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3년 8월호

저희는 지금 유학(留學) 중입니다. ‘유학’ 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지요? 1990년대 들어 조기유학, 단기유학 같은 말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제는 유학이라는 말이 담아내고 있는 의미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학’ 하면 대개는 한 남자가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기 위해 학위를 따는 과정으로 받아들여지기 마련이지요. 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한 이름 있는 학교에 입학해야 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죽어라 공부해야 하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뒤따릅니다. 남편이 거의 모든 시간을 책과 씨름하는 동안 여성 배우자 역시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살림하고 애들 키우면서 나름의 고생을 하게 됩니다. 부자가 아닌 이상에야 유학 기간 내내 돈에 쪼들리면서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따라서 유학 기간을 즐기기보다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미덕이 되고 말지요. 대충 이러한 몇 컷의 스틸 사진들이 유학 생활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사람마다 색깔이 다르기에 유학의 빛깔도 가지각색일 겝니다. 아무리 각박하고 버거운 유학 생활을 보내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나름의 여유와 멋이 없을 리 없지요. 하지만 유학에 대한 전체적인 틀은 확고 불변하며 좀체 끄덕하지 않습니다. 저희 가족의 유학 역시 다른 색채를 띠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같은 틀에서 나온 변주(變奏)가 아니라 다른 틀을 지닌, 어찌 보면 약간은 파격적인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저희 가정의 조금은 다른 유학 생활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제 지인(知人)들이 제가 공부하러 토론토에 온 것까지는 아는데 재미있게도 제가 무얼 공부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더라구요. 저는 지금 기독교학문연구소(Institute for Christian Studies)에서 철학적 미학(Philosophical Aesthetics) 석사과정을 밟으러 왔다가 제가 생각하던 것과는 아귀가 다소 맞지 않는 면이 있어서 신학에 토대를 둔 학제학적 연구(Interdisciplinary Studies)로 전공을 변경해서 수학하고 있습니다. 학부시절부터 저의 일관된 관심사가 세계관(또는 종교, 혹은 신학) 및 문화(‘대중문화’라고 할 때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의 삶의 양식 전체를 가리킬 때의 ‘문화’)의 관계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신학(종교학, religious studies)과 문화연구(cultural studies), 그리고 철학이 버무려진 비빔밥식 공부에 아주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특히 포스트모더니즘과 신자유주의 시대라는 오늘의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신학’하는 실비아 키이스맛(Sylvia Keesmaat)과 브라이언 월쉬(Brian Walsh) 부부를 저의 멘토(mentor)로 삼아 공부하는 것은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일입니다.


지금 하는 공부를 마친 다음에는–주님께서 허락하신다면–일반학교로 적을 옮기거나 우리 학교를 포함한 기독교 계통의 학교 또는 신학교에서 문화와 관련된 공부(문화이론, 문화철학, 혹은 문화신학)를 하거나 방향을 조금 바꾸어서 영성신학이나 가정상담학도 상당히 해보고 싶습니다. 제가 학부부터 시작해 석사과정, 박사과정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따로국밥식 전공을 하려는 것에 대해 저를 아끼시는 몇몇 분들은 공부를 마친 다음의 일을 염려하시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전공의 변경으로 인한 불이익을 이름이지요. 특히 한국적인 상황에서, 더구나 박사 실업자가 이렇게 많은 상황에서 전공을 바꾸는 것은 장래를 보장받지 못하는 다소 무모한 일이니까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나라를 위한 전략에서라면 모를까 지위나 생계를 위해서 어떤 자리에 연연하는 그런 마음은 없습니다. 그저 무슨 공부를 하든지 앞으로 이어질 학문의 모든 여정을 그 분께 내맡기는 유목민적 지식인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뿐입니다. 저는 더디 가고 에둘러 가더라도 이미 주어진 레디메이드 학문이 아닌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유목민적인 공부를 해서, 인문학다운 인문학(人文學), 즉 사람(人)과 문화(文)를 살리는 학문(學)을 하고 싶습니다.


