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sta 2017 D4] 저녁 설교

저녁 집회는 송병주 목사님께서 전해 주셨습니다.

나그네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책임질 것 없이 사는 것이 나그네의 소명이 아니라, 나그네의 소명은 이 땅에서 잃어버릴 것이 없는 삶을 말합니다. 하지만, 나그네는 잃어버릴 것이 없기에 진리와 정의와 사랑을 추구할 수 있는 삶입니다.

구약 시대에도 주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있었고, 비주류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역사는 항상 주류가 쓰고 있는 듯 하나 하나님은 비주류들, 언저리과 주변부에 있었던 사람들을 통해 시대를 회복하는 일에 사용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가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아세요? 그와 갈등한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이사야의 제자들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통파 사독의 후예들이고 이사야의 직속제자들입니다. 단순히 썩은 제사장들이 아닙니다. 이사야의 제자들입니다.

이사야의 제자들은 국가신학, 애국신학을 들고 나와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고, 다윗의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는다. 아무리 바벨론이 공격해와도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대적들에게서 우리를 구하신다. 앗수르 제국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걱정하지 마라.” 이것을 국가주의 신학, 애국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예레미야와 갈등한 사람들은 부패하고 타락한 선지자들이 아니라, 당대 최고의 정통성을 가진 학파와 갈등이었습니다.

예레미야가 비주류 선지자로 분류되는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그가 ‘아나돗의 제사장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다윗 시대의 두명의 제사장을 알아야 합니다. 그 때 다윗을 도왔던 2명의 제사장이 있었는데, 첫째는 사독이고 둘째가 아비아달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제사장은 나중에 다윗이 죽고난 다음 다음 왕을 세우는 일에서 갈라서게 됩니다. 아비아달 제사장은 요압장군과 함께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는 일을 시도했고, 제사장 사독은 선지자 나단과 함께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함께한 사독 제사장과 아비아달 제사장은 정적이되고, 두갈래길을 가야 했습니다.

이 정쟁의 결과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의 승리로 솔로몬이 왕이 됩니다. 그래서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리는 일을 주도한 요압장군은 죽임을 당했으나 제사장 아비아달은 죽지 않고 아나돗으로 낙향하였습니다. 솔로몬이 사독을 대제사장으로 삼고 아비아달은 살려주는되신 고향으로 귀향을 보내 버렸습니다. 그러면 예레미야는 어디 출신일까요? 렘 1:1을 봅시다. “벤냐민의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비주류였던 아나돗 출신으로 아비아들 제사장의 후예중인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소명은 위대한 사역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에 그리고 청년사역을 하면서 항상 유행했던 말이 “어떤 소명을 받았느냐? 넌 비전이 있느냐?” 였습니다. 그래서 비전, 소명 이런 것은 굉장히 위대하고 가치있고 신성한 것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비전, 소명 이런 단어는 항상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녔던 것을 기억합니다.

오히려 소명은 그런 위대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살펴 보는 것처럼 소명은 바로 지극히 작은 자에게로 부르시는 소명이었습니다. 소명은 위대함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으로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염소와 양의 갈림길은 지극히 작은 자를 향한 섬김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전혀 그렇게 다루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고, 목마른 자에게 마시우게 하며, 나그네 된 자들을 영접하고, 헐 벗은 자에게 옷을 입히며, 병든 자들을 돌보며, 감옥에 갖힌 자들을 방문하는 것이 바로 왕되신 하나님에게 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40절은 이것을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에 염소와 양의 갈림길은 하나님에게 얼마나 잘했느냐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어떻게 했느냐를 본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지극히 작은 자 하나는 작다는 것의 최상급이며, 단수형입니다. 여러 사람에게 많은 사람에게 잘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단 한명이라도 가장 보잘 것없는 한명에게 한 것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는 변질되었습니다. 위대함을 추구하느라 한 영혼을 잃어버렸습니다. 이건 성경공부가 나쁘다, 성령운동이 나쁘다, 교회 성장운동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지극히 작은자를 통해 예수님을 섬기는 법을 잃어버렸다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 성경, 교회는 본질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 받은 죄인을 향항 긍휼을 잊었다면 성경공부도 비본질이 되고, 성령은사 체험도 비본질이며, 우리가 세운 교회도 비본질이 될 수 있습니다.


골 1:24은 말합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몬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자신을 복음의 일꾼으로 교회의 일꾼으로 소개합니다. 복음의 일꾼은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주님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너희를 위하여’입니다. 바로 너희, 곧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곧 십자가의 길을 내 육체에 감당하겠다는 뜻입니다. 그가 복음의 일꾼으로 부름 받은 이유는 누구를 위해서 입니까? 물론,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나에게 돌 던진 사람들, 그 땅을 향해 다시 들어가는 것이 나그네의 삶입니다.

청지기 정신이 바로 나그네로서 선교적 제자도를 실현하는 가장 아름다운 삶입니다. 눅 12:45-47을 읽어봅시다. 청지기는 주인만 잘 섬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들을 잘 돌봐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청지기라고 부를 때, 우리의 가치는 “우리가 주인에게 얼마나 잘하느냐 보다 종들에게 잘하느냐에 달려있다”는 말입니다. 청지기가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쫓겨나는 이유는 그가 주인에게 잘못해서가 아니라 사람에게 잘 못했기 때문입니다.

젊은 신학도 시절, 저는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드리겠다고 결단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른 마음으로 도전하셨어요. “날 위해 목숨을 던지겠다고 하지 말고, 내가 내 아들을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한 내 양들을 위해서 생명을 드리겠다고 하면 안되겠니?”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일반 종교는 신을 위해 백성이 죽어야 합니다. 모든 종교는 신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바칩니다.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입니다. 백성을 위해 신이 죽으신 겁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강한 종교’가 아니라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고 용서한 ‘미련한 복음’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강한 십자군’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 십자가의 도’를 우리에게 원하고 계십니다. ‘죽여서’ 이루려 하지 말고, ‘죽어서’ 이루어야합니다. 원수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수된 것을 소멸시키라고 했습니다. 양들을 위해 생명을 드리겠다는 사람들은 그저 따뜻합니다. 그게 바로 청지기입니다. 주인을 제대로 섬기는 길이 종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길입니다.

기억합시다. 온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은 한 생명에게 시간 쓰는 것이 낭비입니다. 하지만,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한 생명에게 시간 쓰는 것이 온 세상을 위해 사용하는 것과 같습니다.

썩고 더러운 것을 씻어 내리려면 자기도 더러워지는 것을 하숫물에서 배웠습니다. 그런 자리에 쓰시면 하수도에 흘러가는 물이 되도 감사하겠습니다.

참된 믿음의 사람들은 많이 하고도 뭘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뭘 많이 하고서도 남는 건 은혜와 믿음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염소들은 자신들이 뭘 했다는 것을 기억합니다. 내려놓는 것이 아닌 내려놓게 되는 수동태의 삶입니다.

이삭처럼 우물을 빼앗기면 보복하지 않고 다시 파고, 또 빼앗기고 다시 파고… 쉽게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맡기신 길을 걸어가세요.

No comments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