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2009 KOSTA/USA Chicago conference에서 이훈 목사의 ‘샬롬을 위한 헌신’이란 세미나를 eKOSTA 편집부에서 녹취하여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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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한번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저희 가정에도 아이들이 다섯 있지만, 아이들이
많은 가정에 보면 아이들 중에는 좀 똘똘하고 뭐든지
잘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아이는 좀 상대적으로
좀 못하고 약하고 부족한 아이도 있잖아요. 그리고
심지어 어떤 가정에는 정말 특별한 장애와 아픔을 가진
아이들도 있어요. 그런데, 만약에 어떤 가정에서 아이들
중에 정말 똘똘하고 잘하고 정말 가정의 자랑거리가
될 만한 아이를 언제나 가정의 무대에 올려놓고 그
아이를 다 바라보게 하면 그게 정말 좋은 가정일까요?
정말 좋은 부모일까요? 정말 좋은 가정, 부모는 어떻게
할까요? 아이들 가운데 가장 아픔과 연약한 아이가
중심에 있게 될 거예요. 그래서, 그 아이를 바라보며
모두가 자신들을 돌아보게 하고 도울 수 있도록 하고
그럴 때 정말 그 가정이 아름다운 가정이 되고 정말
진정한 샬롬이 있는 가정이 되는거죠. 제가 고등학교
때 늘 아는 이웃집이 하나 있었는데, 담벼락 너머니까.
근데 어느 날 이웃집 담을 넘어보니까 거기 갑자기
제 또래 어떤 여자 아이가 바닥을 기고 있더라구요.
중증 장애인이었어요. 그런데, 저를 마주치는 순간
엄마가 이 아이를 막 집 안으로 밀어넣었어요. 그 아이는
사실은 그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바깥에 나와보지
못한 그 가정의 secret인거죠. 그 아이를 그렇게 그 부모가
그 안에다 둔 이유가 뭘까요? 어쩌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데
아이가 바깥에 나가면 그 아이가 혹시 조롱과 모욕
당할까봐, 그리고 자신들도 사람들의 눈총들을 받을까봐,
그것이 싫고 그것을 가정의 수치로 여겼기 때문에 숨겨두고
키웠던 거죠. 그런데, 우리 잘 알지 않습니까? 레나
마리아나 그리고 우리 한국에도 이지선 자매같은 사람들.
어쩌면 수치로만 생각하고 숨겨야 될 그런 아픔과 약함인데,
오히려 그것을 당당하게 빛 가운데, 많은 사람들 가운데
오히려 드러냄으로 오히려 정상인들과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 송명희 시인의
어떤 이야기도 알잖아요. 나 가진 재물 없지만, 나 가진
지식 없지만, 나 가진 것 없지만,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이
갖지 않은 것을 갖게 하셨다는 것. 사실 가장 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더 보화와 같은 것을 주셨고 또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가 성공 스토리들을 무대와 사람들의
중심에 올린다는 것은 사실은 우리가 다시 한번 돌아봐야
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 이 땅에 샬롬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이 자꾸 중심이 되도록
해야되는 게 아니라, 혹 우리 가운데 더 소외된 사람,
우리 가운데 돌봄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가운데로
오도록 도울 수 있어야 되겠죠. 그 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더 도울 수 있는 샬롬의 관계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성공하는 삶하고
열매맺는 삶은 다르죠. 성공하는 삶과 열매맺는 삶의
차이가 뭘까요?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요. 성공하는
삶은 마치 꽃이 활짝 예쁘게 피어나는 것과 같다면
열매맺는 삶은 정말 열매가 맺는 것인데, 우리가 잘
알듯이 열매는 언제 맺히죠? 꽃이 화려하게 피어있을
때 맺히나요? 그것이 다 져야지만 맺히는 게 열매잖아요.
그 꽃잎이, 아름답던 꽃잎들이 낡고 시들어 다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그 다음에 생겨나는 게 열매라는 것.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성공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과
야심이 십자가에 못박히고 땅에 떨어질 수 있을 때,
그 때 정말 우리가 주님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아시죠? 어떤
거죠?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예, 그 아홉 가지 열매 가만히 생각해보세요.
