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를 향하는 발걸음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찬양팀을 위해 중보기도 용사들께서 뜨겁게 기도해 주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만난 예수님을 증거한 동준 형제님께 감사드립니다.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의지하여 용감하게 나아가는 모습에 큰 감동이 있었습니다.

성경봉독 시간입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 아닌겨?”  (불만있능겨? 라고 말할 것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화종부 목사님께서 “은혜가 왕 노릇하는 나라”라는 제목으로 마태복음 19:30-20:16을 말씀 전해주셨습니다. 설교의 일부를 아래에 올립니다.

우리 구주의 첫번째 메세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입니다. 그 뜻은 이미 그 나라가 와서 가까이에 있음을 말합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살고있는 지금의 세상과 다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 그 나라가 얼마나 다른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않다면, 이미 온 그 나라를 우리는 누리지 못 할 것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첫째가 꼴찌되며 꼴찌들이 첫째가 될것이다”라고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조입니다.

오늘의 말씀엔 세 부류의 일꾼이 등장합니다. 첫번째, 아침 6시에 온 일꾼들은 1데나리온을 약속받고 왔습니다. 두번 째, 9시 12시 15시에 온 일꾼들은 상당한 금액을 약속받고 왔습니다. 마지막 17시에 온 사람들은 구체적인 임금에 대한 약속은 나와있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이들에겐 묻지않은 질문을 하셨는데 이 질문과 대답을 통해 이들은 노동시장에서 외면당해 남아있는 자들이라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V7). 그러나 문제는 바로 다음 발생합니다. 늦게 온 자들 부터 품삯을 받기 시작했는데 모두 같은 1데나리온을 받은 것입니다. 가장 먼저 온 일꾼들의 불평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입니다. 그 불평은 많이 일한 사람이 많이 받아야하고, 적게 일하면 그만큼 적게 받아야하는 우리가 말하는 “정의”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지 않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정의”와 하나님의 나라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금만 일해도 큰 임금을 받는 나라, 능력이 많아서 많이 한다고 상급이 커야하는 그런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일한 분량과 관계없이, 하나님의 부요한 품성을 따라 풍성한 삯을 받는 나라입니다. 물론 결코 우리는 새벽에 온 일꾼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조건과 자격을 요구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방식대로 넘치게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보내심도 이와 같습니다. 죄로 가득찬 이 곳에 구주가 오심으로 열어둔 하나님의 나라는 상상도 하지못할 세상과는 다른 질서를 보여줍니다. 세상의 무한 경쟁의 궤도 속에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 은혜의 질서가 있습니다. 계속 쉼없이 달려가는 성취와 소유, 성공을 향한 욕망이 갖지 못한 것에대한 불평과 원망이 되어 내 주변의 은혜는 정작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행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눈 앞의 성취가 행복을 보장하는 듯 보여도 그것을 향해 달려가 이루었을 때 그 기쁨은 잠시, 또다른 걱정과 불안, 두려움이 몰려오는 우리를 쉽게 발견할수 있습니다. 이것은 땅에 있는 것들의 질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어떠한 자격과 행함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우리같은 자격없는 자들을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따라 채워주시는 그 주님을 바라볼 때에,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주어집니다. 이것이 진짜 자유입니다. 나 스스로의 업그레이드를 위해 쉼없이 달려가는, 잠시의 기쁨과 더 큰 두려움의 굴레 속에 나 스스로의 종이 되는 삶에서 벗어나 생수의 강이신 주님을 바라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기독교는 과연 나를 깨어지게 하는지, 나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도구인지 돌아봅니다. 땅에 있는 것들의 질서(즉 자아실현, 성공, 두려움)보다 은혜의 새로운 질서가 더 커보이는 삶! 믿는 구석이 되시는 하나님에 의한 자유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서 손해본 일꾼은 없습니다. 늦게 온 일꾼의 품삯을 똑같이 줌으로서 가장 손해본 사람은 결국 주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가 선포하는 은혜의 근거입니다. 주인의 희생에 근거하여 일한 것이 없는 종들도 혜택받는 다른 구조. 그 근거는 십자가에서도 동일하게 보여집니다. 창조주의 아들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에 희생에 근거한 그 은혜가 자격없는 우리를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이 열어주신 새로운 질서, 그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일어설 수 없습니다. 복음과 기독교의 심장과 같은 은혜가 아닌, 세상보다 조금 나은 도덕성으로 세상에 편승했기에 우리가 욕을 먹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아는 자로, 그 은혜가 왕 된 나라에서의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어지는 기도의 시간입니다.

전해진 말씀을 찬찬히 다시 곱씹는 시간입니다. 듣고 흘려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소화하고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입니다. 머리가 아닌 가슴에 새겨진 말씀이 되길 바랍니다.