소제목에 사용한 유학(幼學)이란 한자는 본디 고려 및 조선 시대에, 벼슬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인데 저도 이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내키는 대로 공부하고 있으니 저의 유학 생활을 지칭하는 말로 이보다 더 좋은 말이 또 있는가 싶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조금 더 나가자면, 박사학위를 받아오면 전부 다 강단에 서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상식적인 생각’이 얼마나 지식인들과 이 사회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가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이를 지식인들에게 가해지는 일종의 폭력으로 봅니다. 물론 교수라는 폼나는 자리에만 연연하는 대부분의 박사 학위 소지자 자신들이 가장 큰 문제겠지만, 유학 갔다 오면 당연히 교수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못하면 패배자로 간주하는 집단무의식적 편견을 극복하는 것은 웬만한 내공으로는 힘에 부치는 일입니다. 학위를 받고서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는 분야가 지천으로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 부담감이 현장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막아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엄청난 손실을 빚어내고 있는 실정이지요.


대학 주위에는 강단의 빈자리를 뚫으려는 사람들이 ‘박사실업자’라는 호칭을 달고 버글거리는 반면 ‘현장’에는 전문가가 부족하다며 볼멘 소리들을 하더군요. 박사님들 역시 “내가 이걸 따느라 얼마나 많은 돈과 정력을 들였는데…”하는 ‘본전생각’만 버린다면 창조적인 일로 수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할 수 있을 텐데 발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물론 제 취향이긴 하지만 학위를 받고 학자연(然)입네 하는 것보다 시민단체 같은 현장에서 일하는 것이 더 폼나지 않을까요? 예를 들자면, 월드컵 4강을 이루었던 히딩크 사단의 체력담당관이 박사 출신임은 내남이 다 아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제가 언제까지 공부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하나님께서 저를 심으신 이 땅과 이 시대에 사람과 문화를 살리는 데 한몫 거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기실 공부를 마친 다음에 제가 가장 하고픈 일은 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농사입니다. 4시간 밭을 일구고(피조계와의 사귐) 4시간 공부하고(삶과 문화를 배움) 4시간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이웃을 섬김) 삶을 살고 싶습니다. 훗날 이곳 캐나다에 머물지 고국으로 돌아올지 그 역시 님의 뜻을 따르겠지만, 만약 한국에 돌아온다면 갯살림, 들살림, 산살림이 고루 가능한 천혜의 공간인 변산(邊山) 같은 곳에 가서 태평농법(泰平農法)으로 태평하게 농사지으며 농촌과 지역 사회를 기름지게 할 하며 살 수 있다면 대만족이겠고, 외국에 남는다면 켄터키(Kentucky)에서 농사짓는 괴짜 노인이자 기독교 작가인 웬델 베리(Wendell Berry)와 버몬트(Vermont)의 숲 속에서 자연친화적인 삶을 살다 간 니어링 부부를 따라 캐나다의 대평원(prairie) 같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북미에 사는 이들 및 이곳의 기독인들, 그리고 이민 온 한인들을 소박하게 섬기며 살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 없이 흡족할 것입니다.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지난 가을학기는 공부만을 놓고 봤을 때 가장 버거운 한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시다시피 언어의 문제도 큰데, 전공 변경이라는 이중고까지 겹쳐서 호락호락하지 않더군요. 게다가 아무리 질박하고 소박한 삶을 영위하려고 해도 기본적으로 현대 사회에 얽혀서 살다보니 토론토 정착과 관련된 굵고 자지레한 일들이 첫 학기와 두 학기 내내 적지 않은 시간을 뺏어갔습니다. 더구나 작년 6월 편도선 수술로 인한 몸의 변화와 뒤따른 세 차례의 출혈로 인한 체력 저하로 인해 두 세 시간만 앉아서 공부를 해도 더 이상 집중을 못할 정도로 눈이 아프고 지치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설마 제가 한 학기 내내 한숨만 푹푹 쉬며 살았으리라 생각지는 않으시겠죠? 만만치는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특유의 여유와 낙관으로 늘 웃으며 지냈더니 군대 동료들이 그랬듯이 여기 와서도 학교 사람들이 저를 해피맨(happy man)이라고 부르더군요.