그 열매 자기 좋으라고 있는 거 하나도 없어요. 사랑이
많은 사람이 있으면 옆사람들이 그 사랑 받는 거 아녜요?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기쁨이 옆사람들을
격려해주는 거고, 평화가 가득한 사람이 있으면 그
주변 사람들이 거기서 쉼을 얻는 거죠. 오래 참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 사람의 인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거고, 자비로운 사람 때문에 그 주변 사람들이 자비를
얻고, 선한 양선의 마음을 가진 사람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그 사람의 선한 손길의 도움을 얻는 것이구요. 근데
열매도 실제로 그렇잖아요. 우리가 열매는 나무에 아름답게
탐스럽게 달려있거나 그릇에 탐스럽게 담겨 있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들짐승들의 먹이가 되고 사람들의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렇게 될려면 이 아름답고
탐스러운 모양 자체가 부서지고 사라지는 것인데,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들이 된다는 것은 내가 보여지고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의 음식이 되고
먹이가 되는 거겠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는 삶이 성공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정말
열매맺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때 우리가 샬롬이라는 것을 이제 가져다 줄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소중한 가족 관계에서도 그렇게 서로의
음식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가정에서 꽃이
되고 싶기보다는 열매가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을 때, 그 때 그 가정이 얼마나 샬롬의 가정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에게도 믿음의 
경주가 있죠. 우리도 달려가야 될 믿음의 경주가
있는데요, 우리 믿음의 경주가 경쟁 사회의 경주랑
정말 다른데, 경쟁 사회의 경주는 라이벌과의 경쟁이잖아요.
경주. 옆에 뛰는 사람이 있기에 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는
라이벌이 있어서 뛰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부르심이
있기에 그 소명 때문에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는 것이지,
옆사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달려가야 될 경주가 있다면 이 땅에 필요가
있기 때문에 달려가는 것이지, 누군가 옆에서 뛰기
때문에 뛰는 거 아니라는 것. 그리고 우리 앞서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가 있기에 우리가 그 뒤를 따를
경주가 남은 것이지, 옆에 있는 라이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 우리가 competition이 아니라 compassion으로 살아가도록
부름받았음을 늘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북미의 native
indian에서 내려오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요.
어느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있단다. 근데 한 마리의 wolf는 아주
경쟁심, 이기심, 탐욕, 분노, 상처, 그래서 공격하고
먹으려는 그러한 wolf가 한 마리가 있고 다른 한 마리의
wolf는 이제 긍휼, 사랑, 자비, 온유, 나누고 싶어하는
그런 wolf가 있단다. 근데 이 두 마리의 wolf가 우리 속에서
싸우고 있다고 했어요. 한 마리 wolf는 competition의 wolf고
한 마리는compassion의 wolf고. 손주가 물었어요. 할아버지,
어느 쪽 wolf가 이겨요? 뭐라고 답했을까요? 니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다. 어느 쪽에 먹이를 주느냐에 달려있다는
거죠. 우리가 이 치열한 경쟁 사회의 흐름과 논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거기에 우리의 시간과 에너지와
마음을 쏟고 살아간다면 이 competition의 wolf는 점점 더
살이 찔 것입니다. 더 강해지겠죠. 우리 안에 있는compassion의
wolf는 맥을 못출거예요. 우리에게도 그게 있긴 있지만,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전혀 없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또 많은 이 시대의 사람들과 다르게 이렇게 코스타
집회를 선택하고 오는 것처럼 사실 이런 시간들은 우리에게
색다른 힘을 주는 거잖아요. 바로 이competition의 wolf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compassion의 wolf에 먹이를
제공하는 선택을 하는 거죠. 이런 선택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얼마나 다른지는 우리가 알잖아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어느 쪽에 먹이를 줘야 하느냐 하는
것은 자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치열한 경쟁 사회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깨어서 이 쪽의 wolf가 먹이를
먹기보다는 정말 compassion의 wolf가 계속 먹이를 먹을
수 있도록, 그래서 우리가 이 시대의 흐름으로부터는
좀더 자유로와질 수 있고 그리고 오히려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때, 우리는
정말 샬롬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가져올
수 있지 않을까요? 근데 그 예수 그리스도의 길은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정말power를
사용하는 길이 아니라 power를 다 내려놓는 길이었잖아요?
power of powerlessness라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우리도 경쟁 사회 속을 살아가다보니 그리고 이 경쟁
사회에서 결국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킨 사람들이
다 power를 가진 사람들이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논리가 ‘우리가 힘이 있어야된다.
