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1년 때부터 25년간의 신앙생활을 통해 내가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성경이 잔인하리 만큼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둘러봐도 인정사정 없이 나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말씀들로 가득 차 있다. 성경은 나의 숨겨놓은 비밀, 숨은 동기를 파헤쳐 빛 앞으로 가져오게 한다.


나는 유학이라고는 생각도 못해 보던 평범한 (다소 뒤떨어진) 학생이었다. 그러다가 가담한 어느 선교회에서 하도 해외 선교사에 대한 대단한 선전을 하길래, 나도 해외에 한번 나가서 선교사적인 삶을 살면서 유학을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이 생각은 곧 한국에 돌아와서 교수로 있으면서 캠퍼스내 성경공부를 인도하면 무척 근사하지 않겠느냐는 꿈으로 이어졌다. 비단 나만이 이런 꿈을 꾸었던 것이 아님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뜻밖에도 유학할 장학금을 받게 되고 유학할 분야에 맞는 학교와 교수님까지 정해지자, 모든 것이 급속도로 순조롭게 진행되어서 도미하게 되었다. 컴퓨터 구조와 하드웨어를 직접 만들고 테스트하는 일이라 힘들었지만 (사실 아내가 더 힘들었음에 틀림없다 – 이 글을 아내가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8년 공부를 마치고 학교에 남아서 연구조교수로 3년 반을 더 보내었다. 좀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내 머리가 거의 반백이 되도록 (모자라는 머리니까 시간으로라도 때우려고 했었다) 말할 수 없이 바쁘게 지내었지만 결국 모자라는 능력으로 무리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기간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려 보자는 마음에 마지막쯤 되어 여기저기 학교에다 일자리를 구했지만 실패하였다. 내게는 학교교수라는 꿈이 내가 원하는데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꿈이 먼저인가, 현실이 먼저인가?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셨지만, 특히 실패를 하게되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더구나 기독교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셨던가 생각하게 된다. 실패한 후에야 깨달았다는 반성은 마치 자기 합리화가 되는 듯하여 다른 사람들에게는 왠지 맥이 빠진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내 개인의 입장에서는 이 실패를 거듭하지 않고 얼마 남지 않은 단 한번의 인생을 의미있게 보내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었고, 이 고민은 나에게는 엄청 중대한 것이었다. 실패의 외형적 원인이야 능력 부족 및 게으름이라고 하며 끝낼 수 있겠지만, 실패의 고비에서 나는 내 인생의 항로에서 내가 아주 결정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실 실패는 학교의 교수직을 확보하지 못하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귀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첫째 나는 내 인생의 꿈을 좇다가 현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는 유학생이기에 이 땅의 주인이 아니라 항상 손님이었다.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회적인 책임을 요구하는 일들에서 항상 수동적이고 책임감없는 존재였다. 연구실이나 학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지역사회나 학생 하우징에서 필요로 하는 봉사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서의 참여가 당연히 우선순위에서 밑바닥이었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딱하게 된 것은, 신앙의 성장이 멈추어 선 데 있었다. 10여 년이 지나도록 학업이라는 미명하에 나의 지극히 수동적이고 성장없는 신앙을 방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경말씀이 강조하는 바가 꿈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성실하고 충성하라는 데 있음을 발견하게 되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성경은 꿈을 꾸라고 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처한 현실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한다.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리라고 몇 번이나 말씀 하셨지만, 묵시가 없으면 방자하다고 경고하시지만,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지만, 바울에게 로마를 보여주셨지만, 그리고 믿음이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이라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분의 꿈을 보여주시지 나더러 꿈을 꾸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더구나 지금, 바로 현재의 시간이 의미없는 것이니까 미래를 바라보면서 현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지금 이 시간에 내가 처한 곳에서 심지어 고통까지 포함해서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하신다. 나의 삶은 학업이 끝난 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고 보니 학생들만이 이 땅에서 손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다. 이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특히 나같이(?) 젊은 사람들은 어느 한 곳에서 평생 살아갈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 곳이 직장이든, 학교든, 가정이 있는 집이든, 대부분 수년 내에 다른 곳으로 기회를 찾아 쫓기듯 이동해 간다. 그러기에 마치 직장에서 임시고용된 사람들 같이 아무런 책임의식없이 살아간다. 뭐 사회의 추세가 그러니까 이해할 수 있지만, 문제는 영원성을 추구하는 신앙과 나의 실제 삶이 삐걱삐걱한다는 데 있었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그룹의 형제자매들이지만 얼마 있으면 공부를 마치고 또는 직장이 바뀌어 다른 곳으로 가게 되니 나는 헌신하고 기여할 수 없게 된다. 영원히 아끼고 사랑하고 싶은 그룹이라도 곧 떠날지도 모른다는 점이 방관하는 자신을 매끄럽게 변명해 준다.


