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부르심의 현장에 다시 서서….


내가 갑자기 <코스탄 현장 이야기>를 쓰기로 한 것은 사실 돌발적인 결정이나 다름 없었다. 지난 1년 간 <지성과 영성> 컬럼을 연재하면서 숨가쁜 현장 생활 속에서 한달에 한번씩 무언가 생각하는 글을 떠올려 보낸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러웠을 뿐 아니라, 이론적(?)인 이야기로만 채우기에는 무언가 답답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코스타에 참석하는 후배들을 위하여 지난 90년 코스타 이후로 내 인생 속에서 일어난 엄청난 변화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고 간섭하셨는지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하고 고민했는지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을 들려 준다면 그들에게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던 것이다. 사실은 지나간 일들을 엮어서 쓰는 일이 머리 속에서 생각을 짜내는 일보다는 훨씬 쉽지 않을까 하는 속셈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러나 막상 또 과거의 글을 쓰려하니, 또 다른 고민이 다가왔다. 만일 단순히 과거의 정체된 이야기만을 나열한다면 잠시 동안의 흥미를 일으키는 감상거리나 감추어진 자랑거리가 될 수는 있을지언정 어쩌면 또 다른 형태의 죽은 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름대로는 이 시대를 짊어질 고민하는 코스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까하여 1년 동안 이코스타와 함께 달려가며 <지성과 영성>의 균형을 논하였고 <문화와 복음>의 통전성을 역설했건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그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었겠는가? 나는 해답을 주느라고 애쓰고 있는데 여전히 그들은 같은 궤도를 그리며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느낀 괴리감은 어쩌면 진리의 역사성(?)을 도외시한 데서 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타락한 이성만으로는 결코 완전한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단순한 원리와도 맥을 같이하는…. 다시 말해, 내가 발견하고 깨달은 문화와 복음의 관계가 아무리 옳다 할지라도 그것은 지적 담론으로는 결코 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더러는 이론적으로, 머릿속으로는 수긍하고 고개를 끄덕일지라도 그 글이 나타내게된 배경과 그 글을 쓴 정진호라는 한 개인의 역사를 간과하고서는 체험적 깨달음에 동참하기는 거의 힘들다는 말이다.


성경의 진리가 철학적 담론이나 논증의 형식을 띠지 아니하고 반드시 역사성을 띠고 기술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성경에 나타난 인물들이 지혜와 깨달음을 추구하던 불제자나 철학자들이 아니라 숱한 시행착오 속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발견해 가는 평범한 인간들이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현재의 나는 10년 전 코스타에 처음 참석하던 시절의 내가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지닌 문화에 대한 개념이 조금은 급진적(radical)이라고 오해받을 만큼 달라진 것도 (사실은 문화와 유리되어 이원화된 복음의 올바른 자리 매김에 대한 노력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지난 10년의 궤적 속에서 복음을 들고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 갔던 그만한 역사가 있었기에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10년 전 내가 고민하던 문제로 싸매고 있는 코스탄들에게 현재의 나를 바로 소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적 언어를 역사적 언어로 바꾸어 기술할 필요가 있다. 우리 기독교에서 복음의 전달 매체로서 간증(testimony)라는 독특한 형식을 매우 중시하고 있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여기까지 쓰다보니, 내가 이제부터 지적 논증을 가급적 피하고 역사적 논증 즉, 간증의 형식을 빌어 표현하겠다는 서두를 매우 지적으로 논증하고 있는 셈이다. 나 원 참! 아마도 추측컨데, 새로운 시도가 될른 지는 모르겠지만, 두 가지가 뒤섞인 <퓨전 논증>이 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가 역사를 회고하는 목적이 궁극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비전 제시에 있듯이, 과거의 사건들 속에서 역사하신 그분의 손길을 회상할 뿐 아니라, 그 당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놓쳐 버렸던 것들을 반성하며, 그 일들을 통해 오늘 나에게 다시 말씀하시는 그분의 뜻을 생각함으로 장차 나와 아내 그리고 우리 가정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이 나에게도 직접적인 유익이 될 뿐 아니라, 현재 비슷한 고민들을 하며 그분의 뜻을 구하고 있는 기독 지성인들과 코스탄들에게 좀 더 생생한 목소리로 다가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아무튼 종종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일들을 벌이게 하시고 더러는 우리를 코너에 몰아 넣으셔서 그 가운데서 당신의 음성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 또한 그 분이 시키시는 일이라는 것을 믿는다.


