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찬양으로 오전 전체집회를 시작합니다. 전체집회 장소를 꽉 메운 참가자들의 찬양이 뜨겁습니다.

베드로전서의 말씀으로 오전 성경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기록합니다.

베드로전서 2:11-12 (새번역)
11 사랑하는 여러분, 나는 나그네와 거류민 같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멀 리하십시오. 12 여러분은 이방 사람 가운데서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그들은 여러분더러 악을 행 하는 자라고 욕하다가도, 여러분의 바른 행위를 보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적 정욕”을 저는 하나님과 대치상태에 있는 이 시대의 풍조로 해석해 보고 싶습니다. 세상의 길, 그것을 저는 높음을 향해 끊임없이 오르려고 하는 “상향주의”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중심을 향해 오르고 오르고 또 올라가는 것, 그것이 성공이고, 우리가 사는 목적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교육, 스포츠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무한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올라가는 것을 숭배하는 분위기 속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철저히 “하향주의”입니다. 빌립보서 2:5-11을 들어 보십시오. 제가 성경을 보면서 전율하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5.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6.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8.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9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10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11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과 행동을 움직인 동력이 되었던 그 마음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아니하시는 마음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이라는 당신의 기득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그 마음을 비우셨습니다. 그건 예수님께 억지로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마음이었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을 당연히 누려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그 마음이 예수님을 이 땅에 나그네로 오시게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그런 마음을 품는다면 우리도 나그네처럼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좋은 것들도 다 누리고 싶고, 그리스도인으로 누리게 되는 혜택도 다 누리고 싶다는데 있는 거겠지요. 그저 취미생활로 하는게 아니라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참 쉽지 않은 거 같습니다.

낮은 곳을 향한 나그네로 오신 그 분은 이 땅에서 철저히 주변인으로 사셨습니다. 벌거벗은 갓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고, 그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어머니가 이제는 마지막 보는 앞에서 생의 마지막을 또 다시 벌거벗기운채 죽음을 맞이하는, 생의 입장과 퇴장 모두 소외되고, 주변인이 된 그런 모습으로 우리 주님은 사셨습니다.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하신 그 분이 한모금의 호흡이 절박해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숨을 헐떡 거리 는 사형수의 모습으로 그 분은 오셨습니다.

십자가의 하향성으로 인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주변인Marginality으로 산다는 것은 사회적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지향하 며 살까의 문제입니다. 어떤 가치관, 어떤 세계관을 마음에 품고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이 규정하는 사회적 주변인이 되고자 일부러 애쓸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주류사회에서 영향력 있고 성공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이 규정한 주류/비주류, 중심/주변의 구별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주변인이 된다는 것 그 자체는 우리의 목적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기로 할 때 주변인이 되는 것 은 불가피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의 틈 사이에서 Tension을 느끼며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불이익과 삐걱거림을 경험하며 삽니다. 주변부는 결코 수치스럽거나 패배한 자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리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세상에 역으로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가장 처음 말씀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마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드러나기 시작했지만 아직 온전히 드러나지는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언젠가 때가 되면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나그네 여정은 “이미”에서 출발해서 “아직”까지 가는 여정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상향주의는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깊이 침투해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실망하고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20년 동안 목회자로 살았습니다. 목수가 되기로 마음 먹은 몇몇 계기가 있는데 나누고 싶어요. 목회를 할 때 심방을 가면 한손에는 성경책을 들고, 한손에는 툴박스를 들고 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목사님 그 때 오셔서 말씀 감사했어요, 인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목사님이 그 때 오셔서 고쳐주신 식 탁 아직도 잘 쓰고 있어요. 하시면서 진심으로 고마워합니다. 또 한번은 멕시코 Tecate라는 곳에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거기 산동네에 참 열악한 환경에 사는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그 집에 들어가보니 부 모님은 일 가시고 두 남매가 집에 있었는데 14살 누나는 이름이 크리스티나인데 태어날 때부터 하반신 마비여서 휠체어에 앉아 있고, 11살 남동생은 이름이 살바도르인데 뇌성마비였습니다. 나무를 가지고 현관 앞에 작은 벤치와 페티오를 만들었습니다. 다 만들고 나니 크리스티나가 패티오 위로 휠체어를 끌고 나와서 벤치에 앉았습니다. 지금까지 앞마당이 자갈 밭이어서 휠체어를 끌고 현관 밖으로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늘 캄캄한 집 안에만 있다가 휠체어를 끌고 현관 밖으로 나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미국 국경 철조망이 바라보이는 산꼭대기 집앞 나무 벤치에 앉아서 눈을 감고 따뜻한 햇살을 맞으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아 저렇게 행복해 하는 걸, 평생 목수로 살아도 좋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지막 장면에 물이 언제 포도주가 되냐면 정결예식 항아리에 담겨 있던 물이 혼인 잔치 자리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물이 포도주 로 변화합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만 갖혀서 우리들만의 천국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만 고 여 있다면 결코 아무 맛도 없는 맹물일 수 밖에 없다고요. 항아리에서 물이 떠져서 사람들의 희노애락이 있는 삶의 일상적인 현 장으로 옮겨질 때 상향주의, 경쟁에 시달려 흥을 잃어가고 있는 세상을 다시 축제의 자리로 만들 수 있는 포도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길지 않은 이 땅에서의 나그네 여정 동안 물이 아닌 포도주로 살고 싶습니다.

요한복음 2장 때문에 공방 이름을 가나 공방이라고 지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꿈을 꿉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목회 안하고 목수하니까 행복하냐고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요. 내 마음 속에 뿌듯함이 있습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사장으로 사는 기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하향주의의 신비를 아는 사람은 어느 각도에서 봐도 눈빛이 맑고 깊습니다. 같이 있으면 더 오래 함께 있고 싶습니다.

여러분과 제가 있는 자리가 그리 거창한 자리가 아니라고 낙심하지 맙시다.  주변이야말로, 하나님이 사람을 만나주시는 곳입니다. 나그네로 산다는 것은 그리 멋있거나 매력 있는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초대교회 때처럼 목숨을 걸고, 핍박당하며 고 난당하며 가는 길도 아닙니다.

담담하게 비와 바람과 햇빛을 받으며 믿음 속에 걸어가는 삶인 경우가 많습니다. 두 주먹 불끈 쥐고 돌진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가 있지만 과정은 흔들리며 가는 길,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는 길이기도 하고, 효율성이 아닌 꾸준함을 요하는 길입니다. 여러분의 나그네 여정 가운데 삼위 하나님의 동행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