우리가 주류 사회에 들어가야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있어야 된다. 그래야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가
있다. 우리가 더 전문인이 되어야 된다. 우리가 전문성을
가져야 세상을 우리가 더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런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맞죠?
여러분들도 동의하세요? 그런 이야기들은 아주 자연스러워졌어요.
당연히. 그런 이야기의 함정은 ‘우리가 힘이 없으면,
우리가 결국 위에 서지 못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없다면,
우리가 주류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우리는 별로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라는 그런
동일한 논리인거죠.
 

그런데, 예수님을 
우리 한번 다시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사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가진 분이셨지만, 그 권세를 이 땅을 
변화시키는데 사용하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으로,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으로 그렇게 무력한 모습으로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줌으로 정말 하나님의 뜻을 이루신 분이잖아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높아지라고
하신 게 아니라 낮아지라고 하셨고, 올라가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려가라고 하신 거죠. 대접받으라 하신
것이 아니라 대접하라고 하신 것이구요. 진정 우리가
오히려 power를 가지려고 하기보다 내려놓을 때 진정한
power가 나타난다는 것. 로마서 15장 1절과 2절에 보면
그런 바울의 고백이 있어요. ‘우리 강한 자가 연약한
자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다 내게 미쳤다 함과
같으니라’. 그 표현을 가만히 보면은요. 우리 강한
사람에게 주어진 소명이 연약한 자들의 약점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리고 비방과 모욕은 내가 받고 그런 것인데요.
우리가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을 한번 보고 싶습니다.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 세상에서 소위 물질과 안정된
지위와 많은 것들을 갖고 있어서 강해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우선 강한 사람들,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줘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자기 수고를
대신하게 하는 거죠. 그리고 둘째, 자기들의 인생의
어떤 재미와 편안함을 정말 끊임없이 추구해가요. 그리고
또 하나 어려운 위기의 시기를 잘 넘어갈 수 있는 안전
장치들을 다 갖고 있어요. 보험도 들어놨지만 때로는
심지어 대신 감옥에 갈 사람도 갖고 있어요. 그 정도로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자신의 짐을 다른 사람의 어깨에
올려놓고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고 위기에서 안전한
거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한번 보고 싶은데요. 우리가
함께 아주 먼 길을 무거운 짐을 지고 함께 행군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죠. 함께 먼 산 길을 같이 걸어갑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생기냐 하면, 도저히 이제는
지쳐서 주저앉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죠. 더 이상 가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됩니다. 그때 강한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그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거죠. 그래서 자기 짐이 더 무거워진
사람들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런 선택을
할 때, 자기를 기쁘게 한 게 아니라 그 약해진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제 다리가
풀려서 걷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서 앞서서 가서
위험 요소들을 다 제거합니다. 먼저 위급한 상황들을
다 처리해주는 거죠. 잘 걸을 수 있도록. 그러고보면
진정으로 강한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의 짐을 자기 어깨에
올려놓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고
오히려 위급한 상황의 앞에 있는 사람들이예요. 그러고보면
세상에서 강한 사람들은 사실 가장 약한 사람들인거죠.
정말로 강함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짐이 내 어깨에
올라오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위험을 맞이하는 것이 진정한 강함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사셨잖아요.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의 어깨 위에 올려 놓으셨고 단 한번도 자신을
기쁘게 하신 게 아니라 다른 우리 모두를 기쁘게 하려고
사셨고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모욕과 비방, 십자가의
고통을 다 받으셨으니깐요. 그래서, 이 땅에 샬롬이
오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는 가장 powerlessness죠.
