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상담실] 신앙, 제자도

코스타 상담실에서는 많은 코스탄들이 궁금해 하는 질문을 가상의 코스탄과 멘토와의 대화를 통해 풀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실린 의견은 멘토님 개인의 의견이며 코스타와 소식기관의 의견은 아닙니다.

신앙, 제자도

“멘토님, 제가 기독교 신앙에 처음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괜찮은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지만,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기독교에 대해서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할까요. 기독교인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과 다른 생각이나 행동을 고집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강요하려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가 비록 초신자이지만, 성숙한 기독교인이 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먼저 형제님이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기독교 신앙에 들어오는 것은 지금까지 경험했던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리둥절 하겠지만 차차 익숙해지고 동서남북의 분별이 가능해 질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성숙한 신앙인들을 만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길입니다. 하지만 형제/자매님도 지적하셨듯이 주변의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신앙성장에 방해가 되고 거침돌이 될 경우도 많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현실인 것을 부인할 수 없군요. 형제/자매님 주변에 제가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소개해 드리고 싶은데, 그 점이 여의치 않으니 형제/자매님에게 도움일 될 만한 길을 제 나름대로 제안해보겠습니다. 

첫째, 형제님이 직접 성경을 열심히 파고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솔직히 쉬운 책은 아닙니다. 하지만 좋은 참고서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고 깨닫는 일이 힘든 것만은 아닙니다. 도움이 될 참고서로 다음 몇 권을 추천합니다. 1. 성경연구입문 (존 스토트, 성서유니온) 2. 어, 성경이 읽어지네 (이애실, 성경방) 3. 매일성경 (성서유니온) 또는 생명의 삶 (두란노) 4. 한 눈에 보는 성경 (브루스 윌킨슨, 디모데)
 
둘째, 성경 외에 기독교 신앙에 도움이 되는 좋은 신앙서적들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책들을 추천합니다. 1. 기독교의 기본진리 (존 스토트, 생명의말씀사) 2. 길은 여기에 (미우라 아야꼬, 설우사) 3. 갈보리 언덕 (로이 헤숀, 기독교문서선교회) 4. 신앙생활 가이드 (존 스토트, IVP) 5. 믿음의 싸움 (존 화이트, 생명의말씀사) 6. 사귐의 기도 (김영봉, IVP) 7. 이래서 믿는다 (폴 리틀, 생명의말씀사) 8. 순전한 믿음 (찰스 콜슨, 생명의말씀사)
 
셋째, 주변에 있는 교회들 중 기독교의 정신이 살아있는 교회를 찾아보세요. 초신자에게 좋은 교회를 찾아보라는 권면은 너무 막연한 느낌이 있지만 그래도 다음 몇 가지 점들을 고려하셔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는 것이야말로 신앙성장에 가장 확실한 길이니까요. 1.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는 교회. 목사님의 설교가 성경본문을 자세히 강해(설명)하는 것인지, 기독교 신앙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인지 등을 살펴보십시오. 교회의 크기나 유명세로 판단하지 마시고, 진리를 바로 선포하는지의 여부로 판단하십시오. 2. 목사님이나 교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지,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단지 예의가 바르다거나 교양이 있어보이느냐의 여부가 아니라 그분들의 모습에 진실과 겸손, 사랑과 섬김의 자세가 배어있는지를 보십시오. 자신들을 주장하고 자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품성과는 거리가 먼 모습입니다. 십자가의 정신은 자기를 부인하고 기꺼이 남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형제님이 일정 기간 한 교회를 출석해보시면 그런 점들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넷째, 반드시 교회는 아닐지라도 선교단체나 주변의 성경공부 모임 등도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이때도 위의 세 번째 사항의 설명을 참조하십시오.
 
형제님을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신앙의 선배를 만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런 사람이나 단체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간접적으로 글로만 답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무쪼록 선하신 우리 주님께서 형제님의 신앙여정을 인도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김현회 hkim@clayjars.org)

[코스타 보이스 2009 – 강사 인터뷰] 김기현 목사


김기현 목사 – 월요일 전체집회 강사
http://blog.daum.net/ezrakim

1. 김기현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스타에 참석하는 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저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교회를 섬기는 목사, 이웃과의 관계에서는 부산 기윤실을 섬기는 활동가, 저 자신과의 관계에서 저의 은사인 글쓰기를 하는 작가입니다.

2. ‘가롯유다의 딜레마’,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라는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데요, 간단히 소개해주시고, 어떤 의도로 이 책들을 쓰게 되셨는지 설명해주십시오.