가족에게로 눈을 돌려보자면, 제가 늘 보살펴야 할 사랑하는 두 사람 역시 꽤 많은 시간을 가져갔습니다. 저 역시 유학 첫 학기인지라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집중해야 할 필요가 있지만 두 사람 역시 낯선 곳에서의 생활에 첫 발을 내디딘지라 말은 꺼내지 않아도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해달라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공부만 놓고 보자면(현실적으로 우리의 삶이라는 것을 그렇게 분리한다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안팎으로 우환이 겹친 격인데, 다행히도 제게는 크게 고민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겨나는 고민이라는 것이 대개는 확고불변하지 못한 원칙에서 비롯되는 법이거든요. 그런데 저는 철저하게 학업보다 가정을 앞에 두는 것을 제 유학 생활 전체를 관통할 몇 가지 원칙 중 하나로 삼았거든요. 물론 당장 내야 할 과제물이 있을 때는 양해를 구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평소에는 상당한 시간을 가족과 더불어 보냈습니다. 이를테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일찍 귀가해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기회가 닿는 대로 장도 같이 보고 세탁소도 같이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유학 와서 공부에 전무하기 보다 가족을 먼저 챙겼다고 하니 어찌 보면 자랑은 아니지만 당장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만 해도 울 아내가 영어를 배울 수 있도록 백방으로 알아보았고, 토론토 지역 소식과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채널을 열어주었고, 학교 친구 에이미와 상호한미교습(서로 한국말과 영어를 가르쳐 주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주었습니다. 해민이 난날(生日)도 아내랑 더불어 지성으로 챙겨주고, 집에만 있는 해민이가 심심해하지 않도록 귀갓길에 중고가게를 헌팅하여 장난감도 자주 안겨주고 관심 있어 하는 책과 비디오도 검색해서 끊어지지 않게 대어주었습니다. 동네도서관과 지역문화센터에서 무료로 혹은 저렴하게 제공하는 프로그램들을 찾아 데려가고, 가족과의 나들이를 꿈꾸며 매월 토론토의 가족관련 소식지를 챙기고, 해민이와 아내의 시야를 넓혀주기 위해 토론토의 가볼 만한 곳과 먹을 만한 곳이 담긴 책–Toronto: The Family-Tasted Guide to Fun Places 또는 Toronto with Kids와 같은 책들–은 동네 도서관에서 죄다 가져다가 읽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관계’가 ‘성취’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가족은 항상 공부보다 한 발 앞서 나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날 아침 일찍 제출해야 할 과제를 어떻게 마쳐야 할지 캄캄한 지경이라도 해민이 침대에 나란히 앉아 그림책과 성서이야기책을 읽어주지 않고 잠자리 뽀뽀(goodnight kiss)를 한 적이 없습니다. 서 있을 힘조차 없을 정도로 지칠 경우에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아무리 바쁘고 시간이 없어도 밥 먹고 설거지는 했습니다. 아내가 그냥 두라고 하면 “밤에 10분만 늦게 자면 되는 걸, 뭘.”하며 고무장갑을 끼곤 했지요.


이번 소제목에 달린 단어 ‘유학'(有學)은 원래 불교 용어로서 불가에 귀의하여 진리를 인식하였으나 아직 번뇌를 다 끊지 못하여 항상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을 닦는 불제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저 역시 공부에 전념하러 여기 왔으나 가족에 대한 번뇌를 끊지 못하여 늘 가족에게 마음을 두고(有) 공부(學)를 하니 유학(有學)이라 한들 뭐 그리 틀린 말도 아닌 듯 합니다.