그러나 곧 떠나야 하는, 또는 떠날 지도 모르는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라면 나는 생각을 달리 해야했다. 내일 떠나더라도 오늘 영원히 이 그룹을 위해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섬기는 것이 지극히 성경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 땅을 나그네로 살아갈 것을 가르치지만, 나그네의 삶은 나그네로 지내는 그 자체가 삶이지 어디에 안착한 뒤의 삶이 그의 이 땅에서 영위한 삶이 될 것은 아니다. 이 땅에서의 안착이란 결국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해 주는바가 아니던가.


탁월함의 추구, 성경적인가?


둘째 나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시대 유행의 희생자였다. 아니, 희생자가 되려고 자처하며 나섰던 것이었다. 이 시대의 성공적인 삶을 탁월함으로 이루고자 하였다. 물론 공부를 하고자 나섰던 것이니 나의 탁월하려는 노력은 논문쓰기와 특허출원, 그리고 펀드레이징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능력의 부족을 인식하게 되면서 과연 그리스도인의 세상적 탁월함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과연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신명기 28:13)”는 말씀이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가? 일등은 하나만 되는 것이 아닌가? 이 문제는 특히나 학교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는 두뇌들을 보면서 부족한 나 자신에 대한 자조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지만, 감사하게도 첫번째 문제에 대한 반성으로 내 안에 이미 싹트기 시작한 성경적인 관점의 그리스도인의 삶 – 즉 성실하고 충성하는 삶 – 으로 인해 새로이 조명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옳다. 그렇다! 성경 어디를 둘러봐도 일등하라고 하지 않는다. 신명기의 말씀은 순종하는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사랑하심의 표현이다. 탁월함은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의 부산물이지 목표가 아니다.


탁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나게 되었을 때 느낀 그 자유함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탁월하지 않은 자신을 올가미를 씌어가며 몰아가고 있었던 것이었으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는 약속을 또 한 번 체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C.S. Lewis가 이 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표현한 것을 발견하였다:


“저는 ‘난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을 없애려고 애를 쓰는 편입니다. 그러나 ‘난 다른 사람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어’라는 생각을 함으로써 그리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처럼 특별한 존재야’라는 느낌으로 그리하려고 합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않고서 탁월하지 못함을 안위로 삼는 일이 생길 수 있는데, 적어도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진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충성할 때를 가정하는 것이니만큼, 탁월하지 못함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은 더 이상 열등감이나 경쟁에 뒤쳐진 불안이 아니게 되었다. 더구나 발빠른 주변 사람들의 행보에 늘 뒤쳐지던 나는 이 씨애틀 땅에 쳐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자족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씨애틀에 사는 동안 충성해야 할 것이 무엇이지 이미 몇 가지 눈 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새 나를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잃어버린 10년, 그 이후


성경이 나의 붕 뜬 생활을 지적하였을 때 나는 지나간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이름하였다. 그리고 이 미국땅에서 어떻게든 하루를 살든지 평생 미국에서 살 것 같은 마음으로 대하여야 함을 깨달았다. 물론 그 10년을 실패한 삶으로 부른다는 것 자체가 정말 어렵게 생활하는 많은 분들에게 오히려 마음을 아프게 하는 농담이 될 까 두려울 정도로 나의 실패는 그분들의 어려움에 비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 보니, 하나님께서는 내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그 10년을 통해 섬세하게 내 마음을 아주 낮추어 주셨고 그 10년을 되찾는 길을 열어 주셨다. 물론 처음부터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지금 나는 훨씬 더 그분이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만, 작은 일에, 현재의 일에 충성하는 진리가 주는 기쁨과 감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한 안타까움까지 잊게한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히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