어느 누구 앞에서도 가장 힘없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진정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통치의
뜻이 있었던 거죠. 그래서, 바로 이 땅에 샬롬을 가져오는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에 올라서는 길이 사실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정말 내려갈 수 있을 때, 진정
샬롬이 오는 것이고, 우리가 가질 때가 아니라, 우리가
내려놓을 때, 우리가 오히려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을
때, 그때 진정 샬롬이 찾아온다는 것을 좀 생각해봅니다.
 

Power에 대한, 둘째날에
유진소 목사님이 잠깐 언급한 말에도 나와있지만, power에
대한 헬라어 두 가지가 있는데, 두나미스와 엑소시아라는
두 단어에요. 두나미스는 거기서 다이너마이트가 나온
것이고, 엑소시아는 엑소시스트 이제 그런 것처럼 사실은
다른 의미가 나오는 것인데요. 똑같은 power인데, 하나의
power는 힘, 강력, 타율적으로 다른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서 복종케 하는, 그런 보이는 어떤 power같은 것이라면,
엑소시아는 보다 원리, 가치, 그런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하고 따르게 하는 것이죠. 근데, 하나님은
두 가지 power를 다 가지신 분이죠. 예수 그리스도도
두 가지 power를 다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두나미스를 사용하실 때가 있어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power를 사용하실 때가 있는데, 그땐 어떤 때만
사용하시느냐 하면 예를 들어서 바로의 철권 통치에
대하여 최종적인 심판을 내리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그리고, 때로는 마귀에 사로잡혀서 거기에 묶여있는
사람을 해방하실 때, 그 마귀의 권세를 쫓아내실 때
사용하시는 거죠.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따를 사람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고 이 땅을 변화시킬 제자들을 보내실 때,
그들을 이제 불러서 제자가 되라고 하실 때, 절대로
두나미스를 사용하시지 않았다는 것. 예수님은 엑소시아를
통해서 그들을 예수님께로 초청하신 것이죠. 결코 타율적으로
따라오지 않도록. 자발적으로만 오게 하셨던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과 의욕이 있다면, 우리도 어떤 보이는 power를 가지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정말 섬김이 오히려 더
power라는 것. 내려갈 수 있는 것이 더 power고 포기하는
것이 더 power라는 것. 그것을 통해서 오히려 세상을
더 새로운 길로 안내하고 이제 초청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제 그 세상 
한복판을 살아가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인데요. 그런 
점에서 우리는 순례자라고 표현하잖아요.
그런데, 이 순례자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인지 한번
표를 통해서 잠깐 잘 정리해보고 싶은데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면
하나는 잘 정착해서 살아가는 정착민들, 그리고 온갖
만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관광객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순례자들이 있는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걸맞는 단어는 어떤 걸까요? 정착민입니까, 관광객입니까,
순례자입니까? 우리 순례자라고 고백하죠. 히브리서
11장에도 있는 표현처럼 그 믿음의 사람들에 대한 어떤
표현이 그거잖아요.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땅에서는 그 약속을 따라 받지 못하였지만, 스스로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구요. 그들이
또한 본향을 사모하고 있었는데, 돌아온 본향을 사모했다면
되돌아갈 기회가 있었겠지만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는데, 이제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했다구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하늘에 한 성을 예비하셨다는 그런 말씀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 고백을 통해서도 우리가 알듯이, 우리는
순례자라는 찬양도 부르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순례자는
이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여행을 할 때는
떠남이 있는거죠. 그리고, 여행은 뭔가 목표가 있기에
추구하면서 여행합니다. 그리고, 여행의 과정에서 받아들여야
되는 게 있죠. 그리고, 여행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싸움이 있습니다. 근데, 이 네 가지 영역에서 정착민과
관광객과 순례자가 어떻게 다른지 한번 완성해보고
싶은데요. 정착민은 떠나는 사람들인가요? 전혀 아니죠.
떠남이 없죠. 그리고, 떠남, 버림, 그리고 내려놓음이
사실은 없는 사람들이,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이 정착민이죠.