생활을 즐기며 삶을 통해 배우는 유학(遊學)


유학(遊學)이란 타향에서 공부한다는 뜻으로 우리 어릴 적 시골 출신 선생님이 우스개로 “이래봬도 내가 도시에 유학 다녀 온 사람이여”라고 하면 어린 학생들이 “하하, 선생님. 도시에서 공부하는 것도 유학입니까?”라고 웃을 때의 그 유학입니다(실은 외국에서 공부한다는 유학과는 한자가 다르지요). 그런데 하필 배울 학(學)자 앞에 정반대의 의미인 다닐/놀 유(遊)자를 썼을까요? 읍내에만 가도 눈이 휘둥그래지는 시골 출신의 학생에게는 장안을 다니며 보고 겪는 모든 것도 다 공부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저처럼 보고 겪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그래서 겨우 하루에 8시간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자는 것이 목표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유엔에서 무려 다섯 해나 연속으로 세계에서 가장 국제적인(cosmopolitan) 도시로 선정한 이곳 토론토에서 오만가지 문화를 겪으며 배우는 인생 공부를 더 즐기는 사람에게는, 외국에 유학 갔다고 할 때의 ‘유학'(留學)보다는 ‘유학'(遊學)이 더 맞을 겁니다.


작년 여름 토론토에 닿자마자 이 도시를 사랑하고자 기도하였고, 그 기도가 응답이 되어 헨리 나우웬(Henry Nouwen)처럼 진실로 이곳을 사랑하게 되었고, 사랑하면 알고 싶어진다고 이곳을 알아가기 위해 늘 잡스러운 노력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토론토의 역사와 개관에 관한 책을 읽어가면서 토론토의 과거의 현재, 미래에 관한 전체적인 모양새도 슬슬 머리에 담겨지고, 길과 동네 이름의 유래도 차차 익혀나가고 있습니다. 그 덕에 이곳에서 오래 사신 분들도 모르는 것들, 이를테면 1792년 온타리오의 수도로 지명되었을 당시 단지 12채의 집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토론토란 지명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그 뜻이 만남의 장소(the place of meeting)라는 것 등을 저보다 더 오래 사신 분들에게 문제로 내기도 합니다.


학교와 집을 오갈 때에도 가능하면 낯선 길로 다니면서 이곳 저곳 눈요기를 하고, 길을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국에는 없는 가게가 있으면 일부러 들어가 한 번 들러봐도 되냐고 묻고는 낯설고 진기한 것들을 살펴보고 구경합니다. 전세계 장신구들을 모아놓은 가게, 포르투갈과 브라질의 문화상품을 취급하는 가게, 인도산(産) 선물용품으로 가득 채워진 가게, 겉보기에도 묘한 기분이 드는 오컬트샵(occult shop), 네덜란드식 아이스크림과 얼린 요구르트를 파는 가게, 카리브해 먹거리만 전담하는 수퍼마켓, 캔디와 생일용품 등을 파는 캔디스토어가 바로 그런 곳들이지요.


제가 워낙에 풀꽃나무를 사랑했기에 토론토의 자연과 벗하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두 말하면 잔소리일 것입니다. 이를 위해 『토론토의 계곡』(Torontos Ravines: Walking the Hidden Country)이라든지 『토론토 주변을 산책하기 위한 온타리오 하이킹 가이드』(The Hike Ontario Guide to Walks around Toronto) 같은 책을 들여다보며 일주일에 한 번은 아내랑 해민이와 함께 하루여행객(daytripper)이 되기 위해 대중교통으로 갈 만 한 곳의 목록을 뽑아놓기도 합니다.


저는 의식주를 통해서는 물론이거니와 위에서 언급한 것들에 더해 정치 사회, 자녀 양육, 학교 교육, 지역 사회, 가정의 제도와 의료 체계, 여가 및 놀이, 뒤뜰 가꾸기, 자전거 타기, 거라지 세일(garage sale) 등 이곳 생활의 모든 부스러기들로부터 ‘삶’을 배우고 ‘신학’하기를 원합니다. 제 컴퓨터에 ‘삶과 글’이라는 디렉토리 아래에 ‘토론토 생활 잡동사니’라는 꾸러미를 만들어놓고는 토론토에 사랑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것들을 스크랩한 것도 이미 적지 않은 분량이 되어 갑니다. 아마 이렇게 살다가 한 몇 년 지나면 “토론토 100배 즐기면서 영어 배우기” 뭐 이런 제목의 책이라도 쓰게 될지 모를 일이지요.