‘가룟유다 딜레마’는 유다복음과 가룟 유다가 던지는 만만찮은 질문에 대답하는 책입니다. 과연 가룟 유다의 배신은 예정인가, 자유의지인가? 유다는 자살했으니 지옥 가는가? 등의 골치 아픈 문제를 하나 살피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가룟 유다와 싸우기보다는 예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데 초점을 맞추었어요.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는 누구나 겪는 고통의 문제를 신학적으로 성찰해 본 책입니다. 하박국서를 중심으로 하고, 하박국서를 내재적으로 읽고, 그것을 신학과 인문학과 연결시키시고, 그런 다음 제 경험을 섞었어요. 예를 들면, 왜 착하고 의로운 하나님이 모진 고통을 허락하시는가, 원수처럼 미운 사람을 향해 복수하는 마음을 품고, 그렇게 기도해도 되는지, 왜 하나님은 기적적인 응답을 주시 않으시는지 등을 다루었어요.

3. 오늘 특강의 주제와 내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전반부는 샬롬의 3중구조를 설명하구요, 후반부에서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나는 대목에서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냈는가를 다룰 것입니다. 특별히 강조할 부분은 평화란 다름 아닌 용서라는 것입니다.

4. 근래에 한국 교회에 대한 비난이 커지고 있는데요,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디서부터 새롭게 시작해야할까요?

성서와 독서입니다. 우리 자신을 회개케 하고, 시대를 변혁하는 힘이 다름 아닌 성서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도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성서를 대충 읽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열심히 읽어야 합니다. 유교의 선비들은 한 책을 백번이고, 천번이고 읽었습니다. 한국 개신교내에 예컨대, 로마서나 복음서, 등 성서 한 권을 그렇게 읽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성서 이야기가 우리의 살과 피, 혈관 하나 하나에까지 침투해 들도록, 그래서 내가 말하는 것인지, 성서가 내 안에 들어와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가 되도록 반복적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서와 함께 책을 곁에 두어야 합니다.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서를 다른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고 했어요. 신문도 신문이지만, 무엇보다도 독서가 우선이고, 최고입니다. 성서를 살아낸 사람들과 선배들의 책을 읽으면서 시대를 읽고, 살고, 바꾸는 지혜와 영성을 자연스레 몸에 체득하게 되지요. 그러니 웨슬레의 유명한 기도처럼, “한 권의 사람, 만 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서와 독서로 시작하기 바랍니다.

5. 기독교 신앙에 대해서 회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는 기독교 신앙에 처음 접한 사람들에게 신앙의 선배로서 조언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위의 얘기와 중복됩니다만, 성서를 부지런히 읽어 보기를 권합니다. 성서는 정말 재미있어요. 여기에 세 가지를 덧붙이고 싶네요. 첫째는 한분의 멘토입니다. 둘째는 열 명의 친구입니다. 셋째는 백 권의 책입니다. 청년의 시기, 유학의 시기에 한분의 멘토를 만나고, 같은 꿈을 꾸고, 격려해 주고, 도전해 줄 수 있는 친구를 10명을 만나고, 영혼과 지성과 감성을 튼실하게 할 좋은 책을 백 권 읽을 수 있다면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정말 행복하고, 의미있을 겁니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기획기사] 하나님이 주신 ‘평화의 약속’

세상 사람들은 평화를 매우 갈구하고 있다. 세상의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평화가 교육, 계몽으로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전쟁, 힘으로 달성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볼 과연 평화를 달성할 있을 것인가 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하고 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 평화를 의미하는 단어-샬롬 (Shalom), 에이레네 (eirene), 팍스 (Pax), 기독교 평화주의(pacifism)- 가지 . 구약성경에서는 샬롬이라는 단어가 쓰였고, 신약성경에서는 에이레네라는 단어가 였다기독교가 말하는예수의 평화 어떤 것인가? 코스타 보이스는 기획기사를 통해예수의 평화 따르는 우리는 어떤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할지 고민해본다.


 


샬롬 (Shalom)


샬롬은 1차적인 의미로 외적인 만족과 내적인 만족 모두를 포괄하는 완전함, 하나됨, 조화, 번영, 건강함, 충만함(wholeness)이다. 전쟁에서 화해함, 전쟁에서 승리함 (return from war in shalom)이라는 의미로도 쓰였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잘삼, 안녕, welfare, well-being 의미이다.


