게, 막상 고지 점령자가 믿는 자의 ‘거룩함’을 훼손시킬 경우 세상에 미치는 그 파급효과가 엄청나다는 현실 속에서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부분이다. 비록 요셉은 자신의 삶을 통해 이를 지혜롭게 잘 극복하고 대처해 나갔지만, 사단의 이러한 공격은 쉬지 않고 고지를 점령해 가는 자들의 삶을 뒤흔들 것이다.


요셉의 생애를 정리하며…


“휫필드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영광 받으시게 하라. 내 이름은 모든 곳에서 죽어 없어지게 하고 내 친구들도 나를 잊게 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복되신 예수의 대의가 진작될 수 있다면…” (감리교 수장자리를 포기하며, 조지 휫필드)


“정치적인 편의라는 문제에 있어서 내게는 시기와 때를 고려할 만한 여지가 있는 것 같다. 어떤 때에는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밀어붙이기에 좋은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에는 다른 일련의 상황들 때문에 우리의 노력을 보류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지금같이 실제적인 범죄 행위가 문제 될 경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는 선택할 자유가 없다.” (1793년 노예 무역제도 폐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며, 윌리암 윌버포스)


“주저함 없는 헌신으로 내 자신과 나의 삶, 나의 친구들, 내 모든 것들을 제단 앞에 내어놓을 때, 나의 헌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며 그 확신이 나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울 때에 경험했던 깊은 엄숙함을 나는 익히 기억하고 있다… 나의 헌신을 어떤 봉사를 위해 받으셨는지는 내가 알지 못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삶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엄숙한 의식이 나를 주장하게 되었으며 이 의식은 그 이후로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생애를 하나님께 헌신한 1849년을 회상하며, 허드슨 테일러)


우리가 익히 아는 현대 선교의 아버지인 구두수선공 윌리암 케리, 하나님 앞에서 녹슨 나사가 될 바에는 닳아 없어지는 나사가 되겠다던 지칠 줄 모르던 옥외설교가 조지 휫필드,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인기와 야망을 버리고 영국의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정치가 윌리암 윌버포스, 기도의 사람이자 영국 고아들의 아버지였던 조지 뮬러, 중국 내륙 선교의 선구자 허드슨 테일러 등등. 이 중에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믿고 따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명성과 이름을 ‘고지’로 삼는 유혹과, 하나님의 주권보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망발과,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을 게으름과 거짓으로 가득 채우는 신앙인의 위선을 보였던가? 그들은 비록 부족했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위대한 뜻을 그들의 삶을 통해 이루어 나갔던 자들이다.


하나님이 개개인에게 소명으로 준 ‘고지’를 정복해 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자신들이 올라갈 고지의 높이나 명성 때문에 허황된 ‘망상’이나 독한 ‘야망’을 품고 고지를 올라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고지’이자 ‘비전’이며, 또한 그분과 동행하는 존재론적인 삶이 최고의 가치이다. 이러한 인식 속에서 그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하며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허락한 ‘소명’을 ‘고지’로 알고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높고 낮은, 중요하거나 안 중요한 고지가 없다.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뜻만이 우선될 뿐이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영적으로나 추상적으로만 이해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의 삶 속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의 구별된 삶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삶 속에는 ‘성실’과 ‘거룩’의 향이 잔잔하게 배여 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게으른 삶의 예배를, 하나님과 함께한다고 하면서 죄와 거짓으로 더럽혀진 삶을 그분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바로 이러한 고지 점령자들이 되어야 한다!


Epilogue: 나는 수정과 보완만을 주장한다


나는 누구보다도 ‘고지론’의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그리고 지금도 김동호 목사님의 ‘고지론’ 설교를 통해 나를 도전하셨고 새롭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하기에 더욱 ‘고지론’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올바르게 선포되고 전달되어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고지론’을 뒤집어 엎자고 주장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고지론’의 수정과 보완을 제안한다. 국어사전에 보니 ‘수정’은 그 뜻이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고 ‘보완’은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완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와있다. 나는 딱 이 정도 만을 원하다. ‘고지론’의 의미가 회중들에게 바르게 전달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해의 소지들을 바로잡아 고치고, 또 설명이 미비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보충함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이 ‘고지론’이 온전하게 세워져 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 글은 단순히 ‘고지론’ 그 자체를 향한 외침이기 보다 오히려 ‘고지론’을 받아드리는 청중들을 향한 외침의 의미가 더 크다. 곧 ‘고지론’을 인위적으로 해석함으로서 행여나 성경적 인생관과 세계관을 오도하지 말라는 간곡한 부탁을 담고 있는 것이다.


*본 원고는 뉴욕 맨하탄 헌터 College의 K.C.F.(Korean Christian Fellowship) 모임과 로체스터 연합 장로교회 청년부 수련회(2002년 4월 5-6일) 세미나 등을 통해 나누어졌던 생각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한 글입니다. 특히 한국에서 ‘주님의 교회’를 개척, 사역하시고 몇 년 전 스위스에 교단(장로교 통합) 선교사로 헌신하시다가 귀국하신 이재철 목사님의 설교, ‘비전의 사람'(장신대 신학대학원 사경회: 2000년 3월 29일-31)을 통해서 많은 도전을 받은 원고임을 밝혀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