저는 늘 기도하기를, 학교 수업과 제 전공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저의 이러한 성향을 통해 타국 생활의 전 기간 동안 삶 전체로 배우고 공부하며 그것을 글로 녹여낼 수 있기를 빕니다. 말 그대로 살림을 통해 ‘신학’하며 ‘문화 연구’를 하는 이가 되기를 빕니다.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저는 오래 전부터 이번 유학이 저만의 유학이 아닌 저희 가족 모두의 유학이 되도록 기도해왔습니다. 흔히 볼 수 있듯이 남편은 죽어라고 공부하느라 집을 하숙집처럼 여기는 사이에, 아내는 유모와 가정부로 전락하여 영어 한 마디 못하게 되는 그런 비인간적인 유학이 의외로 많습니다. 게다가 어린애들이 둘 셋 있는 집은 정말 한숨밖에 안 나오죠. 하루 하루가 얼마나 정신 없고 피곤할지 환합니다. 안 봐도 비디오, 안 들어도 오디오죠. 애들한테 매달리다보면 하루는 왜 그리 빨리 가는지,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주는 데가 있다고 해도 갈 엄두가 나질 않고 외국 친구를 만드는 건 꿈도 못 꿉니다. 게다가 주변에 한국사람이 없으면 말벗조차 없어 외로움과 답답함은 점점 깊어가지요. 이민 온 사람들처럼 상대적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다면 가끔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기분 전환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한국처럼 대중교통도 여의치 않은 곳에서 애들 데리고 밖에 나간다는 건 좀체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지요.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 어떻게든 빨리 학위 따서 돌아가는 게 상책이다 보니, 유학생 부인들은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는 분노는 풀릴 길이 없어 마침내 우울증에 걸리게 되고 마는 뻔한 시나리오가 의외로 자주 현실화된다는 것은 염연한 사실입니다. 애들은 애들대로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돌이킬 수 없는 결함을 안게 되고, 정체성의 문제로 인한 혼란스러움과 가난에 대한 스트레스 등을 부모 발음을 놀리는 재미로 해소하는 식이 되고 말지요. 그러다 보니 가정은 무너지고 어찌 어찌 해서 겨우 학위를 받는다고 해도, 이는 만약 배우자와 자녀들의 한결 같은 동의가 있을 리도 없겠거니와 설사 그렇다하더라도 이는 한쪽의 일방적인 희생을 담보로 한, 좀 심하게 말하면 가족의 삶을 착취하면서 이뤄진 학위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한국을 떠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유학계획을 세웠습니다. 일단 첫 번째 시기는 제가 먼저 시작해서 미안하긴 하지만, 일단 준비가 되어 있는 제가 3년 간 ICS에서 석사과정을 밟으며 저의 소명을 위해 전념하는 ‘유학 1기’입니다. 그 시간동안 아내는 살림과 육아를 감당하면서 영어를 익히는 등 자신의 소명을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준비할 것입니다. 또 하나 이 기간에 주님이 허락하시면 해민이 동생을 가질 생각입니다. 이어 ‘유학 2기’인 이후 3년 간은 제가 집으로 들어와 살림을 하고 아내가 간호사로서 공부하고 일을 하든지 혹은 다른 소명을 품게 된다면 그에 맞는 공부나 일을 할 계획입니다. 아내 자신의 소명을 위해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지요. 이 세 해 동안 저는 아내 뒷바라지를 하면서 애들을 키우고 공부하며 글을 쓸 것입니다. 다음 ‘유학 3기’ 시기는 두 사람이 다 자신의 소명터에서 전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해민이도 즐겁게 학교에 다닐 것이고 둘째 아이 역시 제 형 또는 제 옵바 손을 잡고 유치원에 나가겠지요. 적어놓고 보니 그야말로 장밋빛 계획에 다름 아니군요. 말이야 쉽지만 실제로는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만 그의 나라에서는 ‘성취’보다는 ‘관계’가 항시 먼저임을 늘 되새기면서 조금 더 힘들고 시간이 들더라도 가족과 더불어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착취하면서 얻어진 공부는 다른 이웃들에게도 영향력이 없음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토론토에 오고나서 계획이 좀 변경되었습니다. 사실 아내가 한국에서 간호사 자격증을 따기는 했지만, 병원 근무 경험이 전무한데다가 전공을 살릴지 다른 공부나 일을 할지 아무 것도 결정한 것이 없이 왔고, 따라서 온타리오 간호사 자격 취득 관련 정보 같은 것은 전혀 알아보지도 않고 왔는데, 저희가 이곳 변두리 아파트에 둥지를 틀기도 전에, 아니 시차 적응도 채 되기 전에 간호사로 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였고, 아내 역시 몇 년간의 직장 생활 후에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하고 간호사가 됐지만, 해민이 키우느라 배운 것을 묻어두기만 했는지라, 이 참에 온타리오 간호사로 일하고픈 마음이 자연스레 일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여름날 해민이를 데리고 RN(Registerd Nurse, 정규간호사) 준비 학원이니 취업설명회니 온타리오 간호협회니 해서 여기저기 다리품 좀 팔고 다닌 결과 본디 계획을 조금 수정하여 온타리오 간호사 준비에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놓기로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온갖 서류를 준비하여 온타리오 간호협회에 RN 등록을 위한 자격 조회를 했더니 간호사 등록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제 시험과 영어만 해결되면 되는데 그게 한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하는군요. 혼자 준비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비용이 6,750불이나 하는 학원은 엄두를 못 내고 대신 RN Prep Guide 책을 구입해서 혼자 공부하면서 모르는 것은 저한테 영어 못한다고 구박을 받아가며 꿋꿋하게 혼자 공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첫 학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아내가 간호사 준비를 안 한다고 해도 영어 배우러 다니는 시간 정도는 내주려고 전부터 맘을 먹고 있었으니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었는데, 솔직히 3년 뒤에 할 일을 당겨서 준비한다고 하니 제 코가 석자인 입장에서 조금은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을 뜨기 전 지난 1년 반 동안 저의 유학 준비를 위해 아내가 처갓집에 들어가 식모살이에 준하는 생활을 하기도 했는데, 까짓 거 정말 필요하다면 제가 파트타임 학생으로 등록해서 아내를 팍팍 밀어줄 수도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회가 되어 유학 2기로 예정되어 있던 아내가 시간을 먼저 갖기 위해 나랑 자리바꿈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요즘 여성들이 조선시대처럼 합의되지 않은 인고의 세월을 감내할 리도 없거니와–그것이 옳지도 않으니 당연히 반대해야 하겠지만–자녀들 역시 아빠의 학위 취득을 위해 평생을 위한 인격이 형성되는 시기를 볼모로 잡히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학위가 예수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가정 불화, 자녀 가출, 주부 우울증, 파경, 이혼 등에 이르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ICS에서 함께 공부하는 한 형으로부터 자신이 미국에서 공부할 때 유학왔던 한 가정이 있었는데, 남편은 죽어라고 10년을 공부만 해서 신학박사가 됐지만 부인은 결국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는 얘길 들으니 속이 어찌나 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아내는 교수님 사모님 소리 듣는 걸로 치유가 될까요?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상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는 한국 유학생 가정 뿐 아니라 북미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하는군요. 그리하여 수많은 석박사과정 학생들의 가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첫째 이유는 관계지향적이기보다는 성취지향적인 오늘날의 문화에 편승하는 대부분의 남자들 때문일 것이고, 또 하나는 가정을 돌볼 수 없을 정도로 몰고가는 오늘날의 대학의 시스템에 있을 겁니다. 겉보기에는 폼나고 멋져 보이는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알고 보면 학술지 기고, 무슨 학회발표, 각종 강연, 수업 평가 등 데드라인으로 거미줄 쳐져 꼼짝도 못하는 자리라고 하는군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동료 교수들에 비해 승진이 느려지고 그러면 자존심을 구기게 되니 슬슬 놀아가며 할 수도 없고요. 그러나 간혹 일부 교수들은 가정이나 다른 더 큰 가치를 위해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천천히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바로 그런 사람들이 희망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공부한다는 유학(留學)이라는 것이 원래 거할 류(留)자를 써서 외국에 머무르며 공부하는 것임을 기억한다면, 이곳에 오래 거하더라도 더디 가도 함께 가면서 하는 저희의 유학이야말로 문자 그대로의 유학의 의미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아내의 안식년은 남편이 챙겨주자


