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설교는 광주 소명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박대영 목사님께서 빌립보서 2:1-11의 말씀으로 “광야를 걷는 나그네 예수님”이라는 제목으로 전해주셨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옮겨 놓았습니다.
주님께서는 나 스스로 “나그네의 삶”이나 “자발적 가난의 삶”을 실천할 가망이 거의 없는 것을 아시고, 나그네로 살 수밖에 없도록 친절하게 상황을 만들어주셨고, 적은 것으로 자족하지 않으면 안 되는 조건을 주셨고, 형제들끼리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어 먹는 법을 배우게 해주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빚이 “빛”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고, 모자람이 하나님의 신비를 담는 “여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고,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그네로 사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십자가를 나타내는 은유입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 살라는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다른 버전입니다.
이 강의를 위해서 제가 던지는 세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1) 예수님이 나그네 인생을 사셨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제 질문은 왜 예수님은 꼭 나그네 인생을 사셔야 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나그네 인생, 혹은 십자가 인생은 왜 우리에게도 필수적인 존재 방식으로 요구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그네 인생을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이고, 그렇게 살았을 때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지기에 우리가 꼭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3) 나그네 인생으로 살았을 때, 정말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이 달성되었다는 증거를 내 삶에서 볼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의미에서 이 “하나님의 백성의 나그네 된 삶”을 실천하고 있고, 그런 실천을 통해 하나님이 명령하신 뜻이 성취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얻는 대가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자신보다 결코 크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것,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잃어버리는 것은 사실 아무 것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임을 배우는 것은 나그네의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희미하게나마 저의 삶을 통해서 확인되고 있어서 오늘 그것을 잠시 나누려고 합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광야”의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아담을 포함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또 선택하셔서 이스라엘로 부르신 당신의 백성들은 한결같이 “광야”의 존재였습니다. “광야”라는 메타포와 “나그네”라는 메타포는 사실 일맥상통하는 개념들입니다.
“광야”는 스스로의 힘으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곳은 언제나 안전이 위협 받는 공간이고, 불확정성과 불확실성의 공간입니다. 그 광야에서 인간은 가장 적나라하게 자신과 대면하게 됩니다. 동시에 광야는 가장 적나라하게 자신을 존재하게 하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해주는 실체인 하나님을 대면하게 하는 공간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더는 광야를 “물리적인 공간”에 머물지 않게 합니다. 더는 죽음의 땅, 불임의 땅, 아무 것도 만들어낼 수 없는 땅이 아니라, 가능성의 땅, 창조의 모판이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로 이 황무한 땅에서 양식을 내는 공간이 되게 하실 수 있음을 믿는 믿음을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사랑이 없는 곳이면 외적인 조건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그곳은 광야이고 불임의 땅입니다. 순식간에 엉겅퀴와 가시가 무성한 땅으로 돌변할 수 있는 곳이 에덴이었습니다.
그 모자람이, 그 한계가, 그 결핍이, 그 잠정성이, 그 죽음이, 그 무지가, 바로 생명의 하나님, 다함이 없는 하나님, 부요하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생명의 “틈”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손의 약속과 더불어 불임의 조건을 주셨습니다.
광야의 가장 큰 위험이 “불평”이라면 가나안의 가장 큰 위험은 “망각”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가나안에서의 나그네 삶 3가지는 아래와 같습니다.
1. 고아와 과부, 그리고 이방인들, 즉 객과 같은 존재, 나그네와 같은 존재에 대해서 살뜰하게 챙겨야 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에서의 땅과 정착생활이 자격 없는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과, 그들은 계속 나그네라는 인식을 갖고 살아야 했습니다.
2. 그들은 결코 땅의 지계표를 옮겨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절대 힘이 있다고 해서 다른 지파의 땅을 침범하여 영토를 넓혀서는 안 되었습니다. 땅이 넓어진다고 해서 더 많은 행복이 찾아오고 더 안전한 삶, 더 안식을 누리는 삶을 얻을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3. 그들은 안식일을 지켜야 했습니다. 안식년을 지켜야 했고, 50년 째에는 희년을 지켜야 했습니다. 그 시간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시간이고, 하나님이 이 모든 생존의 조건들을 주장하고 계신다는 것을 인정하는 시간이고, 우리 자신이 나그네가 되는 시간입니다. 자기의 생존을 좌우한다고 생각했던 땅의 질서, 노동의 리듬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정해주신 질서, 은혜의 리듬에 자신을 튜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나그네의 삶의 본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간에 생체리듬을 맞추는 삶, 그것이 나그네 삶입니다. 땅을 돌려주고, 종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 그것이 바로 폭압적인 압제자가 아니라 나그네로 돌아가는 삶입니다.
새 이스라엘의 대표인 메시아, 예수님을 통해서 가장 잘 보여주고 싶은 이상적인 하나님의 백성의 모델은 자유와 사랑의 사람, 안식과 샬롬의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그네의 정체성을 따라 산다는 것은 그것은 “자유의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나그네는 그 자신이 자유인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유롭게 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결코 인간이 그 어떤 형상으로 만들어 길들일 수 없는 하나님, 그 자유의 하나님을 인정하는 백성이 바로 나그네 된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그 자유의 삶이 무엇이고, 그 사랑의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삶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나그네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의 모든 행적들은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나그네로 사셨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에게 나그네 삶은, 주변적인 삶은, 하나님의 아들이 보인 예외적인 호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일부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아이러니는 죽음을 통해서 모든 죽어 있는 것들을 살리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무도 생각해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지혜였습니다. 십자가의 방식, 자기 부인의 방식, 세상을 향한 죽음의 방식, 그것이 생명을 창조한다는 진리를 아는 것이 복음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나그네의 삶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것은 구원의 목표가 단지 죄책이 제거되는 사람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하여 사랑의 사람, 자유의 사람을 창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자유를 주는 일입니다. 하나님께 자유를 드리는 일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이웃에게 자유를 주는 일이 이웃 사랑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서 자유롭게 하나님 노릇 하시게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나그네 의식, 광야의식, 불임 의식, 피조 의식이 남아 있는 동안만 반드시 보아야 할 그것을 보는 존재가 되고 반드시 들어야 할 그것을 듣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기를 선택할 때 우리는 힘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은 불가능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그네 삶, 중심을 향하지 않고 변방을 향했던 삶, 주류를 향하지 않고 주변을 향했던 삶, 군림이 아니라 섬김을 선택하셨던 삶, 실리를 추구하지 않고 진리를 추구하셨던 삶, 그 사랑과 자유의 삶 때문에,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우리가 버리고 비울수록 우리가 벽을 허물고 손을 잡을수록 우리가 우리 자신의 빗장을 열고 자아긍정의 환상에서 벗어나 타인의 세계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경청할수록 즉 우리가 나그네로 살수록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