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스타 2004년 1월


종 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만일 서슬 퍼렇게 살아 있어서 요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면 맨 처음에 무슨 반응을 보였을까? 물론 그가 늘 다니었을 루터파 교회 말고 일반적인 현대 예배(Contemporary worship)에 참석한 소감을 물어본다면 말이다. 생각건대 충격,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그가 애써서 없애 놓았던 각종 이미지와 아이콘, 상징물들이 그냥 창문에 붙어만 있는 정도가 아니고 앞에 있는 커다란 화면에다가 큼지막하게 잘 보이도록 쏘아대고 있는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 정도도 단순한 아기예수나 성모마리아의 석고상 정도라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동영상으로 온갖 ‘잡스런’ 영화 나부랭이랄지, 아름다운 풍경이랄지, 아니면 직접 예수가 되어서 연기하고 있는 배우의 모습이 화면 위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아마 충격도 이만저만한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번에 다시금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며 어딘가 대문에다가 내다 붙일 반박문의 첫머리를 이미 구상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가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는 비록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다음 세대를 향한 준비를 갖추자며 장년을 위한 ‘현대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다. 거기에는 물론 20분이 넘는 시간동안 이어질 찬양과 경배 시간, 그리고 각종 드라마와 동영상, 자막과 예술적인 업그레이드를 꿈꾸며 준비하는 다양한 ‘꺼리’들이 준비되어 있다. 이 ‘현대 예배’에 몰두하는 요즘, 나는 ‘만일 마틴 루터가 내 옆에 앉아서 함께 예배드린다면 어떨까’는 질문을 해보면서 이 예배를 준비하곤 한다. Sola Scriptura!(오직 말씀으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시작했던 종교개혁의 거친 물결으로 시작해서 이루어 낸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존경심과 권위들은 2003년을 마감하는 오늘의 예배 가운데 어떤 모습으로 담겨져 있을지 궁금한 요즘이다. 조금 오래된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설교자가 작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높은 강단을 바라보면서 ‘회중들이 앉아서 얼굴 쳐다보려면 목이 좀 아프겠다’는 생각을 할 뿐이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높이 올라갔던 강단은, 요즘으로 바꾸어서 말하자면 카메라를 통해 스크린에 비쳐지는 설교자의 큰 얼굴 정도가 아닐까 하는 비교를 해본다.


확 실하게 느끼는 것은 우리의 예배가 말씀 중심의 듣는 예배에서 점점 더 시각화(visual)되어 간다는 것이다. 누군가는 일차원적인 감각에서 만족하지 않고 다차원적인 감각으로(multi-sensory) 나아가는 것이 우리 예배의 흐름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역시 시각적이고 다차원적인 감각에 익숙해진 청중들이 자연스럽게 자신들에게 편한 방식의 예배를 더 선호하는 것이 요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흐름이라고 볼 수 있겠다. 뭐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두가지, 많아야 세가지 이상의 색깔이 들어간 교과서를 구경하기가 힘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교과서를 보면 정말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고 눈에 쏙 들어오도록 잘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본다. 다 자기가 숨쉬고 있는 똑같은 그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것이 편할 따름이다. 문제는 우리가 이러한 예배의 흐름에 대해서 어떠한 평가를 내려야 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인가, 아니면 막아야 할 퇴행적인 현상인가?


물 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시각화되어 가는 예배가 조심해야 할 요소들은 너무나도 많이 있다. 대표적으로 ‘예배의 구경거리’를 많이 심어줌으로 인해서 예배 참석자들을 단순한 구경꾼으로 전락시켜 버릴 가능성이 매우 짙다. 이른바 ‘예배의 엔터테인먼트’를 조심해야 할 것이다. 또 자꾸 커져만 가는 설교자의 얼굴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 목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앉아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반드시 거두어 들여야만 할 것이다. 물론 워십 리더의 모습도 마찬가지이고. 종교 개혁 당시의 지적처럼 누군가의 모습이 우상화되어 버리는 현상을 정말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것 때문에 많은 이들의 영성이 점점 퇴색되어 가기만 하는 안타까운 현실이 우리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예배 잘 보았다는 말은 아마도 이럴 때 쓰는 것이겠지. 그러나 우리가 어찌 예배를 볼 수만 있는가? 잘 드려야지, 아니 말 그대로 예배(禮拜)하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새 로운 현대 예배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시각적, 청각적 매체를 통한 효과를 나는 거부하지 않으면서, 여전히 우리가 마틴 루터의 숨소리까지도 잡아낼 수 있는 귀한 예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이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요즘이다. 우리의 오감(五感)을 자극하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의 영적인 감각을 만져주는 그런 예배가 있다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성찬식에는 딱딱한 빵의 가련한 모습과 그윽한 포도주 냄새가 장소를 가득 채우는, 그 뒤에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고통을 대신하고 있는 갈보리의 예수 그리스도의 동영상이 스크린에 가득 담기면서 고요한 찬양이 우리의 귓청을 자극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도록 이끌어 가는, 그런 예배 말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영성을 가르치는 파워 포인트 조작법’이란 이 세상에 없음을 기억하곤 이내 주님 보좌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