불행인지 다행이지 몰라도 아내는 지금 당장은 제게 계획을 다시 세우자는 얘기를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원래 계획대로 살림과 육아를 해가면서 영어공부에다가 간호사 시험 준비를 하나 더 병행하겠다는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2004년 5월은 우리 가족에게 아주 중요한 때입니다. 이 달은 아내가 결혼해서 전업주부 생활을 한 지 만 6년이 되기 때문에 안식년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시기가 딱 떨어지는 것은 제가 2004년 4월이면 2년 간에 걸쳐 수업과정(coursework)을 다 마치기 때문에 아내가 안식년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안식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 1년 365일 일하는 전업주부는 어떻게 안식년을 가질까 하는 문제였는데, 저희는 시쳇말로 ‘아다리’가 딱 맞아떨어져서 뜻을 이루게 됐으니 아주 고마운 일이지요. 보통 안식년이 그동안 몸담았던 곳을 떠나 미래를 위한 준비에 투자되듯이 아내 역시 지금으로는 자신의 안식년 기간을 이곳 대학에서 간호사가 되기 위한 4-6개월 과정의 재교육(refresh)을 밟을 생각입니다. 토플 성적표를 제출해도 되지만 아내가 워낙 시험에 약한 데다가(^^) 재교육을 수료하는 것이 버겁긴 해도 영어 실력 증대나 실습을 통한 현장능력 배양 등 모든 면에서 더 이롭다 게 저희들 판단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전업주부(專業主婦가 아니라 專業主夫, househusband) 자리를 꿰차고 집에 들어앉아 공부하느라 스트레스 받을 아내를 착실히 내조하며 애들 키우고 살림하고 텃밭 가꾸면서 틈틈이 논문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늦어지기야 하겠지만 누누이 말씀드렸듯이 더디 가도 같이 가면 되지요. 집에서 애들이랑 놀면서 화분에 물을 주고, 퇴근할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저를 즐겁게 합니다.