관광객은 떠남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떠나죠. 그러나
관광객들은 얼마만큼이나 떠나는 걸까요? 관광객들은
자기 문화를 다 내려놓고 떠나나요? 사실 그렇지 않죠.
우리가 아무리 관광 여행이 좋아도 나 고추장, 김치
없으면 안돼 하면서 챙겨가잖아요. 관광 여행에서는
떠나긴 떠나지만 사실은 부분적으로면 떠나는 거죠.
적당히 떠납니다. 하지만, 순례자의 떠남은 어떤 걸까요?
순례자는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나는 거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할 때도 사실은 모든 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그런 떠남의 부름이 있었던 것. 또
예수님의 제자들이 부름받았을 때, 그들이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다 버려두고 떠나게 됬던 것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로의 부름, 순례자로의 부름은 우리에게
익숙하고 우리에게 필요하고 소중한 안전 장치들조차도
실은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추구함, 정착민은 뭘 추구할까요?
정착민들이 추구하는 것은 우선은 안정이구요. 그리고,
또 하나 붙인다면 번영, 형통을 추구하는,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죠 당연히. 그럼 관광객들을 뭘 추구할까요?
관광객들을 즐거움, 만족을 추구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요.
세 가지 만족, 요한일서에 있는 표현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 실제로 우리 관광
상품들을 보면 알 수가 있잖아요. 관광 상품에서 중요하거든요.
사실 몸이 즐거워야죠. 먹거리, 잠자리가 나쁘면 사실
관광객 모으기 어렵잖아요. 그리고, 몸만 즐거우면
뭐합니까? 볼 거리가 정말 중요하죠. 볼 거 없으면 왜
가겠어요? 다 눈요기 때문에 가는건데. 또 하나 이생의
자랑두요. 우리 관광 여행가면 제일 많이 하게 되는게
뭐냐하면 사진을 찍어오는 것인데요. 그 사진 많이
찍어서 이제 가져오죠. 근데 그 사진에서 결코 빠지지
않는 사람이 하나 있어요. 누구예요? 나. 관광지의 유적,
사람, 문화, 그것은 다 나를 위한 들러리고 내가 거기
있었다는 게 중요하죠.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자랑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 관광객은 이런 것들을
만족시키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하지만, 순례자는
뭘 추구하는 사람일까요? 그 Kingdom seeker 잖아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나라,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받아들이는 것도 다르죠. 정착민은 뭘 받아들일까요?
다르게 얘기하면, 정착민들이 잘 못 받아들이는게 뭐죠?
외부인, 또 변화. 정착민들은 변화 싫어하잖아요. 또
바깥에서 오는 거 싫어하고. 그 얘기가 뭐냐하면,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는 거죠. 익숙한 것만. 관광객은 뭘 받아들일까요?
새로운 거 받아들여요, 받아들이지 않아요? 받아들이죠.
그런데, 단서가 있어요. 마음에 드는 것만. 새로운 거라고,
아무리 새로운 음식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왜 받아들이겠습니까?
마음에 드는 것만 받아들이죠. 순례자는 어떨까요?
순례자는 이 믿음의 여정, 순례 여정에 있는 모든 과정들을
받아들이는 거죠. 싸움이 있는데, 정착민은 주로 누구랑
싸울까요? 정착민의 싸움은 그 주변 정착민과의 싸움인데요.
왜냐하면, 그 마치 나라와 민족도, 국경이 붙은 나라와
민족치고 사이좋은 나라가 없어요. 이유는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고 이쪽도 안정과 번영을 원하니 경계선
분쟁이 생기는 거잖아요. 그러니 사람도 살지 않는
독도까지 가지고도 사실은 으르렁거릴 수 있는 게 관계잖아요.
근데, 그런 거처럼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정착민으로
살아갈 때는 언제나 주변 정착민들과 어떤 영토 분쟁처럼
경계선 자리싸움들이 생겨나게 되는 것죠. 그러니까
주변 정착민과 싸웁니다. 그럼 관광객은 누구랑 싸울까요?
