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과 회복

순종으로 회복되는 위로

지난 9월 19일, 911 참사 일주기를 맞는 시점에서 그의 Opera <Nixon in China> 로 잘 알려진 John Adams는 2002-2003 개막시즌 연주곡으로 뉴욕 필하모니를 통하여 그의 새 작품 <On The Transmigration of Souls>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911참사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고전적인 쟝르의 음악과는 달리, 희생자들의 이름들이 그들의 유가족들이나 친구들에 의해 읽혀지는 목소리, 도심 속의 여러 잡음들, 실종자들을 찾는 메모들을 가사로 해서 만들어진 합창곡들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들으면, 여객기가 타워에 부딪힌 직후 그 충격적인 순간의 혼돈감과 그 빌딩의 깨어진 창문들로부터 흩어져 내리는 수 많은 사람들의 아픔이 숨막히게 다가온다. 그 작품의 제목이 시사하는 이교도적인 냄새는 일단 뒤로 하고, 사람들은 그의 이 작품이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어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말들과 소리들의 원래의 의미가 현대적 매체들의 조작과 이기적인 상황화의 논리들 속에서 왜곡되어지는 이 때에, 그 소리들을 낸 사람들의 본래의 마음들이 그 작품에 그대로 표현되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오랜만에 예술이라는 매체가 한 중요한 역사적 사건 속에 녹아 있는, 사람들의 진실을 보여주기 위해 쓰여지는 것을 보는 신선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올 연초에, John Adams 가 처음 그 작품의 작곡에 대한 요청을 받았을 때에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가에 대해 빌보드잡지의 기자가 묻는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Although I had absolutely no intention of writing such a piece, the day the request came through I knew immediately that I not only wanted to do the piece but that I should do it.” 그리고 작품을 완성한 후에 그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 and I have done my best to create a piece that honors those emotions without exploiting them.” 적어도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실험정신을 표현하는데에 그 작품을 이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꾸밈없이 표현하려고 하는 노력으로 그 작품을 썼다는 그 “compassion”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그의 이 “compassion”의 마음은 제쳐 두고라도, 사람들의 소리를 왜곡없이 있는 그대로 표현해 줄 수 있었다는 것 자체로도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위로를 받았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어떠한가? 사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좀 성숙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고통받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자신감 같은 것을 갖기 시작한다. 그에게 충고와 조언을 해줌으로써 그 사람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히고 마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막상 사람들이 스스로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인해 믿음의 근본적인 문제들에 대한 의심을 제기할 때에, 정말 같은 마음(compassionate heart)으로 그 고통의 깊이를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상대방의 마음을 찢어놓는 충고와 경망스러운 조언으로 그들의 마음을 아주 닫히게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소위 “유명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를 듣게 되는 경우, 정말 당혹감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개 상담전문가들의 강의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상담사례들인데, 심각한 문제들을 갖고 찾아왔던 내담자의 문제들을 소개하는 그의 마음 속에 내담자의 고통을 이해하려는 깊은 위로의 마음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순간 당혹감을 넘어서 분노의 감정까지 갖게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심지어 어떤 “전문가”들은 내담자들의 삶의 부족한 점들을 들추어 내어 강의에 온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려는 것을 목적으로 강의를 진행해 나간다.

이것은 예수님의 방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이다. 누가복음 7장18-30절까지의 말씀은 의심에 사로잡힌 한 인간에 대한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어떠했는가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침(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감옥에 갇혀 곧 죽게 될 것을 느끼면서 그는 정말 예수라는 인물이 메시야이신가를 확인하고 싶어졌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답답한 심정은 자신의 겪고 있는 상황이 과거 수 세기 동안 유대왕국의 역사 속에서 펼쳐졌던, 선지자와 왕의 관계에서 진행된 보편적인 상황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에 대한 당혹감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많다. 헤롯에 대한 정직한 예언의 소리에 정치지도자가 심판받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인 자신이 무기력한 자리로 묶여져 이제 곧 죽음을 앞두게 된 상황에서 이러한 “의심”은 선지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던 요한에 있어서도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에 대한 주님의 평가는 이러한 그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으신 것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이 보낸 사람들이 돌아간 후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요한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셨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극한 상황의 요한이 충분히 그러한 의심을 가질 수 있음을 깊이 이해하셨다. 그리고 그의 고통의 깊이를 같이 느끼셨다. 우리는 마태복음 4장12절부터 기록된 주님의 삶을 보면서 요한의 죽음 이후에 주님께서는 그에 대한 더 깊은 “compassion”을 갖게 되셨음을 느낄 수 있다. 요한의 죽음을 들으신 후, 갈릴리로 가셨다가 자라났던 정든 고향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시기로 작정하시고 (12-13)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18)…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23)…. 극심한 고난을 받고 죽은 믿음의 동역자이며 형제인 침(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깊은 “compassion”으로 인한 감정의 교차가 주님의, 마치 방황하시는 듯한 다니심으로 나타났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랑의 마음은 “compassion”을 넘어서, 인간의 연약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시는, 오히려 관용이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닮는 “compassion”의 마음은 철저한 자기 부인과, 연약한 사람을 향해서 마땅히 취해야 할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성숙한 믿음의 선배, 사도바울의 노년의 삶에서도 이와같은 위로와 관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지난 날에 치명적인 잘못을 저지른 형제를 공동체 안에서 다시 세우기 위해 애쓰는 아름다은 삶의 모습을 우리는 그가 옥중에서 쓴 서신, 빌레몬서를 통해 잘 엿볼 수 있다. 성경에 암시된 대로, 아마도 막대한 금전적인 손해를 끼치고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로부터 도망친 오네시모가 믿음의 공동체에게, 특히 그의 옛주인 빌레몬에게 다시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 바울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보내는 그의 편지에서, 오네시모를 관용으로 받아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종이 아닌 동역자로서 그 옛종 오네시모를 받아줄 것을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하는 이유가 오히려 바울 자신의 영혼이 새롭게 되는 큰 위로를 경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하면, 바울 자신의 영혼이 오네시모와 빌레몬의 깨어진 관계로 인해 그동안 정말 깊은 고통 가운데에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위로자는 자기 자신이 위로해야 할 사람을 위로하는 삶을 넘어서서 세상사람들이 서로 위로할 수 있는 자리로 갈 때 그 회복되는 삶의 모습들을 보고 스스로가 위로를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 바울은 빌레몬에게 있어서 이 관용과 위로의 과정이 자기 의지를 복종시켜 순종해야 할 과정임을 알고 있기에, 빌레몬을 향해서 다시 한번 순종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이다(21절).

