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준 
 “그땐 그랬지”

      군대에서  일병 계급장을 달고 있었을 때였던  것 같습니다. 밤이 되어 자려고 누워  있는데 방의 한쪽 구석에서 고참  두 명이 밤 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학교 학과 동기로 같이 입대하여 같은 부대에 배치까지 받아서 서로가 무척 친했던 그 두 고참은 그날 따라 꽤 진지한 이야기를 낮은 목소리로 나누고 있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몰라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잘 듣지 못했지만, 유독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고 아직까지 그 고참의 말투 그대로 생생하게 기억에 납니다. 그 말은 “어른들 말씀 틀린 것 하나 없어” 였습니다.

      그  말이 왜 지금까지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같은  세대에 비해서도 상당히 ‘신세대’적인 문화 코드를 가지셨던 그 고참들 입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 신기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저와 한 살 밖에 차이 안나는 그 분들이었지만, 개인적으로 많은 일들을 겪으며 살아오셨던 그 분들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당시의 저에게는 ‘철이 들은’ 말처럼 느껴져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0대  중반에 들었던 그 말이 왜 30대 후반을  향해 가는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해를 거듭해 갈수록,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이제 학교를  들어갈 나이가 되어가기 시작하는 삶의  ‘전환기’들을 겪으면서 그 말의 무게는 점점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때로는 의지적으로 부정하려고 하였던 그 말에, 이제는 조금씩 동감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가끔씩 동의하게도 되는 저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이를  낳기 전, 결혼을 하기 전에는 (한국 사회의) ‘어른들’의 모습들 중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 참 많았습니다. 자식 교육을 위해 학군에 목숨을 거는 모습, 자식의 결혼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 드라마에서나 볼 듯한 – 백태만상들, 가정이라는 핵심적 가치의 물질적 표현이 되어야 할 ‘집’을 투자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모습들, 대학 졸업과 함께 대학에서 외쳤던 자유와 평등과 정의도 그대로 졸업시키는 모습들… 사람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꺼내면 항상 선배들로부터 돌아오는 교과서 대답은 “너도 결혼해봐 (혹은 애 낳아봐)” 였습니다. 선배도 옜날에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냐고 물어보면 자동판매기처럼 찍혀내오던 대답은 “그땐 그랬지”라는, 어느 가요 제목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어떻게 과거와 현재가 그렇게 단절될 수 있는지 궁금했었습니다. 아마 저만 가졌던 의문은 아니였을 것입니다.

      물론  결혼 이후에는, 또 아이를 가진 이후의  삶에는 제가 모르는 무엇인가가 있을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특히 이러한 이슈들에 있어서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떠한 유의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도 하고 분노도 하며 때로는 (하지 말았어야 할) ‘판단’도 하였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의 나

      시간이  흘러 저도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아이가 자라서 내년이면 미국에서 kinder에 들어갈 나이가 되었습니다. 군대에서  고참들의 말을 어깨넘어 들은지 15년이 지나서 그 말의 의미와 무게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먼저 결혼하고 애를 낳았던 선배들의 이야기를 기억해 봅니다. 나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니 전에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어른들’의 모습들이 저에게도 보이게 되었을까요? 옛날에 그렇게도 이상하게만 보였던 ‘결혼 이후의 삶’으로 들어섰는데, 나에게는 그 ‘이상한 나라’가 여전히 이상하게 보일까요, 아니면 나 자신도 이상해져서 그 ‘이상한 나라’가 더 이상 이상하지 않게 보이게 되었을까요?

      지금  저의 모습이 어떠한지, 어느만큼 그  ‘어른들’ 중 한 명처럼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20대 때 제가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비판했던 그 부분들에 대해 이제는 점점 “그렇다면 나와 우리 가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을 해야할 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제가 하나님 앞에서 갖고 있는 이상과 이 땅에서의 현실 사이에서의 갈등을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과거에는 비판했던 그 모습들에 동의까지는 못하겠지만, 왜 그런 모습을 갖고 사는지 ‘이해는 된다’며 한 발 물러서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제가 이제 철이 들어 세상과 현실을 알아가게 된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포기하고 세속화 및 (개인주의적) 가족주의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결혼과  육아라는 인생의 새로운 단계들을 새롭게  밟으면서 신앙과 현실 사이에 더  많은 고민과 혼란, 그리고 가치관의 충돌이 생기게 됩니다. 머리로는 한국적 가족주의를 반대하면서도 몸 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지라 나의 가족을 챙기고 보호하는 데에는 본능적으로 움직이는 저 자신을 발견합니다. 한국 사회의 주요한 고질적 문제들은 대부분 과도하고 빗나간 자식 사랑 때문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자기 자식 챙기는 데에는 웬만한 고슴도치 부모와 같은 저의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도 제자도를 이야기하시면서 가족 이야기를 꺼내셨구나 생각이 들다가도, 예수님도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 앞에 있었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 것은 피의 진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게도 됩니다.