관광객은 주로 가이드랑 싸웁니다. 왜냐하면, 관광
여행을 나선 이유는 좋은 관광 상품을 소개받았기 때문이고,
거기에 대한 책임은 가이드에게 있는 거죠. 불만족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듯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나서서 모세를 뒤따라갈 때 그들이 기대했던 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좋은 관광 상품으로 소개된
거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가도 먹을 것, 마실 것, 잠자리,
불편한 것 밖에 없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나타나지도
않고. 누구 책임입니까? 모세 책임이죠. 사실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이 출애굽기 19장에서 들은 것처럼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명령을 지키면 너희가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것이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이제 그런 비전을
주신 것이지만,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들려진 거는
그게 아니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어요. 그래서,
그 백성이 광야길을 관광객의 마음으로 걸었으니 계속
원망하고 불평하고 그랬던 거죠. 순례자는 누구랑 싸울까요?
순례자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사람이죠. 우리 교회도
한번 생각해봅니다. 정착의 교회, 정착의 교회는 사실은
어두움을 갖기 쉬운 거죠. 때로 어떤 교회들은 전통과
옛날 것을 절대로 벗어버리지 못하는 교회들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원래 마음들이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보면.
우리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파나
율법학자들, 아마 그 사람들도 젊었을 때 처음 거기에
입문할 때는 굉장히 순수했을 거예요. 다른 유대인
어떤 사람보다 더 말씀을 사모하고 또 주님의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졌기에 그리로
들어갔겠죠. 하지만, 거기에 오래 정착하다보니 완전히
정착민이 되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결국은
이제 정말 하나님의 뜻과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도 정착의 교회가 될 때, 그 세상
안에서 잘 정착하려고 할 때, 이러한 어둠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 교회가 생각보다 정착의 교회는 언제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쉽고, 그리고 익숙한 것만
받아들이려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참 갈등과 다툼을
많이 겪게 되고, 교회와 교회들 사이도 경쟁 관계가
되기 쉬운거죠. 그런가하면 관광객의 교회, 어쩌면
오늘은 좀 그런 모습도 많이 보여지는 것 같애요. 오늘
우리 시대가 customers’ satisfaction의 시대라고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소비자 만족 시대. 정말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는 게 정말 중요하잖아요. 정말 많은 교회들도
성장하고 더 좋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필요가 있으니까, 많은 성도들도 소비자처럼
모든 조건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를 선호하게 되었어요.
우리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부터 모든 것들이
잘 갖추어진 교회가 좋죠. 마치 우리가 mall에 모든 것이
잘 갖추어진 mall이 쇼핑하기 좋은 것처럼, 사실 오늘의
교회는 정말customers’ satisfaction과 많이 이제 가까와져버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다시 회복되어야될
교회는 어떤 교회일까? 우리는 정말 순례자의 교회로
부름받았다는 것을 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교회도
그렇지만, 우리가 개인적으로도 그렇겠죠. 여러분들은
누군가요? 정착민인가요, 관광객인가요, 순례자인가요?
아마 섞여있다고 고백하게 될 거예요. 내 안에는 정착민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의 모습도 보이고 순례자의 모습도
보이죠. 그런데, 우리가 정말 사랑하고, 우리를 또 너무나
더 먼저 사랑해주신 예수님께는 정착민의 모습이 전혀
없었고, 관광객의 모습도 전혀 없었잖아요. 오직 순례자의
모습만 있었죠. 그리고, 그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
하시는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은 우리가 정착하는 거
싫어하시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만족을 누리는 거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 우리 개인보다 주님께서 정말
사랑하시는 모두를 위한 것이죠. 저도 저희 아이들이
다섯이지만, 아이들이 이제 처음에는 같이 먹을 것을
분배해 주잖아요. 어렸을 때. 그럼 각자 자기 것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다가 어떤 애는 빨리 자기 것을 먹어치워버리고,
어떤 애는 잘 보관해둬요. 그러면 이제 시간이 지난
다음에 보관해둔 애가 그것을 먹으려 그럴 때, 먹었던
애가 나 좀 달라 그러죠. 그러면 안 줄 권리가 있죠.
