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의 소리


로마를 꿈꾸는 나라에서 (2)


– 애국심 (On Patriotism)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All a man’s ways seem right to him, But the Lord weighs the heart.” (잠언 21:2)


들어가며


두 가지 장면들이 갑자기 떠오릅니다. 몇 해전에 뉴욕에 있는 어떤 한인교회를 방문했을 때, 광복절을 기념해서 태극기와 성조기를 앞세운 목사님의 입장으로 예배가 시작된 것이 첫 번째로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담당부장으로 지난 1년간 섬겼던 대학부에서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진 1.5세 또는 유학 온 학생들이 한국의 전쟁반대 분위기와 이라크 전쟁 이후 고양된 미국적 애국심 사이에서 갈등 하는 장면입니다. 첫 번째 장면이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들에게는 낯설지않은 ‘한국적 민족주의’ 또는 ‘애국심’의 단면이라면, 두 번째 장면은 이민 1세 부모를 가진 친구들과 부모의 학업이나 회사 일로 영주권을 취득한 학생들이 가지는 자기정체성(identity)의 문제가 노출된 것입니다.


이 장면들과 함께 이런 질문들이 뇌리를 스칩니다. 기독교인은 결코 어떤 정치적 소속감도 가져서는 안 되는가. 기독교인들 사이에 전쟁이나 민족적 갈등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하는가. 과연 1.5세 이민자와 한국국적을 포기한 친구들에게 한미 간 정치적 갈등이 일어날 때 미국시민으로서가 아니라 한국인으로서 판단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좋은가. 북한을 폭격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말하는 한인 1.5세나 2세들을 미국인을 대하듯 쳐다보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무조건 전쟁은 안 된다는 논리로 문제들을 지나치는 것이 좋은가. 복음은 유대인에게나 이방인에게나 좋은 것이나, 정치는 현실이라는 이분된 초점 없고 무원칙적인 이야기만 할 것인가. 모두 답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의 믿음과 대립될 수 있는 선택들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


학문적 토론을 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에서 민족주의를 대중동원수단이나 사회 병리적 집단행동을 가져오는 원인의 하나로 취급하는 반면, 애국심은 가족에 대해서 가지는 연대 감 만큼이나 자연 발생적인 감정으로 간주하는 이유를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식민지배, 오랫동안 단일민족공동체를 유지해왔다는 자부심, 이러한 자부심이 해방과 전쟁, 그리고 개발독재의 동원과 민주화의 과정 속에 너무나도 큰 역할을 해 온 우리에게는 민족주의를 한갖 이데올로기로 이해하는 것이 의아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아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일본이 서양지식을 받아들이면서 만든 ‘民族’이라는 단어가 전달하는 정체성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노와 수치, 기쁨과 우월감을 동시에 가질 수 있도록 만든 원인이 되었는지 누구도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또 기독교인들이 ‘민족’이 ‘하나님의 나라’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고민하기를 오히려 주저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의아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민족이 민족주의운동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운동이 민족을 형성시켰다는 소위 ‘상상의 정치적 공동체’ (imagined political community)로 민족을 정의하는 구성주의 시각에서 민족주의 확산과 관련된 인식론적 변화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내용들은 (1) 왕과 교회를 중심으로 했던 유럽의 정치질서가 붕괴되는 가운데 성경에서 등장하는 천년왕국의 정치적 응용이 있었고, (2)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이후에 전개된 사도들의 목숨을 건 포교활동을 대중동원과 설득으로 이해한 지식인의 계몽운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대를 초월하는 정치적 충성, 수 천년 전에 이 땅을 밟았던 사람들 조차 우리의 아버지요 어머니라고 믿게 만드는 시공을 초월한 일체감, 이런 충성을 번영(prosperity)과 영속(eternity)의 확신으로 변화시키는 매개체로 ‘민족’이 창출되고 또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재생산되는 과정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수 천년 전에 일어난 십자가의 사건이 동시적으로 느껴지고 경험되도록 만든 바울사도의 활동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한 사건에 대해 유사한 생각을 공유하게 만든 신문의 등장과 맞물려 계몽주의 운동의 초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고, 갈 2:20). 만약 민족주의의 확산과정에 ‘하나님의 나라’가 ‘민족’으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한 영웅의 죽음’으로 뒤바뀌는 과정이 서양에서 벌어졌다면,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동양이 무의식적으로 답습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민족’ 또는 ‘민족주의운동’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둘째,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이후에 ‘민족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애국심(patriotism)도 다시 살펴봐야 할 시점에 우리는 서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로마공화국, 그리고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도덕적 품위를 제공했던 ‘조국에 대한 사랑 (amore della patria)’이라는 화두에서부터 미국인들을 일시에 숙연하게 만드는 ‘Die for Country’라는 구호에 이르기까지 애국심은 자기가 살고있는 터전과 함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키려는 자연적인 감정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애국심은 우리에게도 중요한 사회적 덕목입니다. 임금이 나라였던 시대에 君師父一體를 도덕적 근거로 여겼고, 잃어버린 자유와 주권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던졌던 독립 운동가들이 愛國愛族의 정신으로 자신들을 무장했었고, 신세대에게도 ‘대한민국’을 힘껏 외치며 기뻐할 수 있는 용기가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유가 됩니다. 아버지의 나라를 지키고, 어머니의 언어와 자기의 생활터전을 아끼는 애국심은 개인주의로 얼룩진 현대사회에서 개개인을 묶을 수 있는 시민적 덕성으로 강조됩니다. 그러나,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아버지의 나라를 지킨다는 애국심도 자기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때문에 새로운 평가를 받아야 할 시점입니다. 아버지의 나라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위대한 제국의 건설이라는 소명과 이기적인 욕망의 확대된 집단심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번 이라크 전쟁에서 알게 된 우리에게 애국심도 더 이상 아름다운 감정일 수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기독교인들에게 애국심이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경향으로 전환되었을 때 침묵하는 것이 더 이상 용납될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성경 속 ‘민족’ (Nation)


