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첫번째 달. 내공없는 풋내기의 책읽기는 계속된다. 이번 달에도 생각의 지평의 넓혀주는 귀한 책들을 접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단지, 꼭 읽고 싶었던 책들을 그 두께에 지레 겁먹고 뒤로 미루어 놓은 것이 못내 아쉬울 뿐이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 그리고 세상’, Howard Snyder (박민희),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한사람 한사람이 변하기만 하면 정말 세상도 변할까?

아직 최루탄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캠퍼스. 나도 대학 새내기 시절에는 선교단체라는 곳에 몸을 담았었다. 그 때에도 지금처럼 리더들에게 이것 저것 따지기 일쑤였는데, 그 당시 내가 따지며 대든 내용 중의 하나는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였다. 입학 초기 신입생을 위한 한 강의에서, 모 간사님께서는 ‘사람이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 데모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셨고, 난 그분께 ‘탈세를 할 수 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사람이 바뀌었다고 어떻게 탈세를 하지 않을 수 있냐’고 반발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냥 그것이 아닌 것 같아서 마구 질문했었는데, 그리고 그 이후 이 문제는 많이 해결했다고 믿었었는데… 하지만, 크리스천의 사회참여의 정당성 여부는 아직까지도 내겐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있다.

1983년도에 저자의 강연을 정리했다고 하는 이 책을 통해 나는, 하워드 스나이더의 다른 책 – 참으로 해방된 교회, 교회 DNA 등 – 에서의 주장을 조금이나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하워드 스나이더의 키워드 중의 하나인 ‘생태계적 하나님나라’의 개념이 좀 더 명확해졌다던가 하는…

책의 전반부에서 저자는, 하나님나라의 특징들은 이미 구약에서 약속되고 계시되었으며, 그 특징들이 신약에 와서 재해석되고 완성된 것임을 ‘샬롬’, ‘도시’, ‘가난한 자들과 함께함’, ‘안식’, ‘희년’ 등의 분야로 나누어 살핀다. 그리고는 이런 하나님나라가 현재에는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야 하는가를 다루고 있다. 책 후반부에서는 그런 하나님나라가 개인을 넘어 교회와 세상까지 영향을 끼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가하는 제안을 한다. 예를 들어 국가의 정책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던가, 국제 평화를 위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 등도 해야한다는 것이다. 즉 개인 복음 전도 뿐 아니라, 사회 정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님나라를 위해 동일하게 귀한 일임을 강조한다.

크리스천이 세상의 일에 무관심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정말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길인지는 의문이 든다. 어쩌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에, 또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우리는 바보같아 보이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옳지 않을까? 우리의 싸울 것은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니까…

“십계명 (The truth about God)”, Stanley Hawerwas, 복있는사람,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람들은 누군가를 평가하기 위해 문장 하나를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그 사람은 참 순진해’ 혹은 ‘그 사람은 너무 정치적이야’ 등의 한 문장으로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평가가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고는 하지만, 누군가에 대한 한사람의 평가가 동시에 상반된 두가지 방향으로 나오는 건 아무래도 좀 자연스럽지 못하다.

한권의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성향에 대한 서로 다른 두가지 평가가 나오는 경우 또한 흔치 않다. 그런데, 이번에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십계명’을 보면서 이런 종류의 혼란을 겪었다. 하우어워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이론을 지지하는 윤리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에 이어 한국말로 소개된 그의 두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그는 “십계명은 세상을 위한 윤리적 지침이나 세상을 향해 선포할 기독교 선언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이며 누구의 소유인지를 알게 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이 땅의 세속문화와 그 가치에 대항하며 살아갈 수 있다고하는 삶의 방식이다”라 단언한다. 계명 열가지를 하나씩 짚어가며 그 원래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 계명들이 단순한 윤리로 취급될 가능성에 대해 경고한다.

“그리스도인이 결혼해야 하는 단 하나의 바람직한 이유라면, 독신일 때보다는 기혼일 때 세례에 따른 소명의 삶을 보다 훌륭하게 살아낼 수 있다는 확신때문이다”라며 결혼을 공동체적인 삶과 연결시키는 다소 급진적인 성향을 보인다. 반면 십일조의 당위성을 지지한다던가 조직교회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보수적인 면모 또한 엿볼 수 있다. 도대체 하우어워스는 정확히 어떤 성향의 사람일까? 아직은 공부해야 알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김기현 목사가 ‘주여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의 해설에서 이야기했던 하우어워스에 대한 평가는 조금 도움을 주는 것 같다: ‘나 개인의 판단으로는, 그의 신학이 자유주의 신학의 심장부에서 자라나 재세례파인 존 요더 (John, H. Yoder)의 영향을 받아 평화주의자(pacifist)인 점, 그에 더하여 미국과 자유주의 양자에 대해 전투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실천적 성향, 거기다 자연신학을 강하게 반발하는 것이 칼 바르트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보수주의를 닮은 데가 있는지라, 진보/보수 양 진영 모두에게 두루두루 통하는 것이 도리어 약점이 됨으로써 딱히 절대 지지층이라 할 만한 이들이 없는 것이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모두에게 더 없이 절실하지만, 동시에 삼키기에는 쓰디 쓴 부분이 한 두 군데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도 이미 많이 진보화한 걸까. 그의 보수적인 성향이 적잖이 거슬리는 걸 보면서 나도 놀라고 말았다.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 Eugene Peterson (홍병룡), IVP, 20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우리는 때로 동일한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염두에 두고 있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을 겪곤 한다.