      이렇게  고민과 혼란은 쌓여져 가는데, 이러한  고민과 질문들을 나눌 사람들은 더  적어져 갑니다. 아마 개인적으로는 결혼과 함께 유학생활을 하게되어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로부터 멀어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러한 고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지 않기도 하고, 설사 있더라도 그러한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기회가 부족한 것이 더 큰 이유인 것 같습니다. 또한 공부를 하고 있든지 직장을 다니고 있든지, 그래도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경우에는 좀 나을 수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이러한 고민을 나누기는 커녕 예배, 말씀, 기도, 독서 등의 기본적인 영성의 삶을 살기에도 벅차도록 바쁜 것이 많은 30-40대 기혼자들의 현실입니다.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일요일에 교회가는 것이 사치에 가까운 분위기입니다. 얼마전 인터넷에 올라온 초등학생의 시처럼 “냉장고는 자기에게 먹을 것을 주고 강아지는 자기와 놀아줘서 좋은데 아빠라는 존재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오늘날 한국 아빠들의 현주소입니다.  

 KOSTA – 기혼자들의 새로운 기회?

      KOSTA 연차 수양회 참여자 중에 기혼자와 비청년층(‘청년’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호하지만)의 비율이 높아짐에 따라 운동으로서의 KOSTA의 정체성과 방향에 있어서나 집회로서의 KOSTA 연차 수양회의 운영과 구성에 있어 많은 도전과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KOSTA의 연차 수양회에 이들의 참여 비중이 높아졌는데, 그렇기 때문에 KOSTA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점점 깊어지고 진지해지는 것 같습니다. 과연 KOSTA가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KOSTA의 운동의 흐름에 있어서나 수양회의 운영에 있어 적극적으로 품어야 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이 지금 KOSTA가 품고 있는 KOSTA의 핵심 가치에 부합하는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결단력 있게 고민하고 실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이야기는 제가 이 자리에서 할 입장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만약 KOSTA가 이 계층을 적극적으로 품고  나아간다면, KOSTA가 앞에서 짧고 무작위하게  언급했던 것과 같은 고민들이 함께  나누어지고, 이러한 이슈들에 대해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의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도전이 주어지는 자리가 되면 좋겠다라는 바램을 가져봅니다.

      현재의 KOSTA 수양회에도 기혼자들을 위한 프로그램들이  있습니다. 세미나 중에 기혼자들을 위한  세미나들도 있고, 또 몇 년 전부터 기혼자 강사와의 만남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고민을 나눌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제들은 대부분 부부관계와 자녀양육, 그리고 소위 ‘F2 이슈’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정체성 문제에 제한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고, 또한 저와 저희 가정을 포함해서 KOSTA에 오시는 가정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이 이슈들이 갖는 무게감이 얼마나 큰가 공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가 기혼자이기 때문에 ‘가정 안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만 고민할 것이 아니라, 기혼자이기 때문에 잊혀져 가고 있을 수 있는 ‘이 땅 가운데에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기혼자의 특별한 상황과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실험하고 섬길 수 있는 도전과 용기를 얻을 수 있는 KOSTA가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 봅니다.

      KOSTA는  ‘흩어진 나그네’로서 외국 땅에서 다른 민족을 말씀과 사랑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한(Korean)민족의 삶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소수 민족’이라는 특성상 경제·사회적 불안정성이 강하고, 따라서 자기 보호의식이 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이웃을 돌아보기보다는 나와 내 가정의 안정에 더 집착하게 되기 쉬운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는 미혼자, 기혼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지만, 이러한 괴리는 ‘가정’이라는 변수에 의해 더 증폭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KOSTA가  기혼자들을 적극적으로 품는다면, 수많은  이 땅의 결혼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의  삶에서 위와 같은 괴리가 좁혀져가도록  때로는 힘과 용기를, 떄로는 자극과  도전을 던져주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를 위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 속의 답답함과 삶에서의 괴리를 느끼는 분들이 있다면, 그 답답함과 실망, 혹은 무력감을 함께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격려와 위로를 심어주는 좋은 시작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