한편 샬롬은 세상의 혼돈에 대한 하나님의 질서의 회복,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 (blessing of peace) 의미하기도 한다. (시편 29) 샬롬은 관계적 개념으로서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 속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바른 질서가 이루어질 달성된다.( 1:26)


포로기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차원의 의미가 부각된다. 샬롬은 이스라엘 전체 사회를 이끄는 이념으로서 고통 당하는하나님의 백성 바라보는 미래의 회복된 질서라는 의미이다. (이사야 2:2-4, 미가 4:1-5) 종말론적 비젼(이사야 2:4)으로서의 샬롬은 종말에 야훼가 모든 나라의 심판자가 되어 세상에 이상의 전쟁이 없을 것이고 , 야훼가 다스리는 땅에는 모든 것이 완성되고 야훼의 다스림 안에서 이스라엘은 중심이 것이라는 비젼이다. 그러므로 샬롬은 미래 지향적 기다림이며 평화를 성취할 메시야에 대한 기다림이다. ( 2:2~4, 4:1~3)


 


구약의 샬롬에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기독교의 다는 아니다. 왜냐면, 구약의 샬롬은 다분히 힘에 의한, 폭력에 의한, 이스라엘의 부흥을 통한, 강압을 통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샬롬이 이스라엘의 복수와 신원, 이스라엘의 정복이라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샬롬이 목적은 있어도 수단은 없다.


 


예수의 샬롬 (Shalom, Eirene)


구약의 샬롬의 의미에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제시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평화를 전하고 이루시며 사셨다. 구약의 예언을 성취할 아니라 예언의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셨다.


 


평화의 복음


예수님의 복음을 요약하는 여러 가지 개념하나님의 나라’ ‘희년’ ‘복음’ ‘기쁜 소식이런 중에 중요한 가지 개념이 바로평화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인간들이 죄의 결과로서 겪게 되는 , 그리고 그보다 근원적인 죄에 대한 용서를 하시며 결과를 평안, 평화라고 말씀하신다. ( 7:48-50; 8:48) 예수님의 메시지의 핵심은 평화이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온전하게 다시 정립되는 ,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병고침과 죄사함이 이루어진 상태, 그것을 평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할 것을 부탁하실 때도, 자신의 메시지의 핵심이 평화임을 말씀하신다. ( 10:5-6) 그리고, 세상의 거짓된 평화에 속지 말고 자신 안에서 구현되는 진정한 평화를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다. 말씀은 구약의 예레미아의 거짓된 평화에 대한 비난과 공명한다. ( 12:51)


 


샬롬의 윤리


샬롬의 윤리에 관한 평화에 관한 산상수훈의 말씀이 있다. ( 5:9) 무엇보다도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통하여 자신의 윤리적 비젼을 제시한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예수님이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유대교 가르침에 대해서 새로운 윤리적 지표를 제시한 것이라고 있다. 구약의 샬롬은 평화를 말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이 강국이 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인도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이다. 메시아가 강한 힘으로 그동안 당했던 고통, 한을 풀어주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전체에서 의미를 찾아볼 화평케 (peacemaking) 의미가 구약의 샬롬의 의미와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있다. 평화가 목적으로서뿐 아니라 자체가 과정으로, 수단으로서도, 그리고 목적으로서 자체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5:38-42 보복하지 말라는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이런 점에서 특히 평화를 이뤄나가는 과정, 자체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찾고 평화의 태도를 유지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계시다.


 


샬롬, 용기의 근거


예수님은 제자들을 떠날 것을 말씀하시며, 성령을 약속, 평안할 것을 권면하신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구절은 초대교회가 겪은 상황, 현재 표면적으로 보이는 고통과 탄압 속에서 궁극적인 승리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초대교인들이 겪는 의문에 대한 희망을 주는 말씀이라고 있겠다. 어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최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라는 점을 격려라고 한다. 예수가 누구인가, 실패한 메시아가 아닌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 그의 부활과 함께 진정한 메시아이고 메시아의 승리가 고난의 현장 이곳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예수님의 반복된 인사의 말씀은 단순한 안부를 넘어서 부활의 사건의 의미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사도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평화의 복음을 내일부터 계속 살펴본다.

[코스타 보이스 2009 – 코스타 세미나] 이훈 목사


코스타 세미나는 전체 집회 참석자 천여 명 중 아주 제한된 수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세미나의 중요한 내용이 모든 분께 전달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KOSTA VOICE에서는 코스타 기간에 열리는 세미나 중 다섯 분의 세미나 강사님들을 인터뷰하여 전체의 참석자이 지면을 통해서 평소에 만나기 어려운 만날 분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이훈 목사 – 샬롬의 의미, 샬롬을 위한 헌신 (주제 세미나)

1. 이훈 목사님, 반갑습니다. 코스탄들을 위해 간단히 자기 소개를 해주시죠.

