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KOSTA/USA 스크랜튼 집회에서 있었던, 김정아 교수님의 ‘치유의 길: 용서 (The way to healing: Forgiveness)’ 세미나를 정리해보았습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일이 많이 생깁니다. 여러분이 둔한 분이면 잘 못 느끼실 수 있지만 민감한 분일수록 상처받는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교회 다니면서 훈련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다녀오면 머리를 뜯고 싶은 적이 있지 않으세요? ‘왜 그 사람은 나에게 그 말을 했을까? 정말 싫다.’한 적이 참 많습니다. 못 느끼시는 분이면 다행인데 여러분이 생각이 많은 사람이면 인간관계에 있는 한 그런 상처들을 받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이 용서하지 않게 되면, 한 번 찔리는 것도 아픈데 계속 상처가 됩니다. 그래서 용서하는 게 필요합니다. 여러분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성격 나쁜 사람으로 찍히고 싶지도 않고 여러분 모두 사랑 받고 싶지요? 모든 인간에게는 받아들여지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삶이 풍성해지고 인간관계 안에서 아름답게 살기 위해서는 용서의 원칙은 너무 중요합니다. 이것은 꼭 성경의 말씀에서 중요할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개념이 기독교의 개념이지만 대기업에서도 기업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정도로 중요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것이 맞다고 하는 것은  그것의 실효성이 있기에 맞다고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합니다. 세상 학문도 용서가 얼마나 인간관계와 건강에 영향을 주는 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의 암발병률이 정말 높습니다. 암환자들이 성격이 나빠서 그렇다는 게 아닙니다. 용서는 나를 위해서,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참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이 코스타에 오시는 것도 하나님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하나님과 가까워지기 위해 오시는 것 일텐데, 여러분이 용서를 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가서 힘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셨는데 그 말을 따르지 못한 우리들의 말을 사람들이 별로 듣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할 수 있는 가장 능력있는 일 중 하나가 용서입니다.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한데 용서를 하면 내가 큰 일을 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바꾸면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용서가 정말 힘들 때 용서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정말 힘든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일을 하셨을 때 스스로 칭찬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상처 한 번 받고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 용서 받아서 행복하다면서 용서를 하지 못하고 아파하면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도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는 것이 나를 위하고, 하나님을 위하며, 세상을 위한  것이라면 우리가 사명감을 가질만한  일인데 왜 용서하기가 어려울까요? 

그 이유는 참  많이 있습니다. 용서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없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회에서는 받은 만큼 주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은 후에는, 용서라는 것이 내가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갚아줄)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 되었습니다. 용서가 자연스럽다는 사람을 많이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진짜 상처 받은 사람들 중에서 용서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죄된 성품과  우리가 받은 교육 때문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원하지 않습니다. 받은만큼 갚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포도원지기’ 예화에서,  한 시에 간 사람, 두 시에 간 사람, 세 시에 간 사람, 여섯 시에 간 사람이 똑같이 일당을 받는 것이 이상하지 않으세요? 여섯 시에 간 사람은 한 시간 일하고 돈을 받고, 또 일찍 온 사람은 더위에 오랜 시간 일했기에 불공평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예화를 보는 우리는, 많은 경우에 스스로를 아침부터 일하러 온 사람과 동일시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우리가 여섯 시에 온 사람이라는 것이라고 믿기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위해 오셨지 의인을 위해 오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그 말이 싫었는데, 죄인을 위해서 오신 건 좋은데 “나 같은 의인은 어떡하라고?”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요지는 너희에게 조건없이 선물을 주려는 것인데 우리는 스스로를 의인이라 생각하면서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포도원지기가 여섯 시에 온 사람에게도 똑같은 일당을 준 것은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표현인데, 우리는 아침 7시부터 온 사람이라는 착각을 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잘못된 개념 때문입니다. 

용서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을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많은 경우에 용서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이름 안에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생각하고, 대충 무마시켜주고, 무조건 변명해주고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고 넘어가고 당한 사람만 불쌍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는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편이 때리면 맞아주고, 맨 마지막으로는 모든 것을 참고 절대 화내지 않기도 합니다. 용서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이런식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용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씩 여러분과 살펴봤으면 좋겠습니다. 