당연히. 안 줘야 더 공평하죠. 그런데, 그 때 그 아이가
안 주고 절대로 안 준다고 지키고 있을 때 부모가 볼
때는 ‘아이, 그래도 그거 좀 주지’ 그런 마음 드는게
사실이예요. 그렇잖아요? 설사 잘 보관해놓고 지킨
아이가 자기 것을 먹는 게 당연한 권리이기도 하지만요.
그래서 참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정말 언제나 sharing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요. 하나님은 이 땅에
진정한 샬롬, 조화를 바라시는데,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것을 우리가 서로 아끼지 않고 사랑으로 서로
나누려고 할 때, 우리가 나를 위해서 살기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려고 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요.
 

이 세상에는 
크리스챤들 중에서 참 이 샬롬을 
위해서 특별히 헌신한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어요.
저는 제가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이제 마치고 싶은데,
혹시 여러분, 떼제 공동체라고 들어보셨어요? 떼제라는
크리스챤 공동체가 있는데, 한국에도 이제는 떼제 음악으로
많이 알려져 있죠. 근데 이 떼제 공동체는 프랑스의
떼제라는 아주 시골 벽지에 있는 곳인데요, 거기는
이차 대전 끝날 즈음에 어느 한 청년이 혼자서 중보
기도하러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기 거주하게 되면서
생겨났어요. 그런데, 거기를 지나가던 어떤 다른 청년도
같이 중보 기도에 참여하게 되고, 그러다가 이제 거기에
형제들의 공동체가 형성되게 됬는데, 지금은 매년 유럽의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되었습니다. 근데
그 공동체가 헌신하는 거는 뭐냐하면 화해와 일치예요.
화해와 일치, 정말 샬롬이 이땅이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결혼도 하지 않기로 결정한 개신교 청년들이라고 볼
수가 있는데요. 남자 형제들인데, 그런데 이 떼제 공동체에서는
언제나 하루에 세 번 예배가 드려지는데, 그리고 그
예배는 다 라틴어로 이루어져요. 프랑스 마을에 있는데도.
라틴어를 선택한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는 유럽은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된
후에 계속해서 기독교 세계였잖아요. 그렇지만, 나중에는
개신교와 캐톨릭 사이에, 또 프랑스와 독일, 프랑스와
영국, 이태리, 모든 나라들 사이의 전쟁의 역사예요.
계속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사람들끼리 죽이고
죽인 전쟁이죠. 그 전쟁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 싫어합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 싫어하고 그러듯이 유럽에
있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긴장과 그 갈등이 많아요.
근데 그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제 함께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회복하고 하나될 수 있도록 그래서 중보 기도하는
곳이고 또 모든 언어, 영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의
모체가 라틴어잖아요. 그래서, 라틴어로 선택해서 찬양을
부르는 거죠. 거기가 정말 샬롬을 위해서 참 아름다운
헌신을 한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고. 그리고
또Christian Peacemaker 팀에 헌신한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우리 한국에는 또 다른 단체지만, 혹시 여러분들
프론티어즈라고, 개척자들이라고 들어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한 단첸데요. 이Christian Peacemaker들이나
개척자들은 어떤 사역만 하냐면 세계 분쟁과 전쟁이
있는 지역으로만 사람을 보냅니다. 거기에 그 전쟁과
분쟁으로 인해서 갈라진 사람들 사이에 이제 중재자가
되기 위해서 헌신하는 거죠. 상처입는 쪽의 사람들을
위로하고 거기의 아이들을 위해서 사역하고 가능하면
그것이 다시 복수와 분노로, 복수로 나가지 않도록
화해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모두가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샬롬을 위해서 헌신한다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그 샬롬이 나로부터
나의 가까운 가정과 이웃, 또 교회, 또 직장, 또 학교,
또 심지어 나의 민족을 넘어서서 다 전해지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샬롬에 대한 정말 진지한 이해와 헌신이 필요하다는
것. 멀리까지 갈 이유는 없다 하더라도 정말 샬롬을
위해서 중보 기도하고 또 우선 내가 가정 안에서도
샬롬을 위해 헌신한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그때 예수
그리스도의 뜻은 하늘에서와 같이 또 이 땅에도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