4 I thank my God always, making mention of you in my prayers, 5 because I hear of your love and of the faith which you have toward the Lord Jesus and toward all the saints; 6 and I pray that the fellowship of your faith may become effective through the knowledge of every good thing which is in you for Christ’s sake. 7 For I have come to have much joy and comfort in your love, because the hearts of the saints have been refreshed through you, brother. 8 Therefore, though I have enough confidence in Christ to order you to do what is proper, 9 yet for love’s sake I rather appeal to you–since I am such a person as Paul, the aged, and now also a prisoner of Christ Jesus– 10 I appeal to you for my child Onesimus, whom I have begotten in my imprisonment, 11 who formerly was useless to you, but now is useful both to you and to me. 12 I have sent him back to you in person, that is, sending my very heart, 13 whom I wished to keep with me, so that on your behalf he might minister to me in my imprisonment for the gospel; 14 but without your consent I did not want to do anything, so that your goodness would not be, in effect, by compulsion but of your own free will. 15 For perhaps he was for this reason separated from you for a while, that you would have him back forever, 16 no longer as a slave, but more than a slave, a beloved brother, especially to me, but how much more to you, both in the flesh and in the Lord. 17 If then you regard me a partner, accept him as you would me. 18 But if he has wronged you in any way or owes you anything, charge that to my account; 19 I, Paul, am writing this with my own hand, I will repay it (not to mention to you that you owe to me even your own self as well). 20 Yes, brother, let me benefit from you in the Lord; refresh my heart in Christ. 21 Having confidence in your obedience, I write to you, since I know that you will do even more than what I say.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복하면 그 허물을 전혀 기억하시지 않는 분이시며 또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에 같이 마음 아파하시는 아버지 이시기에 그의 자녀된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따라 서로 위로하는 삶을 살아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또한 세상의 깨어진 관계들을 볼 때에 같이 마음 아파하고 그 관계들이 회복될 때에 기뻐하는 평화의 자녀들로 살아드릴 수 있도록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

작년 이맘 때, 911 사건이 지난 약 1주일 후, 직장 동료로부터 한 이메일이 포워드되어 날아왔다. 날아온 이메일에는 그림 하나가 어태치되어 있었다. 펜실바니아의 Bouwd라는 한 어린이가 그린 그림…. 그 빌딩 안에 있었을 많은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있었을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 그러나 애타게 바라보기만 해야했던 그들의 가족들, 그들도 왜 이런 고통을 당해야 했을까? 과연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는가? 이런 질문들을 들으며 마음이 착잡한 나에게 이 그림은 진정한 위로자 예수 그리스도의 눈물과 사랑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그 고통의 현장 가운데에서도 보이지 않는 손길로 함께 하셨던 주님의 위로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메시지였다.

911참사를 제쳐 두고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촌 곳곳에서는 911사건과 버금가는 비극들이 일어나고 있다. 매일 설사로 죽어가는 1,4000명의 영아들, 매일 폐렴으로 죽어가는 7,500명의 어린이들, 15억의 무숙자들, 인권탄압으로 갖혀 있는 80만의 사람들, 6천만명의 고아들, 인종청소전쟁으로 어제밤에 학살당한 마을, 이름도 없이 죽어가는 수백만명의 낙태아들…. 이 지구촌의 죄악 속에서 우리 하나님은 매일 울고 계시고 같이 고통받고 계신다. 그리고 말씀하신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가 사는 그 곳에서 고치고 위로하라고.

(필자 주) 한국 선교 정보 원구원 http://www.krim.org 의 자료실에 가시면 지금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고통 가운데에 있는가를 자료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