민족주의와 애국심 모두가 공격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성경을 묵상해 보면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고정관념이 성경이 전하는 ‘민족’과 관련된 내용들을 무의식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 있다는 염려가 생긴 것입니다.


신학적 지식이 일천하지만 나름대로 정리하자면 구약에서 민족(nation)으로 번역되는 단어 고이(gowy)는 족속과 ‘하나님의 약속’이 합해진 의미를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민족이 가지는 국민주권과 정치적 통일체와 같은 의미들은 여기서는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혈족이 가지는 역사적 혈연적 동질성도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아브라함의 핏줄이 기준이라면 이스마엘의 자손들도 이스라엘과 같은 민족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 그리고 이들의 후손들로 하나님만 섬기는 사람들과 구별되는 다른 사람들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에 상응하는 축복을 기준으로 이방인(the Other)과 우리(We)를 구별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민족’이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보다 이방인(the Other)을 지칭할 때 더 많이 사용되는 사실도 구별의 기준이 인간적인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고:시편22:27). 이런 이유에서 유대인들의 선민의식은 하나님의 기준을 핏줄로, 약속을 선택으로 이해해서 만들어낸 차별은 아닌지 생각하게 됩니다. 통일 유다의 왕 다윗에게도 따져보면 이방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에서도 민족은 ‘족속’의 의미와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할 때 사용된 단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신약성경에서 민족으로 번역되는 단어는 ethnos입니다.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io와 유사하게 삶을 공유하는 집단 또는 족속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헬라 어입니다. 민족의 고대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근대 민족국가 이전에 형성된 정치적 문화적 공동체를 지칭할 때 사용하는 ethnicity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방인 기독교인(Gentile Christian)을 지칭할 때 ethnos를 사용했고, 개역성경에서 번역자들은 ‘족속’이나 ‘민족’을 구별하지 않았습니다 (예, 마태 22:19). 여러 가지 맥락에서 ‘민족’은 자기 스스로를 지칭하기보다 다른 사람들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고, 이 기준에는 혈연적 언어적 동질성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지’의 여부가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신약의 민족 관은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리스도를 통해 고난과 위로를 받으면 모두가 같은 민족이 되는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중동의 끝없는 민족분쟁과 공격적인 미국의 애국심이 기초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1)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출 22:21, 23:9, 예레미야 7:6), (2) 약한 자를 약하다고 탈취하지 말며 (잠 22:22), (3) 고아와 과부를 두둔해 주라는 (이사야 1:17) 말씀을 받습니다. 만약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주고, 압제 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기 위해서” 일으켰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통해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이사야 58:6). 그러나, 미국이 이기와 욕망에 이끌려 전쟁을 했다면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는” 하나님께서 허무한 결과로 우리 모두를 가르치실 것입니다 (로마서 3:29). 로마를 꿈꾸는 미국이 ‘힘’의 면류관(stephanos)만을 받아쓰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는 흰 말을 탄 자같이 행동한다면 무엇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요 (요한계시록 6:2). 때늦은 감은 없지않지만 미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무분별하고 공격적인 애국심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족주의와 애국심이 남다르게 강한 우리나라도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입장이 진지하게 토론되고 정리되어야 할 시점이 된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주의나 애국심에 호소하기 전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정당한지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는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대신해서: Christ Inside & Love Outside


민족주의와 애국심에 호소하는 국민교육을 세계인류의 보편적 도덕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정치 철학자들의 주장이 서구중심의 ‘보편’으로 차별만 가져온다고 반대하는 학자들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습니다. 이들의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 (Love)이 차이를 극복하고 편견을 보편으로 바꿀 유일한 매개체가 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국가간 민족간 갈등 이전에 예수님의 마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면 설사 총부리를 맞들고 있다 하더라도 순화시키고 또 선한 일로 이끌 그 무엇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기쁨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갈수록 서로의 거리가 좁혀지기 때문입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도, 처 처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도 예수님을 마음 속 깊이 묵상하는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넘쳐 날 것이며 이 사랑은 곧 모두가 싫어하지 않는 보편의 근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1년 동안 코스탄의 소리를 써오면서 저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또 말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로 박사논문을 쓰면서 인간의 욕망과 믿음의 언어들이 구별되어 사용되지않는 것을 보면서 가지게 된 책임의식이 저를 지탱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까지 실패와 좌절, 기쁨과 환희를 가져 다 준 시간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부족한 저에게 격려를 아끼지않으셨던 동역들과 이코스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주님 주신 사랑으로 하나님의 소망이 되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하고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