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과 나오미 입니다. 룻을 떠나보내려는 나오미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어머니를 따라가는 아름다운 롯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장면입니다. 세분의 액터들이 (나레이터, 룻, 나오미) 성경본문을 실감나게 연출했습니다. 정말 시어머니와 착한 며느리 같았습니다. 성경 봉독을 하고서 박수를 받아보기는 처음이라고 ‘나오미’께서 말씀하시더군요. ^^

룻의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하고 삶의 문제를 대처하는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 나그네의 이야기입니다. 본향을 떠나 타지에서 사는 나그네의 삶을 그린 이야기입니다. 가족이 고생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웃고, 울며 죽음을 경험하는 “보통사람”의 이야기 입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분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름이 배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Paul Miller의 “A Loving Life”라는 책에 이렇게 소개가 됐었습니다.

엘리멜렉 Elimelech = 나의 하나님은 왕 God is My King
나오미 Naomi = 유쾌함 Pleasant, beautiful
말론 Mahlom = 약골이 weak, sickly
기룐 Chilion = 시들이 frail, pine away
베들레헴 Bethlehem = 떡이 있는 집 House of Bread
모압 Moab = 너의 아빠가 누구니? Who is your Daddy?

우리의 주제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입니다. 오늘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그네로 살아가는 여정에 대해서 두 여인의 나그네 삶을 통해 보고 싶습니다.

사사의 시대는 영적으로 암울한 시기였고 여러 모양의 부정 부패와 죄로 가득한 때 였습니다.

나오미와 그 가족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베들레헴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완전히 달랐습니다. 모압은 베들레헴보다 더 힘든 곳이 되어버립니다. 남편과 두 아들이 죽고 나오미는 두 며느리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어려움이 닥치고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고난과 고생을 피합니다.

나오미와 룻이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 동에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인사를 주고 받으며 인부를 물었습니다. 그때 나오미는 약간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면서 자기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 했습니다. 마라는 쓰다라는 뜻입니다.

1장은 흉년의 시작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은 추수 시작으로 끝납니다. 여러분 너무 성급하게 자신의 인생을 보고 “마라”라고 하지 마세요. 조금만 더 참을 수 있다면, 그리고 내 자심에 조금만 더 여유가 있다면… 기다림의 묘미를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기약이 없다.  기약 없는 기다림은 힘들다.  왜냐하면 우리는 아주 확실한 것, 그리고 갖고 싶어하는 것을 위해 기다리기 때문이다. … 어떻게 하나님을 기다리는가? 인내하며 기다린다. 그러나 인내가 수동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 현재의 순간들을 최선을 다해 살며 거기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분의 싸인을 발견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다. … 인내의 기다림은 항상 우리의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주의 깊게 보며, 거기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의 첫 번째 빛 줄기를 보는 것이다.” (헨리 나우웬).

여기서 저는 룻에 대해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마치 나오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나와 같이 가면 큰일 난다. 너의 신이 있는 곳으로 가라. 내 하나님이 네 인생도 망가트리실 거다.” 가짜 신은 진짜 하나님보다 훨씬 대하기가 쉽고 편합니다. 가짜 신은 우리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룻은 그 리얼 하나님을 좇겠다고 합니다.

룻은 확실한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6-19절). 그는 특별한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겁니다. 나오미에게 헌신하는 것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 헌신한다는 겁니다. 룻은 나오미를 위해서 자기의생명을 버리겠다고 고백하는 겁니다. 그리고 룻은 나오미의 울부짖는 기도의 응답이 되는 겁니다.

룻은 정말 어메이징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특별한 사랑과 헌신을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사랑할 수 있는 힘은 사랑이 아니라 그가 찾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의 회심은 아주 자연스럽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아주 중요한 주제를 찾게됩니다. “헤세드”라는 단어입니다. 헤세드 사랑은 one way love입니다. 어떤 반응이 온다 할 지라도 사랑과 헌신을 하겠다는 결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오미의 공허함을 젊은 이방인 며느리를 통해서 체위 주시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룻이 탈출구가 없는 사랑으로 나오미의 풍성함이 되고 다 쓰러진 가정을 다시 세우는 일을 합니다.

룻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첫 5절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의 망가짐과 타락의 모형을 보게 됩니다. 나오미는 죽음과 헤어짐을 경험하고, 힘없이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상황에 다다랐습니다.

룻이 나오미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내 생명을 지키고 나 살겠다고 떠나면 나오미는 죽을 것이다. 내가 희생하면 나오미는 살 수 있다. 그의 가난을 내가 짊어 메 야지. 그의 주변인 생활을 내가 살아 야지. 내가 나그네로 살아야지. 내가 그의 가난을 짊어짐으로 그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야지.”

룻은 자기의 아비의 집을 떠났습니다. 룻은 자기의 본향을 떠났습니다. 룻은 낮은 곳으로 갔습니다. 룻은 주변인이 되었습니다그는 고난의 종이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했습니다. 룻을 통하여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분명 주변인으로 사셨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성육신의 삶을 사셨습니다. 나그네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 다가 오셔서 우리와 함께 지내고,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므로 죄의 값을 치루고 끝까지 의리를 (헤세드) 지키겠다는 예수님의 헌신입니다.

룻이 가리키는 그분을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룻처럼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진정한 집을 떠나 (빌 2:6-7),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태어 나시고, 머리 둘 곳도, 집도 없이 떠돌아다니다 (마 8:20), 마침내 추방과 거절의 표지인 성 문 밖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습니다 (히 13:11-12). 그분은 우리를 대신하여 인류가 당해야 하는 추방, 곧 소외된 상태를 경험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가 쫓겨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궁극적 출애굽이며 추방으로부터의 궁극적 탈출입니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우리의 진정한 본향이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맛보신 살아있는 증인이 되십니다. 그분은 “만물”을 화목하게 하실 것이며 (골 1:16-20) 다시금 세상을 하나님의 동산으로 만드실 것입니다 (계 21:1-8).

오늘의 주제는 “나그네 하나님 백성”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중요하지만 그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의 핵심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핵심은 예수님이 주변인으로 오셨으니 나도 주변인이 되어야겠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섬기는 것도 너무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야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The essence of being a Christian is that I’m in Christ.
My life is in Christ.
You are IN Christ.

예수님의 삶과 고통과 죽음과 영광스런 부활에 여러분이 속해 있습니까?
The heart of the gospel is that everything that is actually true of Christ is legally and really true of you if you’re a Christian.

그리스도안에 있는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내가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면, 믿음으로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면,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겸손하면서도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