성경 안에 흐르고 있는 성령의 역사는 끊임 없는 역동성을 띠고 있어서, 2천년 전에 발생한 십자가와 부활 사건이 지금도 우리에게 수시로 흰 파도처럼 밀려와 미래 지향적인 산 비전을 제시해 준다. 내가 만난 기독교, 아니 그 속에 살아 계신 예수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내 인생의 역동성의 회복을 위한 전환점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대학 시절, 진리의 끝자락을 찾아 헤매던 그 무렵, 잡다한 철학 사상과 오히려 더 사변적인 듯이 여겨져서 매료되었던 노자와 불교, 인도 철학에 빠져 있었고, 지혜를 구한다 하며 오히려 어리석은 인생으로 치닫던 나에게, 예수의 발견, 아니 예수 안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진 내 인생은 내가 그토록 고민하던 “진리를 따르는 통전적 삶”에 대한 가능성의 문을 열어 주었던 것이다.


많은 생각하는(?) 코스탄들이 여전히 고민하고 있는 바, 예수 안에서 깨달아지고 회복되어진 지성과 영성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헤쳐 나갈 것인가에 관한 실천적 질문이 그 당시 나에게도 있었다. 그 간절한 기도와 소원이 나를 이 곳까지 끌고 온 것임에는 틀림 없을 것이다. 90년 코스타에 참석하기 얼마 전, 나는 새벽에 기도하는 가운데 많은 눈물을 흘리며 주님 앞에 서원한 일이 있었다. 어리석었던 학창 시절의 방황을 되새기며 아파하고 있는 나를 향해서 주님은, 지금도 너와 같이 갈등하며 힘들어 하는 수 많은 젊은이들이 도처에 있으니 그들 앞으로 나아가 그들을 복음으로 일으켜 세우라는 분명한 말씀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국으로 나아가 복음을 증거하라는 선교적 명령이라고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비록 주님의 지상 명령이 크리스천에게 주어진 최우선 과제임에는 분명하지만, 나는 코스탄들이 모두 해외 선교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럴 수도 없으려니와 각자에게 구별되어 부르시는 부르심의 영역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 이 말은 ‘주님의 선교적 삶을 향한 부르심이 제한적’이라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타문화권 해외 선교로 특별히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임할 아브라함의 축복은 모든 크리스천에게 열려 있지만, 부르심의 방법이나 방향을 정하시는 것 또한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있음에 대한 고백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선교적 삶에 대한 부르심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생소하고 두렵기 조차 한 것이었다. 연변 과기대에서 지금도 함께 일하고 있는 동역자 임형식 형제의 간증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 있다. 예수를 믿고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자세히 살핀 결과, 그것은 한 마디로 “나를 따르라” 라는 내용임을 알게 되었으며, 그래서 처음부터 예수님이 따라 오라고 말씀하실 것을 기다리며 어딘가를 향해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떠나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부러울 만큼 너무나도 명쾌한 믿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와 같은 단순한 믿음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 코스타에서 중국으로의 부르심의 음성을 들을 때 나는 충격에 앞서 두려움을 느꼈다. 나는 항상 생각이 많고 복잡한 사람이었으며, 최소한 다른 나라로, 그것도 내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는 공산주의 죽(竹의) 장막으로 들어가 삶의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선지자들이 그러했듯이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실체는 선교적 삶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던 것 같다. 왜냐 하면, 그 무렵의 나는 늦게 믿은 예수를 전하고자 하는 불붙는 열정에 이미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양육을 받았던 보스톤의 Gate Bible Study의 리더가 되어 새로 유학 오는 후배들을 거두어 섬기며 복음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던 중이었고, 한시 바삐 고국에 돌아가 부모 형제 뿐만 아니라 과거에 내가 알고 지내던 술 친구들과 대학 선후배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을 안고 있었다 – 최소한 나에게는 술 좌석에서 사귄 많은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서둘러 한국으로 돌아간 동기가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느꼈던 두려움의 실체를 정직히 돌이켜 본다면, 그것은 낮아짐 혹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비록 복음 안에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에 대한 이론적인 이해는 되었지만, 현실 속에서는 여전히 육신의 정욕으로 남아 있는 부분들…, 다시 말해 높아지기 위해 치달아 왔던 지난 세월들을 한꺼번에 송두리째 빼앗길 지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부인하고 외면하는 방법으로, 나는 선교지에 나가기에는 아직 준비가 덜 된 사람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부각시킴과 동시에(모세형), 복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을 다른 곳에서 채우겠다는 자기 회피적 생각으로(요나형) 스스로를 무장하기 시작했다.