몇 주전 토요일 아침 성경공부 모임에서 요한복음 3장을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서 말씀하시면서 사용하신 ‘아노텐’라는 단어가 ‘위로부터’ 혹은 ‘다시’의 두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고, ‘프뉴마’라는 단어도 ‘바람’ 혹은 ‘성령’을 모두 나타낼 수 있다는 내용을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이란 단어를 왜 사용하셨을까를 이야기하면서, 나는 ‘새로운 창조’의 의미를 강조하신 것 같다고 이야기한 반면 다른 몇 멤버는 ‘세례’를 염두에 두신 것 같다고 하면서 토론이 계속되었다. 정말이지 한참을 이야기한 후에 알게 되었는데, 나는 ‘세례’를 ‘성례로서의 세례’로 이해하면서 동의하지 못하고 있었고, 한 자매는 ‘거듭남으로써의 세례’를 이야기하면서 내 주장에 계속 이의를 제기하고 있었다. 같은 이야기를 왜 이렇게 힘들게 했는지, 그건 단어의 정의를 일치시키지 못했었기 때문이었다.

때로는 똑같은 단어가 사용된 하나의 표현이 그 정의가 다를 경우, 정반대의 개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진피터슨의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에서 사용된 ‘탁월함’이란 단어가 그 좋은 예가 아닐까 싶다. 흔히들 ‘크리스천은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할 때의 ‘탁월함’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의 삶을 추구하며 살아감으로써 가지게 되는 탁월함을 이야기하곤 한다. 반면 유진 피터슨이 말하는 ‘탁월함’은 하나님께 철저하게 순종함으로써 “단조로운 도덕적 습관에서 깨어나고, 그저 하잘것없는 일로 바쁜 일과를 툭툭 털고 과감하게 최상의 삶을 살도록 도전받”는 삶이다. 피터슨은 그런 대표적인 인물로 예례미야를 이야기한다. 예레미야의 삶 가운데 세상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탁월함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는데도 말이다. 요시야 개혁의 시기에 참 개혁을 외쳤던 선지자, 그리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며 아스돗에 다시 땅을 구입하며 하나님의 회복의 메세지를 전했던 선지자,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들에게 늘 미움을 받았던 선지자, 그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우리는 추구해야 한다. 일상속에 묻혀있는 삶을 딛고 일어나는 하나님의 탁월함을 말이다.

유진 피터슨의 초창기 작품 중의 하나인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는 이런 예레미야에 관한 이야기이다. 많지 않은 예레미야에 대한 기록이지만, 역사적 정황과 문맥에 대한 피터슨의 탁월한 묵상이 우리로 하여금 예레미야의 탁월함을 엿보게 한다.

유진피터슨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이런 묵상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가 이미 여러 책들에서 주장했듯이 시와 소설을 즐길 줄 알아야 할텐데, 나에게 있어 시와 소설은 여전히 멀기만 하니 어찌하겠나…

“바울과 예수”, F.F. Bruce (이길상), 아가페출판사, 1992

fk3.bmp그냥 그렇다고 덮고 넘어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될 때가 있다. 음…

바울은 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많이 언급하지 않았을까? 20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바울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예수를 새롭게 구성했을까? – 그냥 넘어갈 수 있을 주제같기는 한데 말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공부하면서 의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자료가 상당부분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비유가 하나님나라를 향하고 있고, 예수님의 설명 또한 그렇다. 그렇다면 바울의 서신들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제가 별로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바울의 가르침 속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사상이 깊숙히 녹아 있는 것일까?

이런 궁금증을 안고 보수적 신학자로 알려진 F.F. Bruce의 “바울과 예수”를 손에 들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전문적인 책은 아니기에 나의 초기 궁금증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들을 수는 없었지만, 바울과 예수의 일치점에 대한 보수 진영의 주장을 어렴풋이는 알 수 있었다.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바울과 예수의 차이점의 원인을 하나님 나라의 용어로 풀자면 이렇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적인 긴장성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 ‘Already, but not yet’으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두 봉우리 사이의 긴장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설명은 이 두 봉우리가 모두 도래하지 않은 상황에서 하신 것이다. 반면, 바울은 그 중에서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의 봉우리는 넘어서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의 나라’와의 중간에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과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는 어느정도의 차이가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설명을 위해 바울이 받은 전승과 계시의 차이점, 예수와 바울의 칭의에 대한 공통적 가르침, 그리고 윤리적인 가르침에 있어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성경의 증거를 들어가며 차분히 설명한다.

아직 내가 가진 의문에 확답을 찾지는 못했다. 막연한 방향만 알았을 뿐… 이제 관련된 책들로 좀 더 여행해야만 할 것 같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Leslie Newbigin (홍병룡), IVP, 2007

사용자 삽입 이미지레슬리 뉴비긴의 책을 읽을 때마다 깜짝 놀라곤 한다. 이해하기 쉽지 않을만큼의 논리로 이야기를 전개해 가지만, 결론은 놀라우리만치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IVP에서 모던클래식 시리즈로 소개한 네번째 책인 레슬리 뉴비긴의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은 이미 다원주의 분야에서는 널리 알려진 그야말로 클래식이다. 이곳에서 더 이상의 요약을 적일 필요가 없을만큼 많이 알려진 다원주의에 대한 변증법적 논리를 담고 있다. 이전의 매끄럽지 못했던 번역도 좋아지고, 편집마저 수려해져서 책을 읽는 재미를 더 해 주었다고 할까. 다원주의에 대한 대항논리로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과 ‘가치’를 통한 설명 등 전형적이지만 명쾌한 설명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런 다원주의 사회의 대안으로써 진정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내세우는 담대함이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