첫 번째로 용서에 대한 잘못된 개념 중 하나가 우리 가슴이 터지고 속이 뒤집히는데도 용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위장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좋아하신 사람은 ‘good person’이 아니라 ‘real person’입니다. 속은 그런 게 아닌데 기뻐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을 원하십니다. 정말, 용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게 아닙니다.  나에게 아무것도 아닌 척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부분을 아프게 보시는데 공평함이나 정의가 없는 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잘못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이 죄를 지었는데 아닌 척 하고 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가 싫다고 합니다. 분명히 잘못 됐는데 자기가 잘못하면 대충 넘어가고 남이 잘못하면 그렇지 않은 모습도 싫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아빠가 알코올 중독이라고 생각해봅시다.  “우리 아빤 술을 조금 하셔” 하는  식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죄를 죄라고 하되 그것을  용서하는 것을 원하시지 죄를 죄라고 하지 않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많이 혼동하는 것이 죄를 용서하는 것과 죄를 죄라고 하는 것과의 차이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죄가 아닌 것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것은 공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분명히 악을 선하다, 죄를 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악을 선하다고 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어떤 행동을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그 사람의 성품에 관해 뭐라고하는 것이지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는 것일 뿐입니다. 용서는 상대편을  위해 변명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죄인데도 불구하고 용서해주는 게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화가 났을 때 솔직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곧 다루겠지만 여러분의 감정을 마구 표현하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진실한 감정에 대해서 창피해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 감정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악을 보고 악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같은 맥락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 문제에 대해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빠가 알콜 중독자인데 “아빠 기분이  조금 안 좋으신가봐”, 여자친구가 다른 남자를 만나는데 “여자친구가 성격이 좋아서 그런 거야”라고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는 것이 더 큰 문제가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잘못된 일이 일어나서 그런 일을 지적하면 정죄하는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이 문제가 됩니다. 우리는 거짓 평화를 참 좋아합니다. 형제,자매 사이에서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렇게 숨기는 것은 언젠가 다 터지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싸움을 일으키면 안 되지만, 감정에 솔직하고 이해하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문제가 있는데 없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문제입니다. 침묵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회사업에서도 그렇지만 문제를 모르면 제대로 도와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면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찾을 수 있는데, 문제를 인식하지 않으면 정말 고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흡연이나 마약 중 어느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보통은 마약이라고 합니다. 마약이 미디어에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통계를 보면 흡연으로 인한 사망자수가 더 많습니다. 우리가 흡연 문제를 더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약 문제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으면 거기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나올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죄를 죄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용서는 절대 화를 내지 않는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상처를 받고 부정한 일을 당해도 절대 화내서는 안되며 기독교인이면 항상 순한 양 같아야 한다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엡 4:26-27 말씀을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라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하실 것은 하나님께서 분을 내는 것을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어원을 보면 “화내라, 하지만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울이 사용한 말은 permissive imperative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당한 분노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 중에 선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하나님께서 정당한 분노를 허락하셨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노하심과 우리의 노함과 차이가 있을 때가 많지만, 우리가 노할 상황들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악한 상황을 봤을 때 노하셨습니다. 로마서에 보면 무서운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진노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는 분노보다 훨씬 더 intensive한 감정입니다. 그래서 불의한 일을 당할 때 분노하는 것은 옳은 일이며 여러분이 하셔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잘못된 일을 당하고 화를 낼 때 ’나는 크리스천이 아닌가봐”하고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면 정당한 분노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 한계를 정하는 것입니다. 누가 다른 사람을 노예를 만드는 것에 분노해서 평화적이지만 싸움을 해야 되는데, 정당한 분노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정당한 분노는 다른 사람이 더 이상 죄를 짓게 않게 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입니다. 많은 가정의 문제 중 하나가 가해자도 문제가 있지만 맞아주는 부인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분노하면서 그 사람이 나를 계속 때리면서 죄를 짓지 못하게 하는 일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시겠지만 사람이 사람을 봐가면서 괴롭히거든요. 