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KOSTA/USA Youth Conference에서 있었던, 채영광 박사의 선교적 삶(Living out The Dream) 세미나입니다.


채영광 (youngkwang.chae@gmail.com)


우리는 우리 모두가 꿈꾸는 그런 삶이 있습니다. 그 꿈이 실현되는 그 날 우리는 행복해질 것이며 우리의 삶은 성공적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나의 것인지 하나님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정확히 말해, 내가 무엇을 위하여 공부하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 번 세미나를 통해, 학교에서, 교실에서, 지금 이 시간 내가 딛고 있는 이 곳 미국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멋진 Missionary로 살아갈 수 있는지 다 같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비로서 내 꿈이 되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이미 땅끝의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깨달으면 효자, 효녀가 되지 않을 수 없듯이, 하나님의 놀라운 아가페 사랑을 알게 되면, 하나님 자녀의 신분에 맞게, 천국 시민답게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학교에서 좋아하고 존경하는 선생님이 있는가? 우리의 존경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을까? 그 분께 감사함을 표시하고 그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으로 나타낼 수 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 분께 찬양과 감사와 예배, 그리고 말씀의 순종으로 드러난다. 크리스천이란 뜻이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작은 예수들이란 말이다. 그리스도와 나를 동일시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행한 일들을,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 가운데 흘려 보내는 그 동일한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인 것이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임과 동시에 우리의 하나님이시다. 형제 자매가 있는 분들은 부모님이 늘 하시는 말씀을 안다. 형제 간에, 자매 간에 싸우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는 것이다.부모님의 마음은 여유 있게 사는 첫째에게도 있지만, 어렵게 생활하는 둘째에게도 있다. 첫째가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도 좋아하시지만, 둘째의 일을 자기 일처럼 도와주고 챙겨주는 것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다. 이 하나님 사랑을 이해하면 수직의 하나님 사랑이 수평의 이웃 사랑과 만나 온전한 십자가 사랑을 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나를 위함과 동시에 이 지구 상의 모든 민족과 족속을 위하여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주님께서,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증인이 되라고 이야기한 뜻이 여기에 있다. 복음은 로마서 1장16장 말씀처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빌립보서 1장16절에 ‘확신하노니 너희 안에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He who has begun a good work in you will perform it till the day of Jesus Christ)’는 말씀이 있다. 우리 마음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그리스도이시다. 내 안에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이는 예수님이시다. 이 꿈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받아 들였을 때부터, 이미 주님께서 이루고 계시는 현재 진행형이면서 완성형인 꿈이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그 사랑으로 세상에서 승리하며, 그 고귀한 사랑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하는 삶,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지 않은가? 우리들의 꿈은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꿈으로 가는 길의 장애물
그리스도의 꿈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삶을 이야기 하기 전에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꿈에서 멀어지게 하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 적을 알아야 백전백승이다. 예수 안에서 누리는 행복과 평안을 빼앗아 가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 방탕, 성적 타락, 미디어 중독, 마약 중독, 게으름, 무력감, 시기, 질투, 성냄, 그리고 수군거림(gossip) 등등 열거하자면 수없이 많다.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비교의 영’이다. 그 파괴력과 파장이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비교의 영이 우리를 사로 잡으면, 영적으로 더 이상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 할 수 없게 된다. 비교의 영을 ‘내적 비교 (Internal comparison)’와 ‘외적 비교 (external comparison)’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내적 비교는 ‘남과의 비교’를 통해 ‘나를 판단’하는 것이다. 나를 자꾸 남과 비교하면, 내가 위축된다. 주님이 부어 주셨던 은혜를 감사할 수 없게 되고, 앞으로 부어주실 은혜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외적 비교는 ‘나와의 비교’를 통해 ‘남을 판단’하는 것이다. 내 기준으로 남을 자꾸 판단하다 남의 단점을 지적하다 보면, 우월감에 빠지고 곧 교만해진다. 은혜를 더 이상 갈구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된다. 이제, 이 두 가지 비교의 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내적 비교를 거부하자.
먼저 내적 비교를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해진 세대들이다. 부모님,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나 보다 공부 잘하는 친구들과 비교 당하는 것에 익숙하다. 자신보다 우월한 사람과 비교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꾸 비교 당하다 보면, 누구나 열등감 속에서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외부의 비교에 익숙해지다 보면, 내 자신을 스스로 남과 비교한다. 우리 집은 가난한데, 우리 집은 부모님이 이혼하셨는데, 저 친구는 집도 크고, 좋은 차도 타고 다니고, 집도 정말 화목하구나.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 나는 환경도 좋지 않고 능력도 변변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우울해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것이 우리를 넘어지게 하는 효과적인 사단의 전략임을 알아야 한다. 
나는 미국에 유학 오기 전에, 내 스스로 두려워했던 것이 앞으로 내가 나의 동기들과 나를 비교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지금 내가 미국에서 암을 연구하고, 또 암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종양 내과 임상 트레이닝을 받으러 한국을 떠나 있는데, 10년, 20년 후 한국에서 개업하여, 경제적으로 비교적 여유 있게 살고 있을 내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워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비교가 내 행복을 얼마나 빠르게 앗아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어른들의 후회 어린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학교 다닐 때 저 친구는 나보다 훨씬 공부도 못했는데, 지금은 나보다 잘 살아. 우리 동기 중에 저 친구는 강남에 빌딩이 몇 개라더군. 제일 성공했어. 나는 왜 돈을 더 잘 벌 수 있는 과를 선택하지 않았나 모르겠어. 이런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실 나도 세상에서 꼭 성공해야 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해답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함
그런데, 언어 사용부터 정확하고 볼 일이다. 잘 사는 것, 성공한 것과 부자인 것과는 별 개라는 것을 명심하자. 가난하면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 부자이면서도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하루하루 자살을 생각하는 극도의 불안과 우울 속에서 살아 갈 수 있다. 언어는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가 우리의 언어에서 잘 사는 것과 부자인 것을 똑같이 표현 할 때, 우리 스스로의 사고를 세상의 틀 안에 국한시키게 된다. 이 세상은 성공을 연봉이 얼마인 직장에 들어가는가, 또 의사로서 얼마의 연봉을 받고 살아가는가로 평가한다. 연봉은 액수이기 때문에, 참으로 비교하기 수월하다. 연봉 액수로, 회사 지분으로, 세상의 성공을 평가하고, 경제 잡지 Fortune은 전세계 부자 순위를 발표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행복을 비교를 통해 야금야금 앗아가려는 것임을 깨닫자. 나는 미국에 오기 전에 만났던 내 신앙의 동역자 친구들에게 내가 비교의 영을 거부하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에 감사와 기쁨으로 공부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다. 목사님들께도 찾아가 동일한 기도 제목으로 기도를 부탁 드렸다. 나 역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외에 그 어떤 것도 부러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미국 볼티모어(Baltimore)에서 공부하면서, 으리으리한 집에 사시는 한 교수님 댁에 방문하면서 하나님께 참 감사하게 된 일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나의 반응은 언제 이렇게 좋은 집에 살아보나 하는 한숨이거나 나도 열심히 돈을 벌어 꼭 이런 집에 살아야 겠다는 야망, 둘 중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만약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없다면, 아무 소용 없겠구나 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나님이 축복해주시면, 내가 막 고생하며 노력하지 않아도, 언젠가 나도 이런 집에서 살 수도 있겠구나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나는 우리 주님이 있으니까, 찬송가 가사처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다 하늘 나라’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나는 내 유학 전의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았다.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될 때 비교의 영을 거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내 평생의 기도 제목이기도 하다. 내가 영적으로 무디어 질 때, 사단이 나를 이 무기로 공격할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너의 친구들이, 후배들이 그렇게 성공할 때, 너는 무얼 하고 산 거니? 왜 그런 고생을 하고 사니? 여태까지, 인생을 허비했구나, 이런 속삭임이 들린다면, 그 때가 곧 다시 주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야 할 때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바로 이 말씀을 붙잡을 때다.