보스톤에서의 그 무렵 나는, 무중력 상태 우주 공간에서의 재료의 성질을 연구하는 NASA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었고, 그 연구 결과가 신기하리만큼 잘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지도 교수는 내가 계속 남아서 자신과 함께 일할 것을 몹시 원하고 있었다. (그 당시 균형 감각을 상실할 정도로 영적인 일에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구 결과가 그토록 잘 나왔던 것은 성령께서 지혜를 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치 갖난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빨아들이듯 한창 말씀의 젖꼭지를 물고 성장하고 있는 나를 보호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 배려(?)였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어느 날, 그는 나를 조용히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서 자신이 영주권을 내줄 터이니 학교에 계속 남지 않겠느냐고 제의를 해 왔다. 그 당시 내가 갖고 있던 J1 비자는 반드시 귀국을 하도록 되어 있는 비자였기에 그것을 바꾼다는 것은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고, 그에 말에 의하면 프로젝트의 중요성에 비추어 미국 정부(?)에 특별 신청을 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호의적인 제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자리에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바로 그 제의를 거절했다. 예상치 못한 거절에 당황하며 이유를 묻는 그에게 나는 빨리 한국에 돌아가서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까지 당당하게(?) 붙였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대부분의 늦게 믿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복음에 대한 열정과 치기 어린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 면에서는 나의 어린 신앙을 세상의 핍박과 유혹으로부터 지켜 주는 보호막이 되기도 하였다. 주 중에는 너무나 바빠서 학생들이나 박사후 과정들(Post-Doc)과 연구에 관한 토론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지도 교수는 항상 주일에 수시로 우리를 불러내곤 하였는데, 내가 그 앞에서 그와 같은 신앙 선언을 한 이후로는 최소한 나에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귀국한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한 나의 소명 조차 잠시 잊은 채, 서둘러 포항 제철에서 세운 RIST 연구소의 Strip Casting Project Team이라는 생소한 이름의 연구팀에 합류하게 되었다. 그곳이 나의 마음을 끌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 있다면, 그것은 MIT에서 함께 지내던 두 사람의 대학 선배 뿐만이 아니라 대학 시절 동기, 그리고 내가 과거에 인간적으로(?) 가장 아끼던 후배가 줄줄이 한 팀에 소속되어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나에게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황금 어장과 같은 곳으로 비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3년 동안, 나는 마치 요나가 사흘 낮 사흘 밤을 물고기 뱃속에서 지내었던 것처럼 철저하게 하나님과 대면하여 싸우며 내 자신의 감추어진 교만과 무능을 체험하였고, 결과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떠나 보내기 위해 철저한 훈련과 준비를 시키시는 기간을 갖게 되었다. 그곳은 나에게는, 모세가 갑자기 변해버린 자기 정체성에 너무 놀라 왕궁을 뛰쳐나간 후 40년 간 방황하며 낮아짐의 훈련을 받았던 미디안 광야와 같은, 아니 사도 바울의 눈에서 비늘이 벗겨진 이후에 그의 율법주의와 각종 헬라 사상을 복음 안에서 용해하기 위해 필요했던 3년 간의 용광로 길… 아라비아 사막길과 같은 곳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