그게 여러분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잘못된 일이 있을 때 stand up해야 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노라는 감정을 주셨지만 우리가 죄된 인간이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화낼 때 성경적인 화냄인지 아닐지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뜻 안에서 해야 됩니다.  상황에 따라 화냄의 정도가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화를 적게 내야 할 때도 있고 화를 크게 내야 할 때도 있는 것이지 무제한 화를 내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뜻 안에서 분노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정당한 분노는 죄가 아닌 일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입니다. 그냥 “쟤 생긴 게 맘에 안 들어 뭐.”와 같은 식의 분노는 하나님이 주신 분노가 아닙니다. 그래서 화가 날 때 한 번 기도해 보세요. 이런 감정 느끼실 때 이 감정이 과연 하나님께 받은 감정인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시는 게 필요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용서를 힘들게 하는 잘못된 개념 중에 하나가 ’그 일만 아니면, 그 사람이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면, 내 성격을 망가트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괜찮을텐데’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용서가 힘듭니다. 내 삶의 행복을 빼앗은 사람 때문에, 억울함 때문에, 상실감 때문에 힘들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심장을 주시고 사신 분들이기에 여러분의 고통을 절대 허비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그것을 체험하실텐데 제가 성경의 예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여러분 모두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보다 더 큰 상처를  받은 분도 있겠지만, 요셉도 만만치 않는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형제들이 그를 팔았고, 종으로 열심히 살고 있을 때 보디발이 강간범으로 감옥에 보냈고,  감옥에서는 열심히 살았지만 무시당하고. 억울한 것, 속상한 걸로 따지면 요셉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에게 행해진 일은 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통해서  여러분을 좋게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힘을 내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정말 여러분의 고통을 통해서 그것을 선하게 바꾸시지 절대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로, 용서를 안 할 때 ‘내가 싸움에서 이겼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네가 아무리 그래도 나는 너를 용서 안하고 너를 꽉 쥐면서 너를 나쁜 놈으로 보고 있을거야’ 라는, 약간은 masochistic한 즐거움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용서 안 한 것이 웬지 싸움에서 이긴 것이라는 생각에서 용서를 안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용서를 안 하면 ‘내가 희생자니까 나는 착한 사람이야’라는 생각을 즐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상처 받았기 때문에 나는 불쌍한 사람이고 착한 사람이고, 그래서 그런 것들 때문에 용서를 안 하는 경우도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가 용서를 안 하게 되는데 문제는 용서를 안 할 때 오는 불이익이 너무 크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해서 죄를 짓게 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친밀한 교제에 들어갈 수 없기에 성령충만하지 못하고 삶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용서 못하고 미워해 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기뻐하기가 힘듭니다. 교회 안에서 그 사람 얼굴만 보면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떻게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상처를 받은 것도 힘든데 하나님이 주신 기쁨까지 놓치는 것은 두 번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 위해서 용서를 생활화하기 위해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둘째로 용서하지 않는 크리스천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네 번째로, 다시 상처 받지 않으려고 용서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상처받고 싶지 않으니 사람의 관계 안에 들어가지 않고 싶은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시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용서를 안 하는 것인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예전에 받은 상처와 같은 상처를  연속해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는 것은 예전의 기억이 계속해서 나에게 상처를 주게 내버려 두는 것과 같습니다. 지속적인 갈등과 괴로움에 힘들고 고민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우리를 감정적으로 지치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런 실제적인 이유 때문만이라도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좋아하는 quote중에 하나인데 ‘사람이 주는 고통에서부터 완벽하게 보호 받을 수 있는 곳은 지옥밖에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누군가 사랑하게 되고 관계 속에 있으면 상처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고자 한다면 사랑 밖에 있어야 합니다. 지옥에 불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지옥이 하나님의 임재가 없는 곳이라 무섭습니다. 여러분 싫어하는 사람과 있어본 적 있으십니까? 거기가 지옥이지 않습니까? 지옥은 하나님이 인간을 정말 존중하는 장소일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정말 싫어하니까 보내 주는 곳. 하지만 정말 무서운 장소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완벽한 선인데, 하나님이 빠지시니까 모든 선이 빠지고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아픔이 따르지만 그것을 안 할 때 더 큰 문제가 오기에 우리가 용서라는 개념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다시 상처 받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많은 이유가 있는데 하나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다시 정리를 하겠습니다. 용서에 관한 잘못된 생각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괜찮은  척 하는 것 아니고, 무조건 자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내 인생을  망쳤다는 것도 아니고, 용서를 안 한 것이 이긴 것이 아니고, 다시 상처받지 않기 위해 안 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용서하라고  하신 말의 의미를 같이 찾아보면  좋겠어요. (다음 글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