어디에서보다 누구와 함께
내가 미국에서 의사생활을 하기 전에, 한국에서는 시험장이 없어서 하와이로서 미국의사고시 시험 스텝 3 시험을 봤다. 이틀 동안 하루에 8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시험이었다. 혼자 와이키키 해변 앞의 한 호텔에서 시험 전날 공부를 하면서 이틀간 시험을 봤다. 바로 한국에 가기에는 비행기 표가 아깝다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험 친 후 하루 관광할 수 있는 날을 만들어 놓았다. 와이키키 비치에서 혼자 일광욕도 하고, 하나우마 베이(Hanauma Bay)에서 스노클링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즐겁지가 않았다. 날씨는 좋고, 경치도 좋고, 스노클링하기에도 최적의 환경이었는데, 그렇게 기쁘지가 않았다. 좋은 것을 보고 좋다고 할 사람이 곁에 없었다. 가족끼리, 연인끼리 놀러 와서 재미있게 노는 그 곳에서 혼자 돌아다니는데,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했다. 그 때 깨달은 것이 있다. ‘어디에 가느냐’ 보다 중요한 것이 ‘누구와 함께 가느냐’이구나.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당신과의 ‘동행의 기쁨’을 주기를 원하신다. 당신의 자녀들인 우리와 함께 하고 싶은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다. 정말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늘 나라가 된다. 두려움도, 외로움도, 슬픔도, 분노도, 절망도 눈 녹듯 사라진다. 지구 상 아무리 척박한 땅이라도 내 사랑하는 아내와 딸 린아와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그 땅에서 살고 싶다. 날씨가 좋든 나쁘든, 경제적으로 부유하든 어렵든 상관하지 않는다. 하물며 우리 주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이 모르는 기쁨이 함께할 것을 믿는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