이상은 물론 저희의 계획일 뿐이지요. 실상 우리는 한치 앞도 못 보는 근시안이 아니겠습니까? 어쨌거나 바로 이런 이유에서 제 공부만 10년은 잡는다고 하고, 더디 가도 가족과 함께 갈 것이기 때문에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또다시 우라질 놈의 돈 문제를 꺼내듭니다. 1년도 쓸 돈을 갖고 와서 10년 공부를 한다고 하고, 또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을 하겠다고 하면, 언뜻 봤을 땐 어불성설일지 몰라도 그 분을 따르는 이들의 삶은, 제가 늘 감탄하며 읽는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표현을 빌자면, 예수를 따르는 우리네 삶이란 불가능성에 뿌리내리는(Life is rooted in impossibility)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기만 하면 이루지 못할 까닭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저희 가족의 유학이 앞날에 매이지 않는 유학(幼學), 가족과 함께 하는 유학(有學), 삶 전체로 공부하는 유학(遊學), 천천히 머물면서 더디 가도 함께 가는 유학(留學), 거기에다가 할 수 있다면 아내의 안식년을 챙겨줄 수 있는 유학이 될 수 있도록 응원해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간곡히 기도했듯이 유학에 대한 저희들의 진리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서 하나만을 위한 유학이 아닌 모두를 위한 유학의 오솔길을 낼 수 있기를 오롯이 빌 따름입니다.


(*편집자 주) 2002년 9월부터 월간지 <복음과 상황>과 eKOSTA가 기사 제휴를 하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역사와 사회를 조명하는” 복음주의 정론지 <복음과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문의는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 (http://www.goscon.co.kr) 나 이메일 goscon@chollian.net 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