안녕하세요, 저는 이훈 목사입니다. 장로회 신학대학원, 서강대학교, Canadian Mennonite Bible College를 졸업하였고, 1987년 부터 1996년까지 온누리교회 부목사로 주로 소외층 사역을 담당하였으며, 1996년에 캐나다로 이주하여 1998년부터 현재까지 메노나이트 공동체 교회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함께 걷는 순례자(두란노서원)가 있습니다. 1남 4녀를 양육하고 있습니다.

2. 대형교회의 부목사직을 사임하시고,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신 것이 특별해 보이는데요, 그런 과정에 대해서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외층 사역을 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해 마음이 있었습니다. 대형교회 안에도 축복이 많이 있지만 서로의 관계는 깊지 않고 본의 아니게 소외도 있게 되는 것이 안타까웠고, 공동체를 좀 더 경험하고 배우기 위해 공동체 영성이 깊다고 소개 받은 Anabaptist/Mennonite 그룹으로부터 배우려고 13년 전에 캐나다로 오게 되었고, 그 이후 계속해서 메노나이트에 소속되어 사역하고 있습니다.

3. 이번 코스타의 주제가 평화, 샬롬인데요, 주제세미나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샬롬은 하나님의 통치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 통치는 개인적인 그리고 내면적인 경험에 머물 수 없고 오히려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실제적인 삶의 변화가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4. 샬롬의 의미에 관계적인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공동체적인 변화, 이웃과의 관계의 변화에 대해서 강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평화에 대해 기독교적인 특수한 의미로서의 샬롬이 어떤 것일지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앙과 종교는 내면적인 필요에서 시작되지만 기독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과 화해입니다. 하나님의 뜻인 샬롬은 인류가 스스로 만든 모든 분열과 장벽을 극복하여 화해와 하나됨에 이르는 것인데,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중심에 있는 것이겠지요. 기독교의 샬롬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 곧 십자가를 통한 화해와 하나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5. 목사님께서 소속되어 있는 공동체, 아나뱁티스트는 기독교 평화주의로 근래에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데요, 기독교 평화주의를 소개해주시죠. Anabaptist/Mennonite 역사, 현재 공동체의 모습도 간단히 소개해주시고, 이런 전통이 한국 기독교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지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간략하게 소개하기가 쉽지는 않은데요, 하지만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 충실한 것으로 소개하고 싶습니다. 갈등과 분쟁이 있는 지구촌에서 그리고 가깝게는 갈등과 분쟁의 현장인 가정과 교회에서 사람들은 흔히 평화를 위해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평화도 힘의 균형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기독교도 힘을 갖고 그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흔적이 많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평화주의를 실천하는 Anabaptist/Mennonite는 지난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도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삶에 신실하려고 노력해 왔고, 오해와 박해도 받았었습니다. 평화주의의 입장은 갈등과 분쟁이 많은 세상에서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는 것인데, 세상에서 힘을 갖거나 기르려고 하지 않고 보이는 힘으로 갈등과 분쟁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사랑과 겸손으로 접근할 때 진정한 평화가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실천하는 것이지요. 진정한 교회는 어떤 모임이어야 하는지, 갈등과 분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세상에서 어떤 부르심을 받고 있는지 등에 아쉬움을 많이 갖고 있는 한국 기독교에 Anabaptist/Mennonite는 건강한 도전과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6. 세상을 향해 용기를 갖는다고 할 때, 샬롬이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구현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샬롬에 근거한 공동체의 구성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하나요?

또한 어떤 공동체든 조직과 제도가 생겨납니다. 그 조직과 제도는 구성원의 패러다임이 담겨 있습니다. 현실의 기독교 조직과 제도는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주변 사회의 조직과 제도를 본받아 왔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이 주변 민족을 본받아 왕정제도를 갖게 된 것처럼, 신약 이후의 교회도 왕정시대에는 그 조직과 제도를, 봉건시대에는 그런 조직과 제도를, 민주시대에는 그 조직과 제도를 본받아 왔습니다. 그 모든 조직과 제도는 세상에서의 안전과 번영이라는 목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는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그리고 사람(개인이나 소수의 리더)에 의해서가 아닌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인 샬롬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대안적 조직과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구성원 각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로 살아가려는 진지한 헌신이 필요할 것입니다.  

7. 세상을 향해 용기를 갖는다는 것이 세상을 정복하거나 지배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세상을 대할 때, 약자일 때뿐 아니라 어느 정도 힘이 있는 공동체일 때에도 어떤 태도를 갖고 대해야 합니까?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겸손일 것입니다. 숫자든 권력이든 물질이든 보이는 힘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파워가 있습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보이는 힘을 갖게 될 때 언제나 영적으로는 어두웠던 역사를 기억하고, 적어도 그 힘이 바깥 사람들에게 위협이나 부담이 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셨지만 끝까지 섬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의 겸손과 선택이 중요할 것입니다. 

