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탄 현장 이야기


타임머신을 타고


1994년 8월 4일 오후 5시, 우리 가족은 마침내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수도인 연길시 공항에 역사적인 첫 발걸음을 내딛었다. 황혼이 깔리기 시작한 활주로의 눈부심 속에서 트렁크를 잔뜩 실은 시퍼런 트럭이 좁다란 공항 출구를 빠져나와 시골 역사를 방불케하는 공항 청사 앞에 꾸물거리며 멈추어 서자 저마다 짐표를 흔들어 대며 짐을 찾으려는 사람들로 아우성 치는 진풍경이 연출되었고, 나는 그 모습을 꿈꾸듯 아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버스 속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의 풍경은 석양에 젖어 초콜릿 색깔로 빛나는 가운데 옛 기억을 더듬어 희미하게 되살아 나는 60년대 한국 거리의 모습이었다. 누추하고 생경한 붉은 간판들로 뒤덮인 거리, 먼지와 쓰레기 더미 사이를 오가는 새까만 얼굴들의 찌든 모습들이 가슴을 파고들며 잔잔한 설렘으로 젖어 왔다. 잔뜩 긴장하여 겁먹은 표정으로 낯선 거리를 내려다보는 아내와 볼에 홍조를 띤 여덟 살 짜리 아들의 옆모습을 틈틈이 훔쳐보았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시 추스르며 생각했다. 그래,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홍해 바다를 건너게 하신, 이 모든 역사를 일으키신 그 분만을 의뢰하리라 하는 강한 기도가 저절로 입 속을 맴돌았다.


우리를 실은 버스가 시가지를 벗어나 길 양편에 오물 쓰레기가 잔뜩 버려져 있는 언덕받이로 한참 올라가다 보니, 세로로 길게 붙은 ‘연변 과학 기술 대학’이라는 흰색 나무팻말이 나타났다. 그러자 교문 사이로 푸른 하늘과 맞닿아 우뚝 세워진 연둣빛 건물이 와락 눈앞에 다가왔다. 건물 앞으로 연길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지평선에는 황홀하게 타오르는 눈부신 저녁 노을이 붉게 펼쳐져 있었다. 버스에 내려서 건물 뒤편의 확 터진 벌판을 한 번 둘러보던 나는 지금 내가 내딛고 있는 이 곳이 우리 선조들이 세월의 모진 풍상을 뚫고 건너와 살던 만주 벌판의 바로 그 중국 땅이라는 사실이 채 실감이 나지 않아 어리둥절한 느낌에 싸인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학생 기숙사에 임시로 짐을 풀고 중국에서의 첫 밤을 맞이한 우리 부부는 감개와 두려움과 설렘에 젖어 엎드려서 감사 기도를 드렸다. 한 여름인데도 오싹하는 한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들어 왔다. 이국에서의 첫날밤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고 있을 때, 기숙사 어디선가 은은한 하모니카의 선율을 타고 찬송가가 고즈넉이 들려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비로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꿈결로 빠져들었다.


숙사(宿舍)에서의 첫 2주일 간은 마치 우리 가족이 꿈 속에서 어느 이상한 나라로 별안간 날아온 듯한 기분으로 보내야 했다. 수업 준비를 하는 것 이외에는 특별히 할 일도 없어서 여러 가지 여름 행사로 분주한 학교 안팎을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다시 숙사 안으로 들어오면 웅크리고 앉아 있던 아내와 아이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기숙사 식당의 정해진 식사시간만 기다리며 세 식구가 서로 얼굴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나는 아내와 아이의 감추어진 표정 속에서 행여 어떤 절망이라도 나타날까봐 노심 초사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학교 안은 온통 진흙 창이 되어서 꼼짝달싹 할 수도 없는 형편이 되고 만다. 으슬으슬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숙사 안에서 창 밖을 달리는 빗줄기를 헤아리며 축축이 젖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갑자기 해가 났다. 맥이 없어 나가기 싫다고 하는 아내를 두고서 아들 다니엘의 손을 잡고 산보라도 할 심산으로 기숙사 현관 앞에 나가 보았다. 한 발자국 내딛기도 어려운 질퍽거리는 진흙땅을 어이없이 내려다보고 있는데 아이가 갑자기 “아빠, 저것 좀 봐. 참 아름답다. 그지?” 라고 말하며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아이가 가리키는 곳에는 얼기설기 보기 싫게 헝클어진 전깃줄이 전봇대를 가로질러 달려가고 있었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니 여러 가지 색깔의 전깃줄 사이로 맺혀진 이슬이 환한 햇살을 받아 영롱한 무지갯빛을 비추이며 아름답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그 순간 내 마음속에서 한 줄기 부끄러운 생각이 샘솟듯 스며 나와 아이를 향해 흘러 내렸다. “그렇다. 아들아! 아름다운 것을 찾아내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참 복되다.”


한국서 부친 콘테이너가 도착하자 우리는 뻬이따라는 동네에 셋집을 얻어 학생 숙사에서 내려왔다. 아내의 기도 덕분에 우리의 그 많던 이삿짐이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제 자리를 찾아 들어가는 안성맞춤의 층집(아파트)을 얻게 되었다. 내 아내(이곳서는 애인 동무로 불린다)는 도시 전체를 맴돌고 있는 먼지와 악취를 가장 힘들어하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가 무심코 살아왔던 깨끗하고 안락한 환경에 대해 얼마나 감사치 못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 함께 회개하며 조금씩 적응해 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적응하셨던 것처럼 이제 우리도 그 비밀된 방법들을 배워 나가야 할 것이다.


맑은 날, 5층 내 사무실에서 내려다보이는 야산의 전원 풍경은 너무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구릉과 지평선을 너머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그 벌판 가운데 내가 홀로 서 있는 기분은 복잡한 한국에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묘한 느낌을 자아내곤 한다. 그러나 학교에서 내려선 거리에는 텅 빈 심령들의 찌들은 모습들과 쓰레기 먼지 냄새가 가득하다. 한국의 50년대에서 80년대까지를 뒤섞어 놓은 듯한 모습으로 소가 끄는 달구지와 인력거, 자전거의 홍수, 매연을 뿜어 대는 구 소련제 라다 택시, 더러는 값비싼 그랜저나 벤츠에 이르기까지 눈에 뜨인다.


하루는 학교에 있는데 밤톨만한 우박이 쏟아지는 폭우가 내려 삽시간에 온 도시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걱정이 되어 집으로 전화를 하니, 아내는 발코니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빗줄기를 물동이로 퍼서 밖으로 퍼내느라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다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돌아오는 길에서 새까만 구정물로 잠긴 도시에 긴 장화를 신고 더러는 치마를 허리까지 걷어쥐고 물살을 헤치며 걸어가는 아낙들의 모습을 보며 내가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말았다. 순간, 내 나이 서른 살 되었을 때, 미국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후 어느 날 새벽에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하나님! 헛되이 보낸 지난 세월들이 억울합니다. 과거로 되돌아가서 살고 싶습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나의 어린아이와 같았던 그 기도를 들어 주셨던 것이다. 90년 KOSTA에 참가한 이후, 중국에 대한 부르심을 받고 간절히 매달려 기도한 지 4년 만의 일이었다.


타임머신은 마침내 작동하고 말았다. (1994. 9.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