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소개할 책은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 (고든 맥도날드, 윤종석 옮김, IVP) 이다.


복이란 단어는 우리의 신앙 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초신자일때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것을 축복으로 알았다.
우리의 요구를 세심하게 들어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 그러나 우리의 한심한 요구 조차도 맘씨좋게 들어주시던 하나님이 언젠가 부터
바뀌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No”를 경험 하게 되었다. 하나님 이게 뭡니까? ….원망과 혼돈의 시간을 지나보낸 뒤,
하나님의 “No”가 그의”Yes” 보다 훨씬 나에게 유익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어서’ 더 많은 축복을 쟁취 할 것인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러한 원망과 혼돈의 시간들-고난으로
변장된 순간들-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 축복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자는 말한다. “폭풍은 다가온다. 영혼이 시험받는 힘겨운 순간들은 떠오르는 해만큼이나 확실하다”. 그렇다면 도대체 하나님은 왜
이런 어려운 순간들을 허락 하시는가?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은 우리가 깨어지길 원하신다. 위기의 순간을 통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눈에 보이는 것에서 우리의 내면(영혼)으로 관심을 돌리게 되는 계기를 주길 원하신다. 그러면, 영성을 추구
할때 무엇이 따르는가? 자기 발견의 고통과 굴욕이다.(p125).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바울의 고백에서도 보듯이 많은 영적 스승들은 욕망, 정욕, 분노로 가득찬 우리 영혼의 하수구까지 내려와 본
사람들이다.

주님은 우리가 먼저 비우길 기대하신다.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비운뒤, 그 다음에는 주님은 무엇을 원하시나?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삶은, 그 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자세하게 알고자 하는 집요한 열망을 그 특징으로 한다. 그분의 본질, 그분의
능하신 행사, 그분의 뜻 그리고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계획 등을 알아 가는 것이다. 실은 이런 연습이 바로
신학이다”(P221).


런 의미에서 우리는 모두 ‘신학’을 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화학을 통해 ‘신학’을 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말미에
‘엄청난’ 신학을 했던 한 중국인 목사님의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다소 길지만 꼭 인용하고 싶다). 이 목사님은 신앙때문에
18년간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지낸 경험을 말해 주었다.


제 친구들은 제가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일을 했길래 몸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는지 궁금해 합니다. 그러면 저는 그들에게 그곳에서의
삶은 너무너무 고된 것이었다고 대답 합니다. 수용소 당국자들은 제게 인분 구덩이를 치우는 일을 시켰습니다…간수들과 모든
수감원들은 악취 때문에 가까이 오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내가 거기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아유가 무엇이었겠습니까? 바로 혼자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강제 수용소에서는 보통 모든 수감원이 엄격한 감시하에 있기 때문에 아무도 혼자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구덩이에서 일했기에 혼자 있을 수도 있었고 주님께 큰소리로 기도 할 수 있었습니다…그것이 바로 내가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입니다…


시 내가 제일 즐겨 부르던 찬송 중 하나가 ‘저 장미꽃 위의 이슬’입니다. 그것은 체포되기 전에도 제일 좋아하는 찬송가였지만
그때는 그 찬송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치 못했습니다. 인분 구덩이에서 일하면서 나는 우리 주님과의 놀라운 교재를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저 장미꽃 위의 이슬 아직 맺혀 있는 그 때에

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구덩이 안에서 몇번이고 반복해서 이 찬송을 부르면서 나는 주님의 임재를 맛보았습니다. 그분은 결코 나를 버리거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살게 되었고 그 인분 구덩이는 나의 은밀한 동산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삶에 복 주시기로 택하신 한 평범한 사람의 고백이다. 결국, 우리의 상황이 어떠하던지, 우리의 삶을 통해 쌓아가는 주님과의 관계가 축복의 최고봉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