8. 기독교인들이 좀더 성숙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 현재 많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더 깊은 영성, 지혜와 덕을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요,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깊이 있는 영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Savior)로는 고백하지만 교회의 존재(Being)와 실천(Doing)에서 진정 주(Lord)와 모범(Example)으로 삼는 이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오히려 교단의 전통을 유지하고 세상에서의 영향력을 확장하는 데에 효율적인 길을 선호하고, 세상에서의 성공적인 리더십 모델이 더 인기를 끄는 경향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보다 집중하고, 또 한 특정한 리더에 의존하는 경향을 벗어나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몸인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에게 귀를 기울이며 배우는 실험과 노력을 통해 공동체를 통해 우리를 양육하고 세워가시는 주님의 손길을 더욱 풍성하게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코스타 보이스 – 2008 서평] 영화평

오늘 코스타 보이스 서평에서는 최근에 발표된 영화 중에 기독교적 세계관을 반영한 몇 가지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설득력있게 영상으로 소개한 영화들은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고 기독교적 메시지에 관심을 가진 주위사람들에게 복음을 자연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기독교 영화평은 http://www.umc.org/site/c.lwL4KnN1LtH/b.2285817/k.644B/Movie_Review_Archive.htm 에서, 추천 기독교 영화와 그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http://artsandfaith.com/t100/에서 참고할 수 있다.

Dogville
기독교적인 세계관의 가장 기초는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죄의 영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일부의 사람들, 악한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고 어떤 때에 선한 의도와 행동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사실이다. Dogville은 이 죄의 문제를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Dog과 달리 죄에 대해 인식할 수 있는 선한 마음이 있는 반면 그 죄를 이길 수 있는 내적인 힘이 없다. 영화는 외부적인 갈등에서 벗어나 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작은 마을의 순박한 사람들의 매일매일의 삶 속에도 죄가 깊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극 같은 삶을 통해 자기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죄와 구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Children of Men
예수가 태어났을 때 어떤 일이 있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동화 같은 이야기로 비쳐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식민지와 피식민지 간의 전운이 감도는 가운데 점점 심해지는 식민정권의 억압정책으로 강제로 호구조사에 응하는 여정에서 인간이 누울 수 있는 가장 낮은 곳,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힘의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으나 이러한 모든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가장 약해보이는 생명의 아기였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있었던 일을 현실에 비추어 재구성하고 있어 예수님의 탄생의 의미를 좀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밀양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을 제시하는 영화. 예수님에 대한 오해처럼 하나님에 대한 오해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들에게 퍼져있는 것 같다. 예수님 속에 계시된 하나님은 낮아진 곳을 향하고 있던 ‘숨어계신 하나님’이셨다. 이 영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신에 대한 이미지, 곧 힘과 영광의 실체가 기독교적인 생각이 아님을 생각해볼 수 있다. 빈 곳과 초라한 곳, 약한 곳과 병든 곳, 낮은 곳과 조용한 곳에 비치고 있는 햇볓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우리들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영봉의 책 <숨어계신 하나님>은 이 영화를 바탕으로 기독교인들이 고민해볼 만한 문제 몇 가지를 제시하고 있다. 소그룹에서 함께 읽고 나누면 많은 유익이 있을 것이다.

Cider House Rules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문학으로 형상화한 John Irving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주인공인 Homer의 가출과 귀환은 성서의 탕자의 비유를 모티프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야기의 아버지처럼 Dr. Larch는 강요하지도 않고 아들의 결정을 들어주지만 끝까지 자신의 사랑의 끈을 놓지 않고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의 모습을 통해서 결국 어떤 규칙도 그 근본이 사랑일 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에 근거한 규칙은 사랑에 기반한 규칙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자연스레 예수님의 삶과 공명하고 있다. 결국 한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깊이있는 사랑이라는 주제의식을 잔잔한 영상과 함께 표현하고 있다.

Amazing Grace
영국의 노예무역제도 폐지 200주년 기념작. 노예무역폐지를 성경적 소명으로 받아들인 William Wilberforce의 생애를 그린 작품이다. 윌버포스가 당시 노예제도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노예무역 폐지운동을 벌이던 감리교회 공동체와 함께 인내심을 갖고 끝내 노예무역금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긴 여정을 그리고 있다. 개인적인 소명과 공동체적인 비전 안에 기독교적 비전을 꾸준히